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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장편연재4/김현숙/흐린 강 저편4/도시의 야생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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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장편연재4/김현숙/흐린 강 저편4/도시의 야생마
흐린 강 저편
제4회 / 도시의 야생마
김현숙
희연이 첫 딸을 낳았다. 추석을 단 하루 앞 둔 마악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혜옥은 벌써 몇 개월전부터 기저귀감으로 시장에서 소창 한 필을 끊어 와 두어 차례 푹 삶고 매끈히 다듬어 희연의 산후 준비물을 빈틈없이 준비했다. 희연의 어머니 강 여사가 목화솜을 넣어 손수 만든 아기 이불, 베개 등속 외에도 혜옥은 말없이 출산용품을 하나씩 마련해놓는 지혜를 발휘하여 희연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정작 산모인 희연은 오직 막연한 심적 부담과 두려움 뿐, 막상 뭘 어찌 준비해야 할지 소쇄한 바람결에 그저 스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교단에서 메워갈 뿐이었다.
애가 애를 낳았으니 우야겠노. 24시간의 극심한 진통 끝에 결국 촉진제를 맞고서야 간신히 딸아이를 분만한 희연의 하얗게 까드라진 모습을 바라보며 강여사는 염려의 빛 가득한 낯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 그건 너무도 벅차고 아득한 길임을……. 희연의 심정은 아직 전혀 준비가 안된 모성이었다.
갓 태어난 희연의 첫 딸 유미는 심한 저체중에다 매우 병약한 편이라 키우기가 힘든 아이였다. 우유병을 빠는 힘도 약해 도무지 제 양을 다 먹는 경우가 거의 없어 혜옥의 속을 태웠다. 출산 휴가 한 달만에 다시 학교로 나간 희연을 대신하여 혜옥은 온갖 정성을 다해 유미를 보살폈다. 특유의 깔끔함과 완벽성이 육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우유병이며 기저귀, 기타 유아용품들을 매일매일 빨고 삶고 소독하며 청결에 유념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이유식도 요모저모 책을 보고 연구하여 생후 개월 수에 딱 맞게 만들어 먹여 태어날 때 허약했던 유미는 백일이 지나자 날로 통통하게 살이 올라 발그레 복숭아빛 볼을 가진 아기로 변해갔다.
언니, 유미가 떡애기처럼 날로 예뻐져요. 우유 먹이며 내려다 보면 암것두 생각 안나고 꺽정시럽던 게 다 사라진당께요. 혜옥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희연은 일면 고맙고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여전히 싸아한 불안감이 자리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창 때인 그 나이에 종일 아이에게만 매달려 산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엄마인 자신조차도 아이를 전적으로 돌봐야 하는 주말보단 출근길에 오르는 월요일이 휠씬 홀가분한 기분임을 잘 알고 있거늘. 하기에 희연의 심경은 늘 살얼음을 딛듯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나마 혜옥의 낙이 있다면 주로 주말을 이용한 편물과 피아노 학원 수강, 그리고 짬짬이 책을 손에 들고 꾸준히 이어가는 독서가 전부였으나 그래도 ‘조카 바보’ 란 소릴 들을 만큼 끔찍한 정성으로 유미를 키운 덕분에 약하게 태어난 아이는 탈없이 쑥쑥 잘 자라났다.
유미가 첫돌을 지난 다음 해 봄 시난고난 병치레를 하던 시부가 세상을 떠났다.
조상대대로 땅을 일구며 살아온 터전이라 온동네가 다 참여하다시피한 초상이었는데 사흘 내내 비가 내렸다. 봄비라기엔 너무 줄기찬 빗발이라 문상을 받는 일이 여간 어렵질 않았다. 마당 가득 차일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 빈소가 있는 안채에서 다 수용할 수 없는 조문객을 맞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우천으로인해 불편과 옹색함을 면할 길이 없었다. 손님상을 들고 발을 딛을 때마다 마당에 깔린 가마니 위로 벌건 흙탕물이 배어올라 희연은 몇 번이고 그만 미끈, 발을 헛딛곤 했다. 하마터면 상을 들고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 상황이었다.
