수록작품(전체)
72호/신작시/최금진/농협장례식장 외1편
페이지 정보

본문
72호/신작시/최금진/농협장례식장 외1편
농협장례식장 외1편
최금진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농협장례식장
밭 갈다 죽은 사람, 감자 심다 죽은 사람
모두 녹슨 호미 같은 손 내려놓고 다급히 이곳으로 온다
마을에서 제일 깨끗하고 제일 따뜻하고 시원한 곳
작은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 데서나 바다를 만나듯
농약 치고 풀 뽑고 거름 주고 또 남은 일 찾아
밤늦게까지 마당에 불 켜고 채소를 다듬다 보면
불쑥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농협장례식장과 만난다
죽음이 사람들을 심어 놓고 사람들을 추수하는 곳
경운기나 트랙터로 실어나르는 한 무더기 모판의 벼들처럼
이른 아침부터 영안실에 날라다 놓는
참 부지런한 죽음들이 장례식장 칸칸의 방에 묵는다
영안실도 일종의 숙박업이다
사흘 장례를 치르고 중산간 어디에 있다는 경치 좋은
화장터로 관광 가듯 떠나는 시체들이 관 속에서 즐거워 달그락거린다
첫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가족들 배웅을 받으며
파종 시기며 전지해야 할 과일나무 따위엔 관심도 없다
농협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육개장 조식도 맛있고
직원들과 상조사들의 서비스는 친절하다
아무도 후기를 달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지만
주렁주렁 금빛으로 익어가는 감귤밭이 올해도 풍년이다
괭이 날처럼 굽은 등으로 사다리에 오르는 노인
덜덜덜 떨리는 치아로 감귤을 한입 베어무는 노인
돈 한 푼 내지 않고 장기 체류하며 이곳에
너무 오래 묵은 손님은 아닐까
장례식장 건물은 노인의 모자에 새겨진 농협 마크를 훔쳐보며
제가 거느리고 호출하는 직원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마을 사람들이 단체 관광 가듯 장례식장으로 꾸역꾸역 모여들고
잘 가라고 손에 봉투 하나씩을 들고 있고
삼박사일 패키지 상품에 맞춰
농협장례식장은 깨끗히 청소를 마쳐놓은 상태다
농지원부를 펼쳐놓고 명부를 확인하며 이 밤에도 영업 중이다
문어
통발 속에서 문어를 건져 올리는 옆집 할아버지 손에서
문어는 꾹꾹, 소리를 내며 운다
할아버지네 담장에 심겨진 해바라기가 노란 눈알을 반짝이며 보고 있었다
손목을 감아 올라오는 여덟 개의 다리가
불길처럼 화르륵 할아버지 뺨까지 번졌다
통발 안에 미끼로 넣어둔 허연 돼지비계를
문어는 마지막까지 꽉 물고 있었다
시집 가서 명절에도 오지 않는 외동딸을 할아버지는 늘 그리워했다
할아버지 냉장고엔 데친 문어들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가득 들어 있었다
시뻘건 대가리들이 먹물을 품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칼로 방금 건져 올린 문어 다리를 하나 잘라내
헐거운 이빨로 질겅질겅 씹는다
문어는 힘없는 할아버지 혓바닥과 싸우느라
마지막까지 빨판에 바싹 힘을 주고 있었다
딸한테 물려 줄 거야, 절대 안 팔아, 할아버지는 바닷가 작은 땅을
꽉 움켜쥐고 내놓지 않았다
어제 다녀간 부동산업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 딸과 싸워야 했다
문어가 통발 속에서 꾸역꾸역, 운다
사람들은 문어가 영물이라고,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나가 통발을 건지고
어두운 저녁에 통발을 놓는다
올 추석까지 잡아놓는다면 아마도 수십 마리는 될 것이다
끓는 솥에 다리부터 데쳐야 꽃 모양으로 활짝 펼쳐진 예쁜 모양이 된다고
마당에 걸어놓은 솥에 불을 지피며 할아버지는
자꾸 돌담에 가득 피는 해바라기며 맨드라미를 바라보았다
좁은 양은솥에서는 움켜쥘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붉은 팔다리를 꽃처럼 활짝 펼쳐놓으며
문어가 사람처럼 또 울고 있었다
*최금진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이전글72호/신작시/김다연/혼잣말을 쳐라 외1편 19.06.28
- 다음글72호/신작시/조성림/마두금 외1편 19.06.2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