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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고전읽기/권순긍/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여성’의 힘, 『박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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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83회 작성일 19-07-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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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고전읽기/권순긍/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여성’의 힘, 『박씨전』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여성’의 힘, 『박씨전』


권순긍



‘미투Me Too 운동’에서 ‘남성혐오’까지


요즈음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고발하는 이른바 ‘미투Me Too운동’이 광야를 사르는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대통령 경선까지 갔던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 시인, 유명 연극인, 대학 교수 할 것 없이 정말 ‘추풍낙엽’처럼 지도적 지위에서 물러나고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동안의 ‘남성지배’ 사회를 유지해 왔던 공고한 룰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실상 그렇다. 어느 사회이건 남녀가 동등한 인격체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성들만 피해를 당하고도 사회에서 묵인되었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 불만이 이제 ‘미투운동’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정절貞節’에 관한 문제를 보더라도 그렇다. 남성들은 자손을 많이 두어야 된다는 미명아래 기생이나 첩妾들을 두어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져도 무방하고, 여성은 오직 한 명의 남성하고만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설사 남편이 죽더라도 그 관계는 지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과부를 일러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란 의미의 ‘미망인未亡人’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이렇게 우리 사회는 여성들에게 폭력적이었다. 객관적인 지표인 ‘성평등지수’를 보면 2017년 0.651로 세계 144개국 중에서 바닥권인 중동, 아프리카와 비슷한 144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객관적 수치가 증거 하듯이 한국의 성평등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보니, ‘미투운동’이 진정한 ‘성평등운동’으로 나가지 않고 ‘남성혐오’로까지 나아가 우려를 낳고 있는 형편이다.


여권이 신장됐다는 지금도 성평등지수가 이렇게 초라한데 완전히 남성위주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오죽 했겠는가? 그야말로 요즘 말로 ‘헬조선Hell Cho-Seon’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런 남성지배 사회에서도 규방에 갇힌 여성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허구적 인물이긴 하지만 바로 『박씨전』의 주인공 박씨 부인이 그렇다.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지만 『박씨전』으로 들어가 그 당찬 여성을 만나보자.


병자호란의 치욕, 그 과정과 결과
1936년(인조14)에 일어났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은 『박씨전』과 『임경업전』이 있다. 이 두 작품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로 다루고 있어 ‘역사소설’이라 부를 수 있다. 전쟁은 기존의 모든 가치 기준을 무너뜨리기에 이런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통해 거기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박씨전』은 허구적 인물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놓았으며, 『임경업전』은 실존인물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비교적 역사 사실에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왜 병자호란을 문제로 삼았을까?


잘 알다시피 병자호란은 후금後金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의 예’를 강요하며, 막대한 예물을 요구하자 인조가 이를 거부함으로 시작됐다. 청 태종은 1636년 1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12월 2일 선양瀋陽을 출발하여 의주의 임경업이 이끄는 백마산성 수비군과의 결전을 피하고 한성으로 직행했다. 청나라 군사들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急報를 듣고, 종묘의 위패와 왕자, 비빈들을 강화도로 보낸 뒤 14일 오후 인조도 뒤따라가려 했으나 이미 청군이 양화진 일대에 진출해서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남한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인조와 조선군은 1월 30일까지 45일간 항전했으나 식량난과 식수난이 심각한데다 청군의 대공세에 밀려 척화파斥和派들의 강력한 수성의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출성항복이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수락하기에 이른다. 1월 30일 인조는 마부대馬夫大와 용골대龍骨大가 전달한 청태종 국서의 열 가지가 넘는 조항을 수락하고 삼전도(三田度; 현재 잠실 석촌호수 부근)에 나아가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른다.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이를 갈며 분개해했던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다. 항복의 조항은 청나라에 대해 군신의 예를 지킨다는 것과 세자, 왕자 및 대신 자제를 청에 인질로 보낸다는 것, 청의 요청에 따라 필요시에 병력과 군량을 원조한다는 것 등이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김상헌 등의 척화파 주모자들이 끌려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나 이를 영화화 한 <남한산성>이 그 처참한 실상을 잘 보여준다.