도리없이 희연은 그 일은 혜옥에게 넘긴 후 자신은 차라리 설거지팀에 합류하겠노라 자청했다. 동네 아낙들이 모두 나서 저마다 일손을 돕긴 했으나 워낙 삼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판국이라, 상주들이라고 해서 두 손 놓고 조신히 앉아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상복 치마를 둘둘 말아 허리끈으로 질끈 묶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부친 차림으로 커다란 함지박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치우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수돗가의 얇은 깔개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을 씻자니 우선 허리와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고, 무엇보다 호스를 대고 몇 번씩 물을 갈아가며 설거지를 하려는 희연의 결벽증에 동네 아낙들이 모두 혀를 차며 제동을 걸어와 도무지 성에 차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상집이서 설거질 고렇콤 하믄 손님덜을 언지 다 받는대여. 뭐시냐, 말간 물에 걍 후르륵 가셔내도 암시렁 안혀요. 세제 거품을 흐르는 수돗물에 대고 말갛게 행궈내려는 희연의 행위에 대해 아낙들은 모두 기가 찬다는 듯 그녀의 지나친 청결을 만류했다. 물을 가득 채운 함지박을 여러 개 늘어놓고 차례로 그릇을 담가 휘저은 후 커다란 소쿠리에 건져내면 그걸로 끝이었다. 대신 수도꼭지에서 호스로 연결된 함지박의 물을 자주 갈아주면 된다는 것. 하지만 그런 식의 설거지가 과연 완벽할까. 동네 아낙들과 희연의 사고는 그런 작은 일에서부터 어긋나 뭔가 말할 수 없는 이질감과 거리감이 생겨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 두 살이 채 안된 유미는 떠들썩한 상가 분위기에 적응 못해 계속 울어댔고 혜옥은 아예 그런 유미를 등에 들쳐업곤 씩씩하게 상을 날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저 고모 극성 좀 보랑께로. 조카라면 껌뻑 죽는단께. 근디 아그가 대저 누굴 닮았당가. 후제 크면 코도 쪼깐 세우고 뭐시냐 그 쌍까풀도 쫌 해야쓰겄네이. 일손을 돕던 아낙들은 저마다 혜옥의 등에 업힌 유미를 흘낏거리며 쑥덕거렸다.
하이고, 벨 꺽정을 다혀요. 에렀을 때 코 납작혀도 후제 크면 다 나온당께요. 을매든지 예뻐질 것인께 꺽정들 마시랑께요. 아낙들의 수군거림을 들을 때면 혜옥은 바락 성을 내며 그들에 맞선 당찬 대거리를 잊지 않았다. 염병헐! 넘의 집 귀한 자식 놓고 뭘라 저리 말들을 해쌌는지 승질 나 죽겄네. 눈에 확 불을 켜며 혜옥은 유미를 업은 채 화를 못 참아 씩씩거렸다. 지 손으로 키운 조카라고 워찌 저렇콤 벌벌 헐 수가 있다냐. 영락읎는 조카바보여! 애 어미랑 고모가 완전 바뀐 격이랑께. 아낙들은 무색함을 못 이겨 그예 한 마디씩 토를 달기 일쑤였다.
비록 궂은 날씨 속에 치러진 초상이었으나 발인날은 좀 빠끔히 날이 개어 다행이었고, 장례는 무사히 끝이 났다. 그러나 희연은 결혼 후 처음으로 인륜지대사라 할 큰일을 치르며 거듭 절감했다. 맏며느리로서 자신이 시집의 풍습이나 가풍에 얼마나 걸맞지 않은 유형의 여자인지를. 정말 많은 것에 부합되질 않는 여자라는 새삼스런 자각에 깊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나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이 전신을 휘몰아온 까닭이었다. 때문에 결혼생활 자체가 더욱 힘겹고 짐스럽게만 느껴져 자주 우울했다.
그런 중에도 혜옥은 조카를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고 유미는 몽실몽실 잘 자라났다. 밤이면 혜옥은 창가 스텐드 곁에 앉아 펜팔 친구인 중학교 동창과 긴 사연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육아의 고달픔을 달래는 게 낙이었다. 밤 늦도록 라디오의 음악이 흐르고 불이 환히 켜진 걸 보면 혜옥이 동창 남자애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마침 군에 입대한 혜옥의 친구는 군생활의 고달픔을, 혜옥은 서울 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위안이 되는 고향 친구가 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희연은 생각했다.
