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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엄경희/미결정 상태로 남은 난제들-하상만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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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엄경희/미결정 상태로 남은 난제들-하상만의 시세계
미결정 상태로 남은 난제들
―하상만의 시세계
엄경희
1. 잠언箴言의 가시에 찔리다
우리가 잠언에 매혹되는 것은 그 짧은 한두 마디의 언어가 담고 있는 진리 혹은 진실의 깊이 때문이다. 잠언은 그것과 마주 선 자의 함량을 넘어선 세계를 응축한 언표라는 점에서 우리의 내적 힘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것들을 향해 던져진 열쇠와도 같다. 때문에 우리는 잠언에 이끌리며 그것을 거듭 마음 새겨 무언가의 가능성을 열어 보려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잠언은 짧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응축한 진리의 씨앗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이며 하나의 큰 나무로 풍성하게 만개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요구한다. 하상만 시인의 시집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는 그 표제부터 잠언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외에도 잠언풍의 언술들이 자주 발견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그가 무언가의 가능성을 열어 보려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역으로 뭔가 불가능하다는 의식 또한 내포한다. 불가능성 앞에서 가능성의 열쇠를 주조하려는 그의 내면에는 삶에 대한 조용한 인내심이 내재해 있다. 표제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왓 프라싱에는 잠언의 숲이 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
이 잠언이 나를 울린다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가족끼리 모여 잡담을 하는 사람과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사람과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무마다 적힌 잠언을 수첩에 옮기며 되뇐다
(중략)
언제나 그렇지만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심심해진다 수첩에 적어가던 잠언 하나를 왼다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잠언의 숲」 부분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 있는 사원 왓 프라싱에서 이 시의 화자는 다른 여행자들이 승려와 얘기를 나누거나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하거나 뭔가를 쓰고 있을 때 나무마다 적힌 잠언을 수첩에 옮기며 되뇌거나 그것을 외운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과 변별된다. 그는 ‘쓰기’를 넘어서 옮겨 적고 되뇌고 외운다. 이 화자는 승려 대신에 나무를, 정확히 말해 나무에 적힌 잠언을 채집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아마도 연혁을 알 수 없는 나무의 말言들은 승려보다 오래된 나이를 가진 지도 모른다. 오래되었어도 살아남은 말, 나무와 같이 생명적인 것에 이끌리며 그는 두 개의 잠언을 심중으로 끌어들인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가 그것이다. 화자가 선택하여 자신의 시에 인유한 이 잠언의 뜻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이 두 개의 잠언에 이끌렸는가 하는 의문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언의 발견과 그것의 목마름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역異域의 사원에서 잠언을 찾고 그것을 외우는 화자의 행위에는 미결정으로 남아있는 난제가 잠재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잠언에 이끌리는 행위는 그가 난제에 부딪쳐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 앞에서 “이 잠언이 나를 울린다”라고 고백한다. 한 마디의 잠언이 ‘나’를 울렸다면 그것은 감동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잠언이 자신의 난제(결여)를 상기시켰음을 암시한다. 화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 확인과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야 하는 어려움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는 자이다. 하상만 시에 집요하게 토로되는 ‘외로움’이라는 정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가지고 있는 것, ‘나’를 둘러싼 세계, ‘나’와 너무 가까운 것들이 ‘나’를 아프게 찔렀기 때문에 화자가 운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시 「혼자 부르는 노래」의 “누가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버릴 거야”라는 구절에는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것을 나무에 새겨진 잠언은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난제를 오히려 이 잠언이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잠언에게 들켰음으로, 그 한 마디의 말이 ‘나’를 알아보았음으로, ‘나’는 복받친다.