참으로 처참한 패배고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병자호란은 7년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과는 달리 불과 2개월 사이에 끝이 나 조선으로서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그야말로 순식간에 마무리 된 전쟁이었다. 더욱이 평소 오랑캐라 업신여기던 만주족에게 당한 패배이니 그 치욕은 한층 더 했다. 서인西人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임진왜란 때에 우리를 도와준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존명배청(尊明排淸;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배척)’을 확고한 정치노선으로 삼고 있었으니,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만주족 오랑캐와는 결코 교류하지 않겠다는 유교적 대의명분에 입각한 자존심도 한 몫을 했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의 패배는 더 치욕적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오죽했으면 호두를 오랑캐의 머리라는 뜻의 ‘호두胡頭’라 불러 이를 깨트렸겠는가.


“낭군 같은 남자들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박씨전』이다. 현실에서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허구를 통해서라도 이를 설욕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 역사적 사실에 저촉되는 실재 인물이 아닌 허구적 인물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 속을 누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여주인공 ‘박씨’를 내세워 그 역할을 맡겼다.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지는데, 전반부에서 박씨는 역사와 조우하지 않고 설화 속 인물로 하늘의 액厄을 당한 형편없는 추녀醜女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아버지인 박처사의 신통력을 알아본 시아버지 이득춘이 아들과의 혼사를 일방적으로(!) 정했기에 박씨가 이시백과 혼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추하기 짝이 없어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도저히 어려울 지경이었다. 작품에서는 박씨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붉은 얼굴은 비바람에 오래 시달린 돌처럼 얽었고, 얽은 구멍에는 더러운 때가 가득차 있었다. 입과 코는 한데 닿아 있는데, 입은 두 주먹을 넣어도 남을 만큼 크고, 코는 깊은 산 속의 험한 바위 같았다. 눈은 달팽이 눈같이 툭 불거져 이마는 메뚜기 이마 같았으며, 짧은 머리털은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게다가 키는 팔 척 장신인데 한 팔은 뒤틀리고 한 다리는 저는 듯하니, 이런 인물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이 이러하니 시아버지와 남편도 “한 번 보고나서는 다시 볼 마음이 없어져 정신이 아찔해지며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한다. 이로 본다면 여성을 대하는 기준이 ‘아름다움’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원칙인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박씨전』에서는 왜 박씨를 과도하게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 버렸을까? 거가에는 분명 어떤 의도가 내재해 있을 것이다. 시아버지가 겨우 정신을 차려 이렇게 추한데도 구태여 나에게 출가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분명 집안에 복이 될 거라고 믿는다. 박씨는 하늘의 액을 당해 허물을 쓰고 있어 겉은 흉측하지만 그 속은 진실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시아버지는 미루어 짐작하지만 남편인 이시백은 눈앞에 있는 것만을 보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976~77년 TBC에서 방영된 <별당아씨>라는 드라마에서 박씨 부인이 허물을 벗는 장면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유명배우 홍세미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얼굴을 검은 보자기를 써서 가리고 있던 박씨가 돌연 미녀로 거듭나는 장면은 당시 시청자들의 시선을 온통 TV 앞으로 모이게 했다. 결과는 뻔한 데 사람들은 추녀가 미녀로 변하는 그 반전의 묘미를 보고 싶은 거였다.


후반부로 오면서 추녀인 박씨가 드디어 허물을 벗고 절세미녀로 거듭난다. “계화가 보니 추하고 더러운 아씨가 허물을 벗고 옥 같은 얼굴이며 달 같은 태도로 사람을 놀래며 향기가 방안에 가득한지라. 도리어 정신을 진정하여 보고 또 다시 보니 그 아름답고 고운 태도는 옛날 서시西施와 양귀비楊貴妃라도 미치지 못하겠더라.”고 작품은 전한다. 그러자 박대하던 시어머니와 추하다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남편은 물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박씨를 따른다.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됨으로써 많은 능력을 얻은 셈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미녀로 변한 여주인공에게 모두가 굴복하는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단지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것이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가 보다.