혜옥의 동창, 펜팔 친구인 경훈이 군에서 휴가를 나온 어느 봄이었다. 그간 편지로만 서로 깊은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마침내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의 첫 만남이었다. 희연의 집이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터라 그들은 일단 덕수궁으로 만남의 장소를 정하고, 혜옥 쪽에선 도리없이 조카, 유미를 데려 가겠노라 미리 양해를 구해야만 했던 딱한 데이트였다. 머리에 클립을 말아 정성껏 다듬고 희연이 이대입구 양장점에서 맞춰 준 원피스에 스타킹, 구두까지 갖춰 신은 혜옥의 모습은 꽤나 곱고 아리따웠으나, 옆에 달린 3살짜리 꼬마 유미는 아무리 봐도 혹과 같이 거추장스러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꼬모, 꼬모 안아줘, 하며 수시로 팔에 매달리고 기어오르는 통에 얌전한 숙녀 티를 낸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성가신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래도 애면글면 키운 살뜰한 정으로 혜옥은 유미를 보듬어 안고 동창을 만나러 나갔다. “충성!” 얼룩무늬 군복 차림으로 덕수궁 정문에서 혜옥을 기다리던 경훈이 멋진 거수 경례를 붙이며 미소지었다. 혜옥도 수줍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순간 혜옥의 품에 안겨있던 유미가 온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경훈이 얼결에 유미를 받아 안으며 달래 보려 온갖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군복 차림의 남자가 낯선 유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울어 댈 뿐이었다. 간신히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매점에서 막대사탕과 음료수를 사 손에 들려주자 그제야 유미는 겨우 울음을 그치곤 송글송글 눈물을 매단 채 정신없이 사탕을 빨아먹었다.
혜옥의 첫 데이트는 유미의 존재로인해 아늑하고 은은한 만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다.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보채는 아이로인해 잠시도 차분히 대화를 이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없이 산만하고 어수선한 시간이 마냥 흘러갔다. 두 사람은 덕수궁 내 조용한 식당을 찾아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꼬모, 꼬모 쉬이 쉬이…… 유미가 갑자기 다급한 소리로 혜옥의 원피스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순간 상황을 파악한 혜옥이 황망히 유미를 안고 식당의 화장실을 찾아 내달았다. 기저귀를 채워와야만 했었는데 깜찍한 치마 속 도툼한 드로우즈가 폼을 구긴다며 앙증맞은 꽃무늬 팬티만 입혀온 게 불찰이었다. 이제 겨우 소변만을 조금씩 가리는 유미였으나 난데없는 외출이 아이에겐 과중한 스트레스를 안겨 준 것임이 틀림없었다. 화장실에 닿기도 전 유미는 그만 혜옥의 가슴에 흥건히 오줌을 싸고 말았다. 하이고, 가시내야, 이걸 어찐다냐. 급기야 혜옥의 화사한 살구빛 원피스 자락으로 유미의 오줌이 번져내렸다. 그러나 혜옥은 특유의 순발력으로 화장실의 수돗물을 틀어 아이의 아랫도리를 씻기고 손수건을 물에 적셔 몇 번이고 자신의 원피스에 밴 오줌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로 인해 그날의 데이트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자신의 몸 어디엔가 남아 있을 오줌 냄새에 신경이 쓰여 혜옥의 기분은 내내 무참하기만 했다. 그러나 경훈은 전혀 개의치 않듯 그저 신나게 이야길 계속하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려고 애를 썼다. 너, 우리 중3때 교내 합창대회 기억하냐. 니가 그때 너그 반 지휘를 맡았었잖여. 그날 강당에 올라 지휘봉 잡고 선 니 뒷모습에 완전 반했단께. 난 그때 그 곡목도 다 생각난다야. 넌 기억하는가 몰겄네. 그 집앞. 그 곡이었잖여. 이은상 작시, 현재명 작곡. 나 그때부텀 그 노래만 들으믄 막 눈물이 나곤 혔다. 고향 생각, 집 생각, 니 생각이 나서 죽는 중 알았단께. 경훈이 눈물을 내비치며 하는 그런 얘기도 귀에 건성 들어올 만큼 혜옥의 기분은 쳐져만 갔으나, 경훈은 전혀 아랑곳 하질 않았다. 어느새 서로 낯을 익힌 유미를 담쑥 안아도 주고 얼려주고 달래는가 하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말캉한 볼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기도 하여 혜옥을 감동시켰다.
무척 자상하고도 좋은 아빠가 될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해줄 부드럽고 착한 심성의 남편. 그러나…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토록 혐오스러워 탈출한 고향을 훌쩍 벗어나게 해 줄 사람. 적어도 혜옥의 경우는 무엇보다 그런 여건을 채워줄 수 있는 남자여야만 했다. 눈만 뜨면 바라보이는 막막한 지평선 너머 그 어떤 미지의 세계. 혜옥은 늘 태어나 자란 K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꿔왔다. 정체되고 낙후된 소도시.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훈은 과연 그러한 자신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혜옥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읍내의 하나밖에 없는 오래된 사진관, 그 집의 외아들인 경훈은 사진사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위로 누나 셋을 둔 지극히 평범한 집안의 막내였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선지 유독 맘이 여리고 정이 많아 애초 그 점이 혜옥의 마음을 사로잡긴 했다. 또한 험한 농사일, 많은 형제들 속에서 복닥거리며 살아온 그녀로선 얄상한 얼굴에 시골 아이같지 않은 경훈의 해말끔한 외모도 크게 호감으로 작용했음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너무 유약했다. 자신이 지닌 거친 야성을 잠재우고 다독여 순연히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이란 엿볼 수가 없는 기질이 불안하기만 했다.