두 번째 잠언인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또한 마찬가지 의미 맥락으로 읽힌다. 이 잠언도 시인이 봉착한 난제와 관련한다.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는 잠언에는 ‘오늘’에 대한 강한 긍정이 함축되어 있다. 화자는 이 잠언을 외워 새긴다. 이때 화자는 “언제나 그렇지만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심심해진다”라고 말한다. 시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 발언은 ‘심심함’이 아니라 ‘수행정진’과 관련한다. 잠언을 잊지 않으려는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외우기까지 하는 행위는 어떻게 하면 ‘오늘’이라는 현재성에 애착할 수 있는가 하는 시인의 고민 때문에 촉발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오늘’이라는 현재, 좀더 깊게 말하면 ‘오늘’과 맞물린 자신의 현존에 애착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두 번의 내일”을 암울하게 만드는 내일의 출발 지점이다. 두 번, 아니 세 번, 네 번의 내일의 씨앗이 될 ‘오늘’.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이라는 미래의 씨앗을 긍정할 수 없는 자에게 나무에 새겨진 이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쓰라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왓 프라싱의 숲에 새겨진 잠언은 화자의 결여된 내면에 공명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이 거울은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가진 것과 오늘과 내일을 모두 비추는 거울이며 아울러 화자의 현존성을 공격하는 상징물이다. ‘가진 것’을 좋아하고 ‘오늘’에 만족스러웠다면 굳이 이 잠언들을 옮겨 적으며 울거나 외울 필요가 있겠는가.
2. 평범한 잔인성의 세계
하상만의 내면이 가진 것을 좋아할 수 없고 오늘이라는 현존성에 만족할 수 없다면 그가 ‘가진 것’과 그가 살고 있는 ‘오늘’은 분명 멀리 있는 것들이 아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일상에는 어떤 일들이 놓여 있는가? 일상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둔감함’이라는 무딘 감각으로 우리를 길들인다. 이 둔감한 감각을 우리는 휴식이나 안정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주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조차 사람들의 관심은 쉽게 식어버린다. 비극과 도덕적 자아에 둔감해진 우리의 보편적 일상의 세계는 희극과 흥미와 새로움에 경도되어 있다. 무거움을 유발하는 사건이나 진지함을 요구하는 사안은 사람들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것이 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심각할 정도로 둔감해져 있다. 일상의 평범성 안에서 우리는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살인과 학살과 전쟁에 대해 겨우 몇 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할 뿐이다. 끔찍한 것이 진지하게 인식되고 각인되기도 전에 그 모든 사건은 남의 일로 폐기처분되기 일쑤다. 일상의 시간은 생각할 겨를 없이 빠르게 지나가며 채워진다. 시인은 이러한 일상성에 묻혀버린 쓰레기더미 속에서 몇몇의 사건을 끄집어낸다.
수의사가 마취제를 놓으면
소가 쓰러졌다
우리는 낫을 들고 있었다
위에 구멍을 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소는 위가 네 개나 있었다
그냥 묻으면 땅속에서 빵빵 터졌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우리 손은 무자비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나는 소들이 있었다
수의사는 블로건을 불었다
여러 대의 마취제가 몸을 찔렀지만
쉽게 쓰러지지 않는 소가 있었다
더 이상 달아나지는 못했다
옆구리 대신 발아래
못이 박힌 것 같았다
새끼를 밴 소였다
수의사는 쓰러뜨리려고
마취제를 아끼지 않았다
잠이 찾아올수록
다리엔 더 힘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깜박이는 순간 쓰러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소는
눈물을 자르지 않았다
그런 소는 모두 그런 소였다
―「살처분」 전문
‘살처분’ 소동은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이 발생하면 빈번하게 실시되는 방역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닭을 먹어도 되나 혹은 소나 돼지를 먹어도 되나 하는 위생학적 염려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매해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일 뿐인 것이다. 하상만은 시 「살처분」을 통해서 일상화 된 그저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는 단 1분도 할애되지 않는 뉴스거리에 불과한 사건이다. 그러나 시인이 재현해낸 살처분의 현장은 인간의 무자비함이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인식케 하는 데 손색이 없다. 낫을 들고 쓰러진 소의 위에 구멍을 내는 우리들은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무자비하게 소의 배를 낫으로 찍고 수의사는 마취총인 블로우건으로 소를 쓰러트리기 위해 애쓴다. 거기 “새끼를 밴 소”의 저항이 대비된다. 도망치려 했으나 도망가지 못했던 어미 소를 처분하기 위해 “수의사는 쓰러뜨리려고/마취제를 아끼지 않았다”고 화자는 증언한다. 이때 마지막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 하는 어미소의 저항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깜박이는 순간 쓰러진다/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라고 시인은 쓴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행을 “그런 소는 모두 그런 소였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 마지막 행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의 울림을 가져온다. 시인이 전경화했던 한 마리의 어미 소가 살처분된 ‘모든 소’로 확대되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이건 대량학살인 것이다. 이 무자비한 대량학살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둔감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한 부분이다. 다른 시 「피존벨리」나 「장미계곡」 또한 이러한 주제의식을 변주한 시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의 일이며 또 내일의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계속 밀고 가면 ‘오늘’은 재앙이며 지옥이 된다.