하지만 『박씨전』에서는 외모가 아닌 본질을 보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추녀인 박씨의 신통력을 통해서 이미 드러낸 바 있다. 하루 밤 만에 시아버지의 조복朝服을 만든다거나, 명마名馬를 알아보고 3백 냥에 사서 이를 키워 3만 냥의 재물을 얻는다거나, 꿈에 본 백옥연적으로 남편 이시백을 과거에 장원급제하게 한다거나, 피화당避禍堂을 짓고 나무를 심어 앞날의 변란을 대비하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이런 일들을 수행했는데도 “여자로 태어난 것이 참으로 아깝”다고 하는 시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박씨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했다. 남편인 이시백도 부친의 명으로 할 수 없이 방에는 들어갔지만 박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절로 눈이 감겨 밤을 새우고 그대로 나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결국 박씨가 거처하는 방 근처에도 가기 싫은 마음이 깊어졌다.


그런데 이런 박씨가 미녀로 바뀌자 가장 난처해진 것이 남편 이시백이었다. 평소 얼굴이 못나 가까이 하지 않다가 이제 미녀가 되니 마음은 동하지만 전날 자신이 했던 행동도 있고 해서 아주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겨우 박씨의 방에 들어갔지만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남편에게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 했는데 사람이 오륜을 모르면서 어찌 예의를 알겠습니까? 당신은 아내의 얼굴이 못났다 하여 삼사 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감히 ‘부부유별夫婦有別’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조강지처는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라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고서 어찌 덕이 있다 하겠으며, 아내의 심정을 모르고서 어찌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도리어 부질없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저러한데 어찌 효와 충을 알 것이며,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알겠습니까? 앞으로 효도와 충성을 다하지 못할 듯하니, 저 같은 아녀자의 마음으로 낭군 같은 남자들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인륜과 도덕을 중시하면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모만 따지는 남성들의 속 좁은 태도와 아내에게 배려가 전혀 없는 남성 위주의 조선 사회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해대고 심지어는 “낭군 같은 남자들은 조금도 부럽지 않”다고 일침을 가한다. 『박씨전』에서 추녀 박씨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박씨가 질책한 남편이 소설 속에서 바로 병조판서로 등장하니 그 비판이야말로 조선 사대부 남성을 향한 것이다.


미녀로 변신한 박씨의 첫 번째 활약은 청나라 자객 기홍대(혹은 기룡대)를 처치하는 일이다. 청나라에서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신인神人의 존재를 일찍부터 주목하고 이를 제거할 자객을 보낸 것이다. “요사이 천기天機를 보니, 조선 장안에 신인이 있어 비쳤으니, 임경업이 없더라도 도모키 어려운지라. 청컨대 이 신인을 없애면 경업은 두렵지 아니하여” 없애고자 했다. 하지만 박씨는 청나라 자객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여 기홍대를 제압한다. 역사의 전면에 부각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활약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러니 청나라에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런 박씨의 능력으로 병자호란을 막지 못했을까? 하나는 청나라의 우회공격이다. 역사적 사실로도 청나라 군대는 백마산성에 주둔한 임경업군과의 대결을 피해 바로 한양으로 진격했다. 작품에서도 황해를 건너 바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그렸다.


또 다른 하나는 간신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등장이다. 박씨가 병조판서인 남편 이시사백을 통해 병자호란을 막을 방도를 일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나서서 “지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데, 이런 태평성대에 무슨 병란이 있으리까? 박씨는 요망한 계집이어늘 임금께서 어찌 요망한 말에 혹하여 국가대사를 아이들 장난같이 하십니까?”하여 임경업을 불러 청나라를 막아야 된다는 박씨의 의견을 묵살한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였기에 그런 주장을 할 위치에 있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역사적 사실로는 당시 의주부윤이던 임경업이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로 탄핵을 받자, 김자점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임경업을 두둔, 용서하여 도로 임소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기를 청하여 왕이 들어주었다 한다. 하지만 1646년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임경업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자, 청나라 관리를 시켜 고문으로 죽게 했다. 이는 김자점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는데,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임경업을 죽게 한 것이다.


김자점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어 조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1651년(효종 2년) 아들 익을 통해 역모를 꾀한 죄로 처형되기에 이른다. 박씨가 신통한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간신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 간신으로 임경업을 죽게 했고 역모를 꾀한 김자점이 선택된 것이다.