실은 이즈음 가끔씩 집으로 놀러오는 희연의 제자 찬욱에게 더 마음이 끌림을 어쩔 수가 없었다. 뭔가 강력한 마초적 남성미와 거친 야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찬욱 쪽이 훨씬 더 맘에 듦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이뤄진 경훈과의 첫 데이트 이후, 혜옥은 점차 자신의 마음을 접으며 그로부터 좀 더 멀어질 궁리에만 골똘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의 유약한 심성, 소시민적 사고, 소심한 성격 등이 뭔가 남성적인 강한 매력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이성적인 끌림이라곤 그닥 없는, 그저 허물없고 가까운 동창이란 느낌.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벗어나질 못한 까닭이었다.
찬욱은 희연이 지도하는 특별활동 문예반 반장인 고3 학생이었다. 중고 병설 학교라 정규 수업은 각 교사 당 중·고가 분리되어 수업이 배당되었으나 특활만은 중·고 병합으로 국어 교사인 희연이 문예반을 맡게 되었고 반장이 곧 박찬욱이었다. 그는 곧잘 원고지에 뭔가를 써 서울 온 김에 들렸다며 불쑥불쑥 희연의 아파트를 찾곤 했다. 방문 전 미리 전화를 하긴 했으나 희연도 혜옥도 매번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좀 저돌적인 데가 있는 학생이긴 분명하나 그 모습이 그리 밉지만은 않음이 또한 기이했다. 일산의 한강 하류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이었으나 비교적 부농으로 그 지역 유지라 할 만큼 여유가 있는 환경 탓인지 활달하면서도 구김살 없는 성격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유형이었다.
희연의 집을 방문할 때면 찬욱은 자신의 작품이 실린 원고 뭉치 외, 집에서 농사 지은 한 바구니의 딸기, 싱싱한 계란, 단감 한 상자, 굵은 알밤 등 꼭 무언가를 손에 들고 와 희연이나 혜옥을 감탄케 했다. 어쩜 원고는 차치하고 희연에게 자신이 직접 일손 도와 거둬들인 농산물을 전달키 위해 달려오는 느낌이라 희연은 매번 그러한 찬욱의 모습에 가슴 한 켠이 짠해오곤 했다. 그가 놓고 가는 원고를 찬찬히 읽어보고 진지하게 조언을 해줘도 번번이 자신의 글에 대해선 더 이상 별 관심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샘, 샘 집에서 그냥 좀 머물다 가면 안되나요. 문학 얘긴 학교서나 해주셔요. 제 글은 시도 뭣도 아니에요. 그냥 낙서 같은 것이죠. 요즘 잠이 안 와 끄적거린 것일 뿐입니다. 숱 많은 머리털을 긁적이며 그는 그렇게 말하기 일쑤였고, 희연의 서재에 들어가 빼곡이 꽂혀있는 책 중 한 권을 빼내어 뒤적이다간 때론 그 책을 빌려 간다며 자신의 가방에 집어 넣곤 이내 곧 돌아가곤 하는 게 상례였다. 희연으로선 다 큰 제자의 그러한 방문이 썩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으나, 혜옥은 또래 특유의 동질감에선지 어쩐지 찬욱의 존재를 적이 반겨함이 역력했다. 발그레 홍조 띤 얼굴로 예쁘게 깎은 과일과 차를 내오는 모습이 그걸 말해주었다.
혜옥의 그런 자태는 평소의 활기차고 당찬 기질과는 또 다른 면모라 희연은 놀라웠다. 유미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누군가에게 한 대 맞고 울음보를 터뜨릴 때면 일의 전후 사정, 상황을 살피기도 전에 동네가 떠나가라 소릴 지르며 상대 아이를 혼내주기로 유명한 고모였다. 풍신처럼 울덜 말고 당장 달겨들어 쟈 코를 콱 물어 뜯어불란께. 유미의 등을 와락 떼밀며 상대 아이에게 단단히 겁을 주고서야 겨우 분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시모가 상경해도 혜옥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한시반시 시모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 딸이었다. 이 작것이 대저 왜 이런디야. 사람 좀 작작 볶아싸라잉. 감기에 걸려 떼를 쓰며 울고 보채는 유미의 여린 뺨을 후려갈기며 시모의 앞에서 악을 쓰는가 하면, 예의 아들집에서 식모살이 시키려고 딸을 낳았느냐며 시모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릴 해대기 일쑤였다. 나가 참말로 쟈아 땀시 한시도 여그 와서 맘 편히 못있겠당께. 시상에 아무리 속아지가 난다 혀도 죙일 에미 떨어져 지내는 물같이 에린 것을 워찌 고렇큼 모질게 때릴 수가 있다냐.
