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하상만/잠언의 숲 외 4편
페이지 정보

본문
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하상만/잠언의 숲 외 4편
잠언의 숲 외 4편
하상만
왓 프라싱에는 잠언의 숲이 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
이 잠언이 나를 울린다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가족끼리 모여 잡담을 하는 사람과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사람과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무마다 적힌 잠언을 수첩에 옮기며 되뇐다
다섯 시가 되자 승려가 나와서 종을 쳤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자 아래에서 반쯤 눈을 뜬 채 개가 졸고 있었다 개같이 생겼다고 하면 귀엽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서양 사람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 뿌려 놓은 밥을 작은 새가 날아와 쪼았다 그리고 조금 더 큰 새가 땅에서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글을 쓰다가 볼펜이 다 되었다 어떤 벌레가 다리에 난 상처에 앉아 살에서 나오는 물을 빨려고 했다 쫓아도 다시 날아와 앉았다 내 속이 맛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은 맨발로 잘 걸어 다닌다 사원에서도 집에서도 맨발이다 수첩 속은 검은 글씨에서 파란 글씨로 바뀐다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남자가 탑을 돈다 언제나 그렇지만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심심해진다 수첩에 적어가던 잠언 하나를 왼다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빈센트
오늘 밤도 걷습니다
제 나이를 걸어갔던 당신을 떠올리며
당신처럼 이가 빠지거나
붓을 들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갈 차비도 두둑합니다
사람들은
살아서의 당신보다
죽어서의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저들이 당신 그림을 흉내 내는 것을 보니
저의 고민 또한
누군가 이미 해버린 고민입니다
사물들이 가진 쓸쓸함이
제 속에서 오는 것인지
그들 속에 있던 것인지
그런 것이 궁금합니다
이 도시의 전쟁을 담은 그림 한 장
눈에 붕대를 감고 죽은 친구 옆에서
작은 스푼으로 음식을 떠먹는 소년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워 해도 되나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진지한 저의 감정이
가짜가 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사춘기에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당신의 그림 속 별들처럼 소용돌이치는 밤
당신이 걸어보지 못한
지도 위의 점들을 걷습니다
내부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초저녁부터
이 거리의 창들은 태어났고
어둠이 가진 빛을 보여주기 위해
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빛을 향해 당신은 걸어갔고
저는 지금 당신의 무덤을 향해
걷고 있는 중입니다
새
오래된 사원에서 새를 팔고 있었다
그곳 장사꾼은 새를 풀어주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선전했다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조롱을 사서 새를 풀어주었다
어떤 날에는 새가 날아가지 않아서 여행자가 따지고 있었다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냐고
그는 절망에 빠져 울고 있었다
장사꾼이 조롱 속의 새를 굶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굶주린 새일수록 더 슬프게 노래한다고 믿었다
그 슬픔이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나도 조롱을 사서 사원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내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은
노인이 내 꿈을 가두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나의 기도는 모두 그분을 향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허락도 없이 내 것을 가둔 노인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꿈이 거기 갇혀 있는지도 몰랐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새를 풀어 줄 수 없으니
새는 날아갔다 굶주림과 놀람에 잠시 쓰러져 있다가
마침내 날개를 저었다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
그때 내 바람은
그 새가 굶어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살처분
수의사가 마취제를 놓으면
소가 쓰러졌다
우리는 낫을 들고 있었다
위에 구멍을 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소는 위가 네 개나 있었다
그냥 묻으면 땅속에서 빵빵 터졌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우리 손은 무자비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나는 소들이 있었다
수의사는 블로건을 불었다
여러 대의 마취제가 몸을 찔렀지만
쉽게 쓰러지지 않는 소가 있었다
더 이상 달아나지는 못했다
옆구리 대신 발아래
못이 박힌 것 같았다
새끼를 밴 소였다
수의사는 쓰러뜨리려고
마취제를 아끼지 않았다
잠이 찾아올수록
다리엔 더 힘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깜박이는 순간 쓰러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소는
눈물을 자르지 않았다
그런 소는 모두 그런 소였다
상추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밑을 따주면 더 잘 자란다기에 그렇게 했다.
상추가 잘 자라면 결국 내가 먹는다.
상추는 무엇을 위해서 자라는 걸까?
열심히 자랄수록 열심히 내가 딴다.
상추들도 이런 대화를 나눌까?
열심히 살아야 해.
부지런한 게 좋아.
서로를 비교할까?
쟤 잎사귀가 더 크구나.
그렇게 비교할수록
결국엔 내가 좋겠지?