온통 파란 독이 오른
시바신의 그림 한 장이
침대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시바신은 이마 가운데 눈이 하나 더 있고
그 눈을 뜨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내 방 액자 속의 시바신은
가운데 눈을 뜨고 있었다.
이상했다.
여기가 지옥인가?
내 방을 청소하러 온 남자에게 말했다.
시바신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시바신은 언제나 눈을 뜨고 있었죠.
―「시바 시바」 부분
시바Shiva는 ‘파괴’와 ‘창조’라는 양면성을 가진 힌두교의 신 가운데 하나이다. 시바신의 형상을 보면 몸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이마 중앙엔 세로로 된 눈이 하나 더 있다. 그 눈은 감겨 있어야 한다. 이마 중앙에 있는 눈을 뜨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액자 속에서 눈을 뜬 시바를 발견한다. 당연히 감겨 있어야 할 눈이, 다시 말해 있어서는 안 되는 ‘지옥’이, 그것도 자신의 침대 머리 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 불길함을 그는 의심하지만 청소부는 “시바신은 언제나 눈을 뜨고 있었죠.”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말은 “여기는 언제나 지옥이죠”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시바신과 ‘나’ 그리고 청소부가 연출해내는 이 상징적 상황이 바로 하상만이 인식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를 극적인 상황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여행지라는 낯선 곳에서만 있을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이 아니라 바로 “침대 머리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앞서 본 시 「살처분」에 보이는 상황이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현실의 지옥을 우리는 일상에 길들여진 둔감함의 감각으로 무마하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무관심을 일상, 혹은 평범한 삶이라 명칭하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부도덕과 죄의식을 교체해버리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평범한 잔인성의 세계는 이미 오래된 습속과도 같은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복날이 되면
기르던 개를 잡아먹었다
우리 집에는
아롱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중략)
동네 아저씨들은 내통해서
서로 바꿔 잡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집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여름
생각해보니
마음을 더는 방식이
그러할 때가 많았다
―「복날」 부분
앞서 보았던 시 「살처분」과 비슷한 제재를 다룬 듯하지만 이 시는 한 가지 고민을 더 안겨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 일은 아무래도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꺼림칙한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 “동네 아저씨들은 내통해서/서로 바꿔 잡기로 했다”고 화자는 말한다. 꺼림칙함의 무거움을 한결 가볍게 만들기 위해 동네 아저씨들은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방식이다. 이 집 개와 저 집 개를 서로 교환하면 무거운 “마음을 더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의 ‘내통’을 생각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이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기르던 개의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는 철저히 자신들의 편안함을 돌보는 인간의 교활함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교활함이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장류인 인류의 진화와 ‘악의 진화’가 병존했음을 시사한다. 이때 화자는 “생각해보니/마음을 더는 방식이/그러할 때가 많았다”라고 말한다. 하상만 시의 깊이는 이런 부분에서 빛을 낸다. 우리는 누구나 무거움보다는 가벼움 쪽을, 어려움보다는 쉬운 쪽을 선택하고자 한다. ‘마음을 더는 방식’도 그러할 때가 많다는 시인의 성찰 이면에는 인간이 얼마나 교활하고 이기적인 동물인가에 대한 ‘인간관’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과 기르던 개와의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 꺼림칙하고 무거운 ‘마음을 더는 방식’은 분명 인간관계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갖는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치명적 고통을 주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 「여행자」에 나오는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더 따뜻해지는 건 아니에요”와 같은 구절은 삶과 인간관계가 빚어내는 ‘냉기’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는 시인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저 ‘마을을 더는 방식’을 찾을 뿐. 교환과 대체, 증여와 같은 어휘는 이처럼 ‘마음을 더는 방식’과 관련된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가 행해 왔던 관계 맺기 방식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3. 순응과 뒤틀림 사이
지나쳤던 진실들과 그 진실들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며 때로 덮어두어야 편한 것이다. 대부분의 강자强者들은 진실을 덮는 데 능하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 즉 진실보다 더 진실해 보이는 거짓 진실이 필요하다. 그것이 강자들이 유포하는 생활이데올로기이다. 거창한 정치적 혹은 사상적 이념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곳곳에서 작동하는 생활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의 둔감함 속에 뿌리내림으로써 믿음과 확신으로 번성한다. 사람들은 생활이데올로기의 덕목들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생활이데올로기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심’을 제기하지 못 하게 하는 거짓 나침반은 모든 일상인을 그쪽을 향해 가도록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활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순응하게 하고 거기에 성취감과 자부심까지도 불어넣어준다. 얼마나 완벽한 진실 프로젝트인가. 이러한 거짓 이데올로기와 객관적 거리를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에 뿌리내린 거짓 준칙들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가동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내부 준칙은 이미 가지고 있는 익숙한 것들이다. 객관적 거리가 소거된 이것은 늘 ‘올바름’의 가면을 쓰고 있다. 하상만의 「상추」가 이를 잘 말해 주는 예이다.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밑을 따주면 더 잘 자란다기에 그렇게 했다.