나 보란듯키 그러는 것이제잉. 내 꼴을 못 봐서 그런겨. 에미야, 나 낼이락두 당장 내려가야 쓰겄다아.
눈물바람으로 전하는 시모의 그러한 애끓는 하소를 들을 때면 희연 또한 속에서 분노가 치솟고 어린 유미와 노모가 안스러워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불만 있음 말로 해요. 왜 철없는 애를 때리고 그래요. 더구나 겨우 며칠 와 계시는 어머님께도 맘 좀 편하게 해드림 안되나요. 정말이지 화가 나 못 참겠어요. 낼이라도 당장 사표를 내고 싶은 마음 뿐이에요. 가까스로 울화를 다스리며 혜옥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희연의 음성에 심한 떨림이 일었다. 맘이 아렸다. 심장 가운데를 칼로 도려내 듯 예리한 통증이 번져왔다. 하기에 애초 차라리 남의 손에 유미를 맡기려 했으나 굳이 자신이 키우겠다며 돌보미 처녀, 애자를 단호히 내보낸 게 누구였던가. 언니, 울엄니 불쌍헌 사람인 줄 저도 왜 몰겄어요. 허지만 어떨 적엔 자식덜 고상이나 시키려 애를 낳았나, 하는 생각에 증말로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곤 허는 걸 참을 수가 없단께요. 유미도 워찌나 밥 안먹고 땡깡을 부려쌌는지 때론 참말로 동냥 보따리 둘러메고 뛰쳐나가고만 싶단께요. 폭폭헌 지 맘을 누가 알겄어요.
눈물로 호소하는 혜옥의 반응에 희연은 아린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도 완전 타인보단 피붙이가 훨씬 더 미덥고 나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워낙 불같은 성질이라 이따금 조카라도 손찌검 정도는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유미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숨길 수 없이 드러남을 희연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희연의 추궁에 혜옥 스스로 자괴심에 빠져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며 자신의 고약한 성질을 자탄하는 것으로 일은 끝이 났다
처연히 가을비 내리는 어느 저녁 포상 휴가를 얻은 경훈이 민통선 외진 산골 부대에서 혜옥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 왔다. 군용 쌕을 둘러메고 우산도 없이 아파트를 찾아 온 그가 혜옥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혜옥의 낯빛은 반갑기보단 당혹과 착잡함이 엇갈리는 묘한 표정이라 희연은 의아했다. 마악 저녁을 먹은 직후라 예의 깔끔히 설거지까지 하고 나가려는 혜옥을 방으로 밀어넣으며 희연이 말했다. 아가씨, 설거진 내가 할테니 예쁘게 단장하고 나가요. 아녀요, 걍 편허게 하고 나가야지 뭐더러 단장씩이나 허고 나간대여. 혜옥은 허심한 얼굴로 그렇게 답하며 집에서의 차림 그대로 트렌치코트만을 걸친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피부결이 고와 생머리 단발에 화장을 전혀 안해도 스무 살 그 나이 특유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청신한 모습이었다.
경훈은 얼룩무늬 군모와 군복 차림에 카키색 군용 쌕을 둘러멘 채 아파트 부근을 서성이고 있었다. 가는 비에 옷이 젖어가고 있었으나 개의칠 않는 모습이었다.
밥이나 먹었냐. 어디 들어가 비라도 피할 것이제. 혜옥이 그를 이끌어 가까운 국밥집으로 데려갔다. 뜨거운 국밥에 소주 한 병을 시켜 후룩후룩 들이키는 경훈의 모습이 안스러워 혜옥은 가슴이 짠해왔다. 뭘라고 집에나 후딱 갈 것이제 여글 들렸다냐. 혜옥의 야무진 추궁에 소주를 훌쩍이던 경훈이 불게 충혈된 눈으로 혜옥을 정시했다. 뭘라고 들렸냐고라. 시방 너 누굴 놀리냐. 니 얼굴 함 보려고 죽으라 유격 훈련하여 포상 휴갈 얻은 것인디……. 너 요즘 왜 편지도 안하고 그냐. 뭔가 쪼깐 이상허고 폭폭혀서 죽겄드라고오. 너 혹시 맘 변한 것 아니냐. 너 땀시 탈영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은께. 무슨 탈 나믄 너 책음져라잉.
