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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책·크리틱/김정현/슬픔과 고통이란 중력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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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35회 작성일 19-07-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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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책·크리틱/김정현/슬픔과 고통이란 중력의 무게


슬픔과 고통이란 중력의 무게
-김중일, 『가슴에서 사슴까지』


김정현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에서


김중일 시인의 신작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창비, 2018)를 들여다보면 부재와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의 문장들이 전해주는 것을 감각적 차원에서 말해보자면, 그것은 진득한 죽음의 냄새로 귀결된다. 즉 김중일이란 시인은 죽은 자들과 항상 함께 있는 자이며, 동시에 그들의 말을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 새겨두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늘 실패하는 일, 웃음을 잘 기르기”(「웃음기르기」)어렵고 늘 실패하며, 또한 무감각하며 건조한 시야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마치 뜨거운 불을 씨앗처럼 품고 있는 얼음처럼 운다. 바르트의 말처럼 그는 ‘애도’하는 자이며, 시스템 외부에 존재할 유령들과 ‘같은’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슬픔의 밀도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이 시집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고통으로 가득해서 아무런 다른 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이다. 그의 문장들은 오직 우울한 우주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마치 ‘검은 태양’의 주변을 맴도는 “지구”(「최선을 다해 하루 한번 율동공원 돌기」)처럼. (크리스테바가 『검은 태양』에서 지적했던 바처럼 ‘애도하는 우울증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문장을 섬세하게 받아들어야 한다. 그의 우울은 어떠한 점에서 윤리가 가능한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늘 사과하는 자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의 말은 이렇다. “날 한번도 만난 적 없이 떠나간 사람에게/미안합니다 잘해주지 못해서.” 즉 “단 한 번도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오늘도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오늘도 사과」) 혹은 이런 문장은 또 어떨까. “너는 내가 아직 한번도 말 건네지 못한 사람/그러나 지금까지의 네 이야기는 곧 모두 내이야기/우리는 만난 적 없지만 만날 사람/만날 사람이므로 이미 만난 사람”(「흐르는 빈자리」) 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문장들은 시스템 외부의 유령들, 말없는 자들, 혹은 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모든 죽은 이들의 ‘육체’이자 ‘입’이며, 동시에 ‘귀’이다.
  
미안해,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사과합니다.
아이가 온 먼 공동체의 일들이 잊히지 전에 물어보려 합니다.
밤새 우는 아이여, 만나자 마자 목 놓아 우는 이유가 이제부터 차차 다가올 참혹을 이미 다 알기 때문이지, 하필 지금 우리의 시간으로 오게 된 당혹 때문인지.
(…)
새가 다만 새를 찾아 떠나고 마중 왔던 아이들은 다만 마중 올 아이들을 만나서 서둘러 떠난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래 있던 아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중 왔던 아이들」 부분

이 시집의 죽음들 중에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매일 무너지려는 세상」처럼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시편들일 것이다. (물론 그가 개인적으로 체험했던 죽음 역시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일상과 현실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해와 달을 안 놓치려 수없이 떨어뜨린 아이들의 목숨”(「우리 산 들 바다 하늘 사이」)값을 우리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그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인식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애도 이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 끝나지 않는 슬픔과 고통이란 중력의 무게를 항시 견뎌내는 행위에 속해 있기에.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자 동시에 “이/제부터 차차 다가올 참혹”같은 죽은 자들의 고통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명료하게 자각한다. 그러한 시인의 냉철한 눈에는 일상과 세계의 모든 것은 이미 정지되어 있고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저 과거와 미래에 공존하는 아이들이 결코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러한 사유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즉, 우리의 세계는, 말하자면 그 어떤 죽음도 슬퍼하지 않는 지옥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
 
시간의 시작 이후 매 순간과 순간을 이어온 무수한 문장들 중에
소멸을 앞둔 마지막 순간의 문장만을 우리는 읽고 있다.
시간여행을 마친 우주선처럼 잔뜩 녹이 슨 문장.
획 위에 까맣게 시간의 먼지가 쌓인 문장, 그래서 눈에 식별되는 문장


시인은 가장 마지막 문장만으로 시를 쓸 수 있다.
몇겁을 이어온 문장들의 가장 마지막 구두점인 지구와 함께,
소멸을 코앞에 둔 문장 끝의 밤.
투명한 문장들의 세계 맨 끝에 시라는 문장은
사람들의 막다른 잡념 속으로 이탈해
전복된 열차처럼 녹슬어 소멸해 간다.