상추가 잘 자라면 결국 내가 먹는다.
상추는 무엇을 위해서 자라는 걸까?
열심히 자랄수록 열심히 내가 딴다.
상추들도 이런 대화를 나눌까?
열심히 살아야 해.
부지런한 게 좋아.
서로를 비교할까?
쟤 잎사귀가 더 크구나.
그렇게 비교할수록
결국엔 내가 좋겠지?
상추의 입장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입장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칭찬 받는 게 좋아서
나는 참 열심히 일했다.
―「상추」 전문
이 시는 화려한 수식도 놀라운 사건도 없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곰곰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진가를 놓치기 쉬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곰곰이 들여다보면 열심히 살아왔던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을 동요시킬 힘을 간직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상추를 잘 자라게 하려면 밑을 따주어야 한다는 자명한 농사법을 그대로 실천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결국 그 상추는 ‘내가’ 먹는데 “상추는 무엇을 위해서 자라는 걸까?”라고. 이 물음은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해./부지런한 게 좋아.”라는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람들이 확신에 차서 실천하는 생활이데올로기이다. 열심히 자라서, 부지런히 일을 하면 그것이 올바른 삶이고 칭찬받는 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비유적으로 상추 잎을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결국 그러한 생장활동은 상추를 따 먹는 ‘나’를 위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런 ‘나’를 ‘상추’는 보지 못 한다. “나의 입장에서/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또한 난제라 할 수 있다. “칭찬 받는 게 좋아서/나는 참 열심히 일했다.”는 화자의 고백은 ‘나’와 ‘상추’를 동일성의 존재로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이런 물음이 생략된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잎을 키워왔던 우리들의 일상의 방향은 과연 온전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회의가 여기에 담겨있다. 자명하다고 믿었던 생활 지침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문과 회의감은 믿음에 대한 순응을 뚫고 일어난 방향 전환의 전초가 된다. 시인이 잠언의 숲을 목말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상만은 현재 이러한 지점에서 존재의 뒤틀림을 겪는 것으로 여겨진다. 믿음에 균열이 가면 존재는 세계와 불화의 상태가 되고 그의 언어는 뒤틀린 채로 발화된다. 이것이 역설이나 반어가 생성되는 근원적 바탕이다. 하상만의 시는 전반적으로 잔잔하지만 한편 거기에는 공격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역설들이 도처에 놓여 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종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이 이제 종은 없어졌다고 했을 때 서럽게 울면서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유가 무서웠던 거지 여기 털 빠진 개꼴이 되지 않을까 하고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사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럴 바엔 주인에게 매달려 삼시세끼 밥이나 얻어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중략) 딩고 호주에 사는 개에 대한 이야기 사람과 함께 살다가 야생으로 돌아간 들개 그 개가 참 멋진 것 같다고 너에게 이야기해주었는데 점점 나는 자유와 낭만이 내 몸에서 따듯한 털을 뽑아내는 게 아닐까 두려워진다
―「딩고」 부분
살아서 그녀는
착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죽자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말했다
(중략)
살아서는 효부였고
현모였으며
그 정도면 열녀였다
그녀가 죽자 사람들은
고생만 하다 갔다고 말했다
자식들은 엄마가 불쌍했다고 여겼다
그녀는 평생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삶」 부분