몇 잔의 소주 탓일까. 투정하듯 다소의 엄살을 섞어 말하는 경훈의 모습이 언짢아 혜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경훈의 바로 저런 모습, 어쩜 더없이 유약한 그런 면이 너무 싫어 그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 맘 변해블면 난 이걸로 세상 끝장인께. 경훈이 아무도 몰래 군용 쌕을 뒤적이더니 밥상 아래로 급히 권총을 꺼내보이며 말했다. 순간 그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광채가 번뜩임을 혜옥은 놓치지 않았다. 부대에서 빼내 온 것인지 장난감 권총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형태의 총이었으나 혜옥은 온몸이 굳어져 말을 잃었다.
야아, 오경훈, 너 지발 정신 좀 똑바로 차려라잉. 혜옥이 난데없이 경훈의 어깨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이 방안 퉁수야. 풍신이 양장구 치고 자빠졌다야. 아니 어따 대고 협박이냐, 시방. 쏴라, 쏴. 잘되얐다. 나 어차피 길게 살고 잪은 사람 아닌께 나부텀 죽이고 너 죽으믄 쓰겄다. 둘은 마침 국밥집 호젓한 방에 들어 앉은 터라 시끌벅적한 홀 손님들의 시선을 끌지 않음이 천만다행이었다. 사내 자슥이 되갖고 시상에 흔하고 흔한 가시내 하나 땜시 죽는다고라. 미쳤구만. 글고 시방 우리가 대체 몇 살이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뭔 사랑 타령이냐고. 진짜 사랑은 고런 것이 아니란께. 글고 누가 뭐래도 넌 나의 소중한 친구여. 그것이 을매나 좋은 것이냐고오. 우린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좋은 추억을 나눈 동창인 것이여. 그 이상 뭐가 더 중허겄냐.
혜옥이 얼른 소주 한잔을 따라 원샷을 했다. 얼떨결에 한 대 맞은 경훈이 타오르는 눈길로 혜옥을 쏘아보았다. 그려, 난 승질머리 더럽게 싸나운 년인께 너랑은 어차피 맞질 안혀. 넌 더읎이 착한 애잖여. 그란께 착한 여잘 만나 구순히 잘 살아야 혀. 난 원캉 싸낙빼기라 당췌 못써어. 못 쓴당께.
자작술로 연거푸 들이킨 소주 두어 잔에 흠씬 취해버린 혜옥이 눈물이 흥건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혜옥의 하는 양을 내내 지켜만 보던 경훈이 와락 혜옥의 잔을 빼앗아 술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려 내가 잘못혔다. 우리 부대 무기고 담당병을 몇날 며칠 꼬드겨 간신히 탄환도 읎고 쏘지도 못허는 폐기물 권총 한 자루를 빌려 왔는디, 이것도 들키면 영창감이여. 순전히 너헌티 프로포즈를 쪼깐 좀 별나게 헐까 허곤 빌려온 것인디, 혜옥이 넌 역시나 똑똑헌 가시내다. 전혀 속아넘어가질 않잖여……. 내 불찰이다야. 미안허다. 얼결에 강펀치를 맞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경훈이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속내를 토로했다. 너의 그 착허고 정직한 점 땜시 너를 좋아혔던 건 사실이다. 헌디 우린 결혼까진 아녀. 왠지 내가 널 불행하게 헐 것만 같은 생각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은께. 그간 니가 젤로 고마웠다, 글고 증말 미얀혀. 날씨 추워지는디 이거 목에 두르고 따땃이 허고 가라잉. 내가 지난 봄 널 만난 이후 내내 널 생각하며 털실 사다 뜨개질 헌 것인께. 혜옥이 자신의 가방에서 진녹색 긴 털머플러와 장갑을 꺼내 경훈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맙다…… 인자 자주 연락 안헐 틴께 잘 지내라잉. 쌕을 어깨에 두르며 휙 몸을 돌리는 경훈의 눈가에 반짝 이슬이 맺힘을 혜옥은 애써 외면했다. 빗속에 멀어지는 경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혜옥의 눈에서도 후르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해 가을이 깊어갈 즈음 찬욱이 일산 장항리 한강변 자신의 집으로 희연을 초대했다. 그의 아버지 회갑연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마을 유지, 형제자매들의 지인, 친구들을 비롯하여 주로 일가 친지들을 초대했는데 학교 선생들 중에선 찬욱의 담임교사와 희연, 그리고 그와 가까운 몇몇 교사들이 초대되었다. 혜옥씨랑 함께 오셔요, 선생님. 목장 경영하는 노총각 우리 형 장가 좀 보내려는데 어쩜 혜옥씨랑 서로 필이 통할 수도 있잖아요. 찬욱은 희연에게 초대장을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마침 일요일이고 경훈과의 결별을 고한 혜옥이 정작 마음 한편으론 매우 울적한 심경임을 감지한 터라 희연은 기꺼이 혜옥과 함께 찬욱 부친의 회갑연에 참석하기로 맘을 먹었다.
