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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신작시/김상숙/봄볕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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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신작시/김상숙/봄볕 외1편
봄볕 외1편
김상숙
봄볕이 그늘을 밀어내며 온다
바람 속을 뚫고 오느라 나뭇가지에 찢겨
가느다란 실눈이다
오그라든 손가락 발가락을 펴며
흩어진 머리카락 빗질하며 온다
주인이 외출하고 없는 빈집
누렁이 축 처진 어깨를 쓰다듬으며
쓰러져가는 달동네 담장 디딤돌 삼아
나 몰라라
하늘로만 치솟는 십자가를 기록하며
골목에서 채인 길고양이
떨고 있는 마음 부축하며
가만가만 오고 있다
낯선 이가 지나가도 모른 척
댓돌 위에 뒤집어진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하며
깜빡깜빡 졸고 있는 내 겨드랑이 간질이며 온다
손수건만 한 햇볕이 네 귀퉁이를 활짝 펴
말라 얼룩진 내 창가에 볼을 대고 있는
노랑 초록 분홍입술 데리고 온다
집 나온 민달팽이 걸음걸음 눈 맞추며 간섭하며 온다
고즈넉한 내 우물 들여다보며 채우며 온다
세상 모든 그늘이 여백 없이 밀려난다
휴면
굽이굽이 이 외진 저수지까지 찾아들었다 무심히 던져진 낚싯대와 어떤 의문의 뼛조각들 내 발끝에서 밟힌다 토막이 남긴 소란스런 침묵들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 비린내를 감춘다 저기 저수지 발치에 금고도 처박혀 있다 바람이 열쇠구멍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마치 비밀을 캐물으려는 듯 숨 막히는 고요가 입을 다물고 있다 언젠가 썩지 않는 시간을 토해내면 닫혀 있던 어느 삶이 다 누설 되고 말 저 얇은 귀퉁이 수직의 관계 넘어서는 이 탱탱한 수평 모든 것 지켜본 오리나무 그림자 비틀려 있다 파고드는 햇빛을 밀어내는 저수지 건너편에 꼭 묶여 무겁게 떠있는 포대자루 하나 흉흉한 소문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있다 주인 잃은 신발 한 짝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알루미늄캔은 유통기한이 임박했는지 윤곽을 버렸다 겹겹의 창에 신발 한 짝을 툭, 던지자 저수지 창이 와장창 깨진다 또 한 발이 마저 수장 된다 난해한 목록을 감추느라 흐릿한 창이 점점 어두워진다 사방 꼭꼭 잠근다 은폐된 어둠을 삼킨 수련이 어둠의 세력을 부풀리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수지의 창을 깨뜨린다 요요히 손을 내뻗고 있다
*김상숙 2003년 시집 『강물 속에 그늘이 있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물렁물렁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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