시 「딩고」와 「삶」은 동일한 의미망을 형성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딩고」의 화자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과거사를 통해 역설적 상황을 제시한 작품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종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이 이제 종은 없어졌다고 했을 때 서럽게 울면서 매달렸다는 이야기”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루어진 노비제도 철폐와 관련된다. 일평생 노비로 길들여진 자에게 갑작스러운 자유는 이제 너의 삶을 네가 알아서 책임지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모두가 ‘자유’를 갈망한다고 믿지만 오랜 세월 노비로 살았던 자에게 자유는 청천벽력과 같은 삶의 속박이 될 수 있다. 그의 처지가 자유를 감당할 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야생으로 돌아간 호주의 개에 대해 ‘너’에게 참 멋지다고 말했던 ‘나’는 “자유와 낭만이 내 몸에서 따듯한 털을 뽑아내는 게 아닐까 두려워진다”고 고백한다. 따듯함에 길들여진 ‘나’는 야생의 자유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처럼 두려운 것이다. 즉 자유가 속박이 되려 하는 두려움의 역설을 통해 시인은 ‘길들여진’ 자신을, 자유와 낭만을 말로 치장한 자신의 허세를 드러냄으로써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에 보이는 “진지한 저의 감정이/가짜가 되는 순간들이/자주 찾아옵니다”(「빈센트」)와 같은 구절 또한 이러한 성찰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함께 인용한 「삶」에는 살아서는 효부였고 현모였으며 열녀였던 한 여인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애도의 말을 대비시킨 작품이다. 효부, 현모, 열녀는 모두 칭송의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죽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칭송을 “고생만 하다 갔다”, “엄마가 불쌍했다”로 바꾼다. 효부, 현모, 열녀라는 칭송의 이면에는 그녀가 일평생 동안 감당해야 했던 고생과 불쌍함이 있었던 것이다. 칭송이 곧 고생과 불쌍함으로 역전되는 이 역설적 상황에는 남들의 칭송에 “평생 길들여진” 그녀의 삶이 과연 훌륭한 삶이었나 하는 의문이 담겨있다. 칭송이 그녀를 묶어 놓은 속박이었다면 그녀는 그 속박에 속은 희생자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앞서 살펴본 「상추」와 동일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시편으로 볼 수 있다. “칭찬 받는 게 좋아서” 참 열심히 일한 ‘나’와 평생 칭송 때문에 불쌍하게 고생하다 죽은 ‘그녀’의 삶은 닮아 있다. 노비였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자유를 무서워했듯이, 그녀가 칭송에 묶여 고생을 마다할 수 없었듯이, 하상만의 화자 또한 그러한 내면이 자기에게도 있음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뼈아픈 통찰이 그가 해결해야 할 ‘난제’라 할 수 있다.
4. 그래서 ‘나’는 외롭다
하상만 시에 무수히 많이 나오는 ‘외로움’의 정념은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와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라는 잠언이 비추어내는 자신의 실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나는 이 두 개의 잠언을 통해 시인의 내면에 간직된 결여를 읽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세계는 결코 평범치 않은 잔인함과 교활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계는 인간은, 더 나아가 인간들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묻게 한다. 한편 그러한 일상 안에 ‘오늘’이 있고 ‘오늘’은 거짓 진실로 ‘나’를 이끈다. ‘나’는 그 거짓 진실에 속아 길들여진 자이며 그 ‘길들여짐’은 또한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이 앎은 ‘난제’이며 ‘고통’이다. 시인은 잔인하고 교활한 인간을 사랑할 수 없으며 이미 몸에 배인 순응적 삶을 버리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그 고통을 시인은 ‘녹’의 상징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내 몸속을 떠돌아다니는 피는
붉게 녹슬었다
핏속의 철이 산소와 만난 결과다
핏속에서 녹을 벗겨내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녹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녹」 부분
‘녹’은 부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손상이며 훼손이라 할 수 있다. 몸속을 순환하는 피가 녹슬었다는 것은 몸의 내부가 손상되고 있음을 함축한다. 그러나 녹슮이 “핏속의 철이 산소와 만난 결과”라면 살기 위해서는 녹슮도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 모순어법은 생명은 산소를 필요로 하고 그 산소는 또한 녹슮을 가져온다는 파르마콘pharmakon 즉 약이며 독인 삶, 축복이며 저주인 삶의 총체성을 함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과 산소의 화학반응은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불가피성 속에서 시인은 ‘산소’ 즉 고통스러움을 낳는 ‘잠언’을 되뇌는 것이다. 시인의 화자가 되뇌고 외웠던 잠언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라고, 오늘을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긍정적 잠언과 부정적 현실 사이에 그의 난제가 놓여있다. 그 갈등의 무게를 수렴하는 것이 바로 하상만의 ‘외로움’의 정체라 할 수 있다.