찬욱의 집은 한강 하류 넓은 들녘을 보듬은 아늑한 마을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만고만한 농가 중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단연 눈에 띄는 집, 한눈에도 마을 유지이거나 부농의 위상이 그대로 전해오는 저택이었다. 넒은 집의 크고 작은 방마다 빼곡이 들어찬 하객들로 거의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잔치는 더없이 풍성하고 흥겨웠다. 찬욱이 반색을 하며 뛰어나와 희연을 비롯한 선생들을 안채로 안내했다. 찬욱의 부친이 직접 나와 환대와 함께 감사의 마음을 표했고 앞치마를 두른 찬욱의 동생, 하란이 연시처럼 빨갛게 물든 얼굴로 정성스레 상차림을 도와 분위기를 돋웠다. 더할 나위 없이 부요하고 화목한 가정임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정경이라 희연은 감탄했다. 혜옥도 적이 감동한 낯빛으로 찬욱의 가족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함이 역력히 전해왔다.
마당 한가운데 크고 둥근 멍석이 깔리고 흥겨운 풍악과 함께 찬욱의 부모님께 자손들과 친지들이 줄을 이어 헌수하는 모습도 흔연함을 자아냈다. 헌수에 이어 참석자 대표들의 축사와 함께 축가가 이어졌는데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세 아들과 맏며느리, 한 명의 고명딸인 하란 등 자손들이 모두 나와 노래 한 곡씩을 불러 하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특히 둘째 아들 찬욱의 노래 솜씨는 하객들의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약간의 비음이 섞인 매력적인 중저음의 바리톤. 그가 성악 전공이 아니기에 더욱 돋보이는 음색이라고 희연은 힘껏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이번엔 저희 학교의 국어 선생님이시며 문예반을 지도하시는 ‘교무실의 여학생’이라 불리우는 인기 짱 김희연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저희 아버님 위해 축사 한 말씀 부탁드리며 노래도 한 곡 해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찬욱이 자신의 노래를 끝내자 느닷없이 희연을 마이크 앞으로 이끌며 축가를 청했다. 당황한 희연은 얼결에 찬욱 부친의 환갑을 축하하는 인삿말을 한 후, 함께 참석한 시누이, 혜옥을 소개하며 자신을 대신하여 축가를 부르도록 유도했다. 혜옥의 노래 실력은 성악을 전공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뛰어남을 희연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혹감에 잠시 주저하던 혜옥이 마이크 앞으로 나아갔다. 윤기나는 검은 생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짧은 청치마에 검정 터틀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누가 봐도 가을 사과처럼 단단하고 상큼한 모습이었다.
내 통곡의 의미를 알면은
다시는 비가 안내려야지
빗줄기 타고서 이 가슴 때리는
내 젊음의 몸부림
통곡을 했었다 메아리도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가버린 내~젊은
내 젊은 야생마
비가 내리는 밤이면
비가 내리는 밤이면~~~
더없는 절창이었다. 야생마. 어쩜 혜옥의 이미지와 너무도 딱 맞아 떨어지는 곡명이라 희연은 전율했다. 맑고 힘있고 청아한 음색이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드는 마치 절규와도 같은 노래였다.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로 앙코르를 청해왔다. 희연도 힘껏 박수를 치며 공감의 눈빛을 나누려 찬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찬욱의 시선은 자신의 형 찬희를 향하고 있었다. 뭔가 그의 반응, 그의 느낌을 확인하고 공감을 얻어내려는 듯한 눈길. 희연 또한 찬희쪽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환한 얼굴로 박수 치는 찬희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적어도, 분명히 호감이 깃든 미소임이 틀림없었다. 활달하고 남성적인 찬욱에 비해 찬희는 보다 정적이며 차분한 분위기를 지닌 성품으로 전문대를 졸업한 후 간간히 시를 써 발표하며 목장을 경영하는 시인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찬욱이 굳이 문예반에 들어온 것도 알게모르게 형 찬희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희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찬욱과 찬희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임은 확실했다. 그의 부친이 한 풍류하며 시조 쪽으로 향촌에 이름이 난 예인이고 보면 가계 DNA의 내림임이 분명했다.