소설 속의 허구를 통한 설욕
이렇게 해서 병자호란은 일어났다. 병자호란의 경과를 보면 현실적으로 중과부족이어서 청나라의 기세를 당하지 못하고 항복하기에 이른 것인데 『박씨전』에서는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국운이 불행하여 호적이 강성하여 왕대비와 세자대군을 사로잡고 국가 위태함이 다 김자점이 도적을 인도함이니 어찌 절통치 아니하리요. 슬프다. 여러 날 도적에게 포위된 바 되어 세가 다하고 힘이 다 되어勢窮力盡 도적에게 강화講和하니라.


분명한 건 우리가 청나라에게 패했다는 사실이다. 작품에서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뒤집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다른 방식으로 설욕을 한다. 그것은 소설 속의 허구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강화의 주도적 인물인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동생 용율대(혹은 용휼대)를 등장시켜 피화당을 침범하다 죽게 하는 것이다. 용골대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어서 죽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허구적 인물로 동생을 등장시켜 패배하게 만든 것이다. 그 장면을 보자.


율대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칼을 들고 계화를 치려하되, 순식간에 칼 든 팔이 힘이 없어 놀릴 길이 없는 지라. 하는 수 없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만리타국에 큰 공을 바라고 왔다가, 오늘 조그마한 계집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계화가 웃으며,


“불쌍코 가련하다. 세상에 장부라 이름하고 나 같은 여자를 당치 못하느냐. 네 왕놈이 하늘의 뜻을 모르고 예의지국을 침범코자하여 너 같은 어린애를 보냈거니와, 오늘은 네 목숨이 내손에 달렸으니, 바삐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으라.”


하니 율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자결하더라. 계화가 율대의 머리를 베어 문밖에 다니, 이윽고 풍운이 그치며 천지가 맑아지더라.


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의 대공세에 밀려 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했지만 여기 피화당에서는 박씨의 시녀인 계화가 청나라 장수를 꼼짝 못하게 하여 죽게 만들고 그 목을 베어 문 밖에 걸어둔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의 장면이다. 물론 허구의 공간이니까 가능했다.


다음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의 장수 용골대가 등장한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수차례 피화당을 공격하지만 피해만 입고 물러난다. 결국에는 피화당 앞에 꿇어 앉아 동생의 머리를 돌려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박씨는 이마저도 매몰차게 거절한다.


박씨가 웃으며 일변 꾸짖기를,
“그리는 못하리로다. 옛날 조양자趙襄子는 지백知伯의 머리를 칠하여 술잔을 만들어 진양성晋陽城의 분함을 씻어 천추만세에 유전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너의 아우 머리를 칠하여 남한산성에 패한 분을 씻으리라.


이 장면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의 역전된 모습이어서 참으로 흥미롭다. 허구의 공간을 확장시켜 이런 방식으로 설욕한 것이다.
게다가 소현세자, 봉림대군, 조정 중신을 끌고가는 역사적 사실에 왕비를 추가하여 이를 저지하는 것으로 허구를 만들어 박씨의 신통력을 보이기도 했다. 청나라 장수들이 “이미 화친을 받았으나, 왕비는 아니 모셔갈 것이니, 박부인 덕택에 살려주옵소서.”라고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청나라 대군을 꼼짝 못하게 한 박씨가 왜 병자호란의 정세를 우리가 승리하도록 바꾸지 못했을까? 작품을 보면 충분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뜻[天意]’ 혹은 ‘하늘의 이치[天時]’를 생각하여 그러지 못했다 한다. “너희 등을 씨 없이 죽일 것이로되, 천시天時를 생각하고 십분 용서하거니와”나 “너희 등을 씨 없이 함몰하자 하였더니, 내 인명을 살해함을 좋아 아니하기로 십분 용서하나니, 그도 또한 천의天意를 좇아 거역치 못한” 다고 한다. 문학적 허구의 한계인 셈이다. 즉 이야기 속에서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바꾸지는 못하기에 병자호란의 패배를 하늘의 뜻이나 이치로 설명한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 영화에서도 어떤 사건에도 개입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을 본다. 사소한 것을 하나 움직여도 현재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를 ‘하늘의 이치’로 설명했다. 반면 임진왜란을 다룬 <임진록壬辰錄>에서는 왜왕의 항복을 받는 등 역사와 다른 일이 일어나는데 여기서는 그러지 않다.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의 흐름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된다. 『박씨전』은 역사적 사실의 큰 줄기 속에 허구적 인물, 허구적 공간을 설정하여 치욕을 설욕했던 것이다.