닌빈 가는 길
매연과 소음 속에서 개가
자신을 핥고 있다
가끔 짐승들에게서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배운다
등에 앉은 파리를 쫓는 소의 꼬리에서
나는 외로운 짐승
내가 아니고서 나를 위로할 수 없는
―「위로」 부분
사람이 배가 고픈 거랑, 외로운 거랑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손님이 없었으므로 호텔에 딸린 식구들은 모두 내게 붙어사는 것 같았어
외로우면 배고프다고 말하는 버릇인 그때 생긴 거야
(중략)
외로워 보일 때 나는 부끄러워, 비가 오는 날
(중략)
쓸모없던 나의 언어, 혼자라는 건 가진 것을 쓸모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
근데, 근데 말이야
―「이 밤을」 부분
시 「위로」를 단독으로 읽으면 이 시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처럼 오인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시 「편지」에 보이는 “때때로 외로움이 느껴지면 생각해요/이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제 속의 다정함이 빠져나간 결과라고”와 같은 구절도 그러하다. 자신을 핥으며 스스로를 돌보는 짐승들과 화자인 ‘나’를 동일화하며 “내가 아니고서 나를 위로할 수 없는”이라고 말할 때 이는 처량하고 소박한 정념의 고백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상만의 화자가 지금 난제에 부딪힌 자기를 구하기 위해 잠언의 숲을 헤매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외로움이 단순한 정념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시 「이 밤을」은 그의 외로움의 시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시에서 유일하게 그가 외로움과 배고픔 그리고 특히 ‘부끄러움’의 정념을 등치관계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시의 말미에 “쓸모없던 나의 언어, 혼자라는 건 가진 것을 쓸모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들은 다시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와 맞물린다. “가진 것을 쓸모없게 만드는 힘”의 정체가 외로움이라면 그 외로움은 저 부조리함으로 얼룩진 세계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정념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외로움은 부끄러움의 정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념은 시 「브라쇼브행 기차」에 “풀리지 않는 문제를 오래 고민하면 사람이 우스워진다”라는 자기 냉소의 감정으로 치닫기도 한다. 결국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가 개입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근원적 난제이다.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 그는 잠언의 숲에서 옮겨 적고 외우고 우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시집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에 실린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여기에 적어본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맘껏 나눠가져도
모자람이 없는 풍경
누군가 물을 따라놓았다
컵에 물이 가득차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갈증이 나도 부담스럽다
어제 누군가
자신의 컵에서 따라준 커피는
가득 차지 않아도
한 잔이었다
―「한 잔」 전문
담담한 어조로 차분하게 전개된 이 작품은 시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균형’의 철학을 은근하게 내비친다는 점에서 ‘난제’를 풀어갈 사유의 방식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균형은 모자람과 가득함에 대한 역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시의 화자는 “맘껏 나눠가져도/모자람이 없는 풍경”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넘침과 모자람에 대해 생각한다. 컵에 물이 가득 차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갈증이 나도 부담스럽다”는 발언에는 가득 찬 것이 결국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자람’이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 “가득 차지 않아도/한 잔이었다”는 말은 그것이 모자라도 부족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러한 역설에는 “누군가 물을 따라놓았다”와 “자신의 컵에서 따라준 커피”라는 상대의 태도가 미묘하게 작용한다. 그냥 물을 따라놓는 방식이 ‘냉기’라면 자신의 컵에서 커피를 따라준 방식은 ‘온기’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것이 나누어질 때, 그것이 비록 물리적으로 부족한 것일지라도 “모자람이 없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하상만이 안고 있는 난제들이 이러한 균형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나는 시인이 안고 있는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 그의 조용한 어조가 보다 과감해져도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엄경희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최승자론”으로 등단.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저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숨은 꿈』, 『시―대학생들이 던진 33가지 질문에 답하기』, 『전통시학의 근대적 변용과 미적 경향』, 『해석의 권리』, 『현대시와 정념』, 『은유』, 『현대시와 추醜의 미학』 등. 2014년 제3회 인산시조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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