회갑연이 한창 무르익어 인근의 내노라 하는 명창들이 줄을 이어 노래하고 춤추는 가무의 순서가 이어지자, 찬욱이 슬몃 다가와 희연과 혜옥을 마당 한켠으로 이끌었다. 선생님, 우리 형 목장 구경이나 하실래요. 말은 몇 마리 안되지만 초원이 꽤 넓거든요. 형, 형이 안내 좀 해드려요. 자신은 회갑연의 진행을 도와야 한다며 짐짓 몸을 빼곤 형, 찬희를 앞세우는 그의 은근한 속내가 가늠되어 희연은 실소했다. 그러나 혜옥의 낯빛엔 왠지 한가닥 서늘한 기운이 스쳐갔다.
찬희의 안내를 따라 마을 어귀 나지막한 야산을 끼고 돌아가니 갈색으로 물든 확 트인 목초지가 펼쳐졌다. 하얀 목재 팬스가 쳐진 목장은 넓고 평화롭고 고요했다. 자신의 목장을 소개하며 말들에 관해 얘기하는 찬희의 눈에서 희연은 맑고 깊은 시인의 눈빛을 읽었다. 말들도 자신을 키우고 사랑하고 돌봐주는 사람의 말은 알아들어요. 예민하고 지능이 상당히 높은 동물이죠. 한 다섯 살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 할까요. 저는 말에게 저마다 다 이름을 지어주곤 그들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우리 형제들 이름를 따서 민, 욱, 란 그리고 영. 저희 형의 이름이 찬민, 동생이 찬욱, 그리고 여동생이 하란이니까요. 그가 포근한 미소로 설명했다. 근데 ‘영’은 누구죠. 희연이 슬쩍 물었다. 아, ‘영’은 제가 한 때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입니다. 멋쩍은 듯 머리털을 쓸며 고백하는 찬희의 말에 희연과 혜옥이 동시에 아하, 감탄사를 발했다.
참 신기하죠. ‘영~~’ 하고 부르면 넒은 초원을 가로질러 내게로 막 달려와요. 자길 부르는 소릴 알아듣는거죠. 시인의 눈빛에 반짝 물기가 어렸다간 사라졌다. 순간 혜옥의 얼굴에도 희미하고 슬픈 미소가 스침을 희연은 놓치지 않았다.
얘가 가장 최근에 들어 온 방목장의 막내예요. 제주에서 사온 야생마인데 아직 이름도 미처 지어주질 못했어요. 총 다섯 마리의 말들이 마방마다 칸칸이 들어 찬 마구간을 안내하다 가장 여위고 어린 말을 가리키며 찬희가 말했다. 어서 빨리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셔요. 희연의 말에 찬희가 불쑥 혜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번엔 ‘옥’ 으로 할까요. 찬희가 부신 눈빛으로 혜옥을 바라보며 말하자 혜옥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수줍게 웃음 지었고 희연이 환한 얼굴로 호응했다. 아, 좋네요. 그게 좋겠어요. 희연의 호응에 힘을 입은 듯 찬희가 짐짓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그럼 오늘부터 얘를 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자, 한번 불러 볼까요. 오오옥~~!!
그가 어린 말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리 높혀 이름을 불렀다. 순간 혜옥이 뜬금없이 정색을 하곤 찬희에게 물었다. 아, 근데 욱은 어딨나요. 어떤 말이 ‘욱’ 인지요. 아, 욱이요. 털이 유독 빛나는 바로 옆 마방의 쟤입니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갈기와 암갈색의 날렵한 몸매가 돋보이는 중마를 가리키며 찬희가 답했다. 혜옥이 살며시 욱에게로 다가가 그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우욱~! 헤옥의 부름에 순한 눈을 껌벅이며 욱이 혜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혜옥의 낯빛엔 형언키 어려운 착잡함, 슬픔이 피어올랐다.
찬희가 마방에서 욱을 끌고 나와 팬스의 출입문를 열고 방목장 안으로 데려갔다. 욱, 자아 달려라~~찬희가 말의 고삐를 풀어주며 힘껏 외치자 욱은 날쌘 자태로 목장 안을 빠르게 한바퀴 돌았다. 혜옥씨, 이제 크게 한번 쟬 불러보셔요. 헤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줄곧 팬스 밖에서 지켜보던 혜옥이 손나팔을 만들어 큰 목소리로 욱을 불렀다.
우우우욱~~~~!
방목장을 돌던 욱이 암갈색 갈기를 날리며 혜옥을 향해 힘차게 달려왔다.
우우우욱~~~~!
혜옥의 청아하고 애절한 음성이 부시도록 맑은 가을 하늘, 드넓은 초원의 하얀 팬스를 너머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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