그리고 죽은 시인은
마치 상처투성이 유일한 생존자처럼
반파된 책상에 비틀대며 투명한 몸을 일으킨다.
                                 ―「투명한 문장」 부분
 
그가 바라보는 (혹은 원하는) 세계란 그저 단순하지 않다. 마치 죽은 자에게 물려받은 “그 상속을 거절할 권리가 없”(「둥근 노래만이 입술을 들어올리네」)는 자에게만 들릴 수 있는, “세상은, 어느 곳에든, 언제 거기에 서 있든/그곳은, 그 순간부터 가장자리라는 걸 보여준 사람”(「자는 사람 작은 사람 뛰는 사람-하청 근로자」)의 유령들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창문”(「창문에서 죽다」)처럼 세계의 모든 것이 견고하게 반복될 때, 시인은 세계 그 자체를 거부하고, 오직 소멸만을 ‘꿈꾼다’. 그러니 소멸은 죽은 자들의 말을 육체에 세기며, 존재하지 않겠지만 존재해야만 하는 무엇을 현전케 할 가능성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즉 ‘투명하게 많은 무수한 문장’들 중에 존재해야만 할 ‘낡고 먼지낀 마지막 문장’같은, “유일한 생존자”인 꿈의 영역을 욕망하는 “죽은 시인”처럼 말이다.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무를 놓칠까봐 꼭 붙잡으려, 바람은 일년 내내 온 힘
을 짜내 나뭇잎들을 구부려 왔다.
결국엔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지 않기로 한다.
서로를 꿈꿨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으려, 나뭇잎을 밑
창에 붙이고는
나는 죽은 사람 산사람 다 같이 살아가는 이 시집 속을
한걸음도 나가지 않기로 한다.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는 네가 꾸는 꿈」 부분


스스로를 ‘죽은 자’로서 인식하며 찾으려 하는 ‘마지막 불타는 페이지’(「옛날에는 시라는 것이」)가 존재하게 될지 아닐지는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아마도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저 오직 그것이 현전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그를 지속시킬 수 있다. 마치 바디우가 ‘진리란 유예되어 있으며 단지 그것을 선취하며 촉성할 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즉 이 도저한 죽음의 무게와 싸우려는 자에게 주어질 가능성, 혹은 그 잔재와도 같은 문장의 정체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희미하게 존재해야만 할 꿈인 셈이다.


시인의 꿈, 그것은 “한밤에 북극여우와 사막여우가 만나 한날한시 갑판 밑에서 숨어들어 우주로 밀항하며 꾸는 꿈”(「끝내 버려진 지구에 나 혼자 누운 꿈」)과 같이 듣는 것과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이는 “예상치 못한 계절이 정말 오고 있”(「어깨에서 봄까지」)는 것처럼 알지 못한 채 들려올 수 있는 것이기에. 단 그것은 ‘불타올라 하얀 재가 된 사슴’(「가슴에서 사슴까지」)이 기다리는 ‘꿈’과 같은,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할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될 ‘무엇’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한 존재란 그저 믿음으로서만, 유령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 새길 줄 아는 자이며,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에 깊게 침윤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긍정하려는 자이다. 그렇기에 “죽은 시인”의 이름을 감당해 낼, ‘그’이자 ‘너’가 꿈꾸는 “소멸을 앞둔 마지막 순간의 문장”(「투명한 문장」)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란 다음과 같다. “나의 귀를 잘라 술잔으로 쓴다. 네가 내 귀에 쏟은 울음소리를 나 대신 다 마신다.”(「지평선」)





*김정현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 광운대학교 국문과 및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박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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