상추의 입장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입장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칭찬 받는 게 좋아서
나는 참 열심히 일했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온 시집은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였다. 나는 이들 시집을 읽으며 매번 하는 습관 같은 일이지만 시집 속에 깃든 수많은 언어의 의미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어떡하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들 시집 속에 깃든 의미 내용을 다 이해하기란 어렵다. 나로서는 중과부적이다. 매번 읽어도 감당할 수 없는 시집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왜 또 손에 잡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은 나에게 시를 가르쳐준 스승 김구용 선생의 난해한 수사 같은 시다. 애초부터 실패하기로 작정하고 쓴 한 줄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다였다. 시인은 수다쟁이인가. 하나같이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수다쟁이다. 아무도 침묵하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시끄럽다고 좀 조용해 달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안한다. 계속 말이 되던 안 되든 무엇인가를 떠든다. 그 수다의 연속성에는 공백이나 압축이 없다. 특히 근래에 젊은 시인들의 그 수다스런 시집을 읽다보면 수다를 뒷받침하는 것은 사물이나 행위 묘사의 세밀성이 눈에 띤다. 소설처럼 너무 자세하게 그려진 묘사성에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아 열심히 따라가다 정신을 차리고 끝에 가서 이게 뭐지 샬펴 보면 거짓말처럼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이상의 시를 보며 느끼는 장난스런 놀이 같다. 시나 소설을 읽는 즐거움으로서의 문학 당의정설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문학에는 우리들 삶에 도움이 될만 한 것이 깃들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문학이 비록 세상을 바꿀 무기나 혁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따뜻한 위안이고 눈물이었으면 한다. 나는 작품에 무언가는 소재가 소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그 중심축은 있어야 된다고 믿는 사람의 하나다.
하상만의 시집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를 금년도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하상만 시의 시적 아우라의 주축을 이르는 것은 ‘별’과 ‘외로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문청시절 즐겨 읊조렸던 낡은 서정의 바탕이라는 것은 그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낡은 것을 한시대적 산물이라고 버리는 행위와 낡은 것도 새것처럼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가령 그가 「마음」이라는 작품에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를 화두로 삼았을 때 화자들이 제 각각이었던 것처럼 일체유심조다. 나는 하상만 시인이 인식하는 별이 “어둠이 가진 빛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났다”는 단순함과 “사물들이 가진 쓸쓸함이/제 속에서 오는 것인지/그들 속에 있던 것인지/그런 것이 궁금”하다는 궁금증이 별의 본질을 보려는 자세요 시적확장으로 본다. 가령 이 시인의 외로움이라는 것도 할머니로부터 아버지까지 이어지고 마침내는 “외롭다는 말은 내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라는 자기귀환이 끝내는 “나의 외로움과 슬픔에도 무게가 없다”는 결론에 굴복한다. 외로움의 소외를 훨씬 넘어선 곳에 “외로움 하나를 덜어주고 나오는” 따듯한 불이 있기 때문이다. 하상만 시집은 “한 소년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는 그의 표현대로 어깨에 기대고 싶은 따뜻함과 “아기의 주먹” 같은 무구한 힘이 있다. 나는 이런 그의 시편들을 사랑한다./강우식(글), 허형만, 장종권
<수상소감>
카페를 자주 간다.
책을 읽고 낙서를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빌 브라이슨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아버지의 산책을 몰래 뒤따라갔다.
아버지는 매일 작은 식당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그런 수첩을 수십 권 가지고 있었다. 돌아가시고 나중에 그 수첩을 펼쳐보니 그날 먹은 것들로만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별일이 생기지 않는 게 인생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면 호들갑스러운 거고.
지루하고 심심했는데 필연으로 받아들이니 버틸 만했다.
나는 천천히 시를 적어 왔다. 내 시 중에 내가 좋아하는 시는 「해변」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아직 쓰지 못했다. 그러나 난 그걸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내가 스스로에게서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가 흥미롭다.
사람들은 내게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돈 벌어라 등의 말로 참견과 걱정을 해주었지만 시를 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시를 썼고 스스로 이룬 성과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니 잠시 뭉클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가 생일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돌아오기 때문이다. 시간을 둥글게 만든 누군가가 원망스럽다. 생일 축하해 라는 나의 말은 진심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나의 생일보다 아름다운 날이다.
대부분의 시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다른 모든 시인과 별다른 게 없다. 그들처럼 외롭게 시를 쓰고 있다. 수상 전화를 받았을 때도 외로웠습니다, 하고 말했다. 시인이라면 그 말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그 외로움 때문에 아무 것도 그리워 할 수가 없다고 적은 적이 있다.
앞으로도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겠다.
*하상만 200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간장』(실천문학),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시인동네)가 있다. 제9회 김장생 문학상 대상 수상.
- 이전글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엄경희/미결정 상태로 남은 난제들-하상만의 시세계 19.07.01
- 다음글73호/권두칼럼/장종권/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흔들린다 19.07.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