눈물과 분노로 기록된 ‘주홍글씨’, 환향녀還鄕女
그런데 그 치욕을 설욕하는 영웅이 여성인 점이 흥미롭다. 왜 하필 규방에 갇혀 무시당하던 여성이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원망이 깔려 있다. 전쟁에 패한 후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가 노예로 팔리게 됐는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60만 명 정도가 청나라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3~40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서울의 인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간 셈이다. 이들 중에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박씨전』에서도 “오랑캐 장수들이 장안의 재물과 부인들을 잡아갈 새, 잡혀가는 부인네들이 박씨를 향하여 울며, ‘슬프다. 우리는 이제 가면 생사를 모를지라. 언제 고국산천을 다시 볼까?’하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들 조선의 여성들은 노예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목숨을 보존해 살아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왔는데 환영은 못해줄 망정 몸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질타를 받아야 했다. 이들이 바로 ‘환향녀還鄕女’ 곧 ‘고향에 돌아온 여자’인 것인데, 오늘날 행실이 나쁜 여자를 비속하게 부르는 ‘화냥년’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니, 당시 그들이 당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환향녀’는 곧 조선판 ‘주홍글씨’인 셈이다.


특히 정절을 목숨보다 중요시 했던 양반 집안에서는 이들을 식구로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고 내치기 위해 국가에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왕인 인조는 국가가 무능했던 탓이 있기에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대신 첩을 얻도록 하는 절충안을 제시해 양반들이 다투어 첩을 얻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여 실리외교 노선을 취한 최명길(崔鳴吉, 1587~1647)의 상소를 받아들여 대동강, 낙동강, 영상강 등을 절개를 회복하는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아 환향녀들이 절개를 다시 갖추도록 몸을 씻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거의 코미디 수준의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남성들의 무능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여성들이 절개를 더럽힌 것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힘이 없어 여자들이 잡혀가 온갖 고통을 당했는데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오니 오히려 이들이 정절을 더렵혔다고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무능함을 덮으려 했다. 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병자호란 후 여성들의 원망과 분노가 『박씨전』에는 녹아 있다. 주인공인 박씨가 여성 영웅인 점은 물론 피화당에서 화를 피하고 청나라와 대적했던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박씨 부인과 그의 시비인 계화를 비롯하여 일가친척 부인들이 모두 피화당에 모여 청나라와 싸워 임금이 항복했던 청나라 대군을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씨전』은 조선의 여성들과 청나라와의 전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활약하는 남성은 임경업 밖에 없을 정도다. 그래서 박씨도 당시 병조판서이던 남편 이시백에게 “낭군 같은 남자들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다.


결국 임금조차도 박씨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충렬부인에서 ‘절개와 지조를 지켰다’고 내리는 정렬부인으로 품계를 높이고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밝지 못하여 충렬忠烈의 선견지명과 나라를 위한 충언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국가가 망극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정렬貞烈에게 조서함이 오히려 무료하도다.
정렬의 덕행충효는 이미 아는 바이라. 규중에 있어 나라의 위엄을 빛내고 왕비의 위태함을 구하였으니 다시 정렬의 충성을 일컫는 바가 없거니와 오직 나라도 더불어 영화고락을 같이 함을 그윽히 바라노라.


이 조서는 왕으로서는 “내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가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을 수치스럽지만 인정한 것이다. 그만큼 여성인 박씨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이로 본다면 당시 조선시대에 박씨는 한편으로는 청나라 대군과 싸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의 권위와도 싸운 셈이 된다. 그래서인지 『박씨전』은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양반 집안에서는 ‘금서’로 취급되어 읽지 못하게 했다. 양반 남성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씨전』은 일종의 판타지다. 그 판타지는 단순한 비현실적 요소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허구적 요소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기에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전복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박씨전』은 이 판타지를 통해 한 축으로는 병자호란의 패배를 설욕해 민족정기를 세우고, 다른 한 축으로는 규방에 갇혀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여성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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