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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이성주/김구용 시의 현실, 감각,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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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제9회 김구용시문학상/이성주/김구용 시의 현실, 감각, 신체
김구용 시의 현실, 감각, 신체
―-50년대에 쓰인 『시』의 시를 중심으로
이성주
1. 난해성과 초현실주의
1922년에 태어난 김구용은 「산중야山中夜」(1949)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특히 50년대에 많은 좋은 시를 발표하였다. 흔히 전후 시인이라고 부를 만한 범주에 속할 이 세대의 시인들이 그러하듯, 김구용 역시 전쟁이라는 참상 속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와 쓰일 수 있(없)는 시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전개하며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구용의 시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당대에 단평 위주의 글로 소박하게 조명되었을 뿐이며, 그 마저도 영향력 있는 논자들(김수영, 유종호 등)에 의한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가려졌다. 부정적인 평가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나치게 ‘산문적’이어서 시의 범위를 벗어난다거나, 난삽하거나 ‘난해한’ 측면이 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그의 시에 덧붙는 고정된 인식 중 하나이다.
이는 김구용 시를 연구하려는 연구자들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최근 몇몇 논자들은 김구용 시를 난해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환유적 기법, 비의적인 문장, 추상명사의 활용과 통사 구조의 혼란, 단어와 단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절연시키는 방식(데뻬이즈망) 등을 지적하고, 모두가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초현실주의와 연관하여 이성적 사고로 세계를 틀 짓는 합리주의, 총체성, 통일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이러한 설명은 부정적인 평가를 넘어 본격적으로 김구용의 시를 연구의 궤도에 올리는 발판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의 번역자이자 해설자인 황현산은 ‘초현실주의’라는 말에 서려있는 브르통이 자신의 생애를 걸고 지키고자 했던 최초의 의도나 사상이 오늘날에 왜곡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환경에서는 ‘초현실적’이라는 말과 ‘시적인’ 이라는 말이 거의 같은 뜻으로 쓰여 그 말의 핵심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이 난삽하거나 낯선 것을 무턱대고 초현실주의로 설명하려는 현상과 결부되는 것인데(pp.7-8), 이러한 우려가 김구용의 시를 초현실주의로 분석하려는 연구에도 적용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구용의 시를 분석하는데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은 ‘초현실주의’는 김구용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시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초현실주의라는 용어의 엄밀성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초현실주의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를 이 개념에 포함시켜 논의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낳아, 오히려 다른 논의의 가능성을 막는 사태로 이어질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개념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그에 맞춰 개별 작품들의 성취여부를 판가름하는 식의 독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독해의 방식은 작품을 초현실주의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혹은 얼마만큼 부합하는지에 따라 미학적 성취를 판가름하는 태도를 낳을 수 있고 이 역시 작품의 다양한 읽기를 제한하고 시의 독창성을 왜곡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논의의 생산성을 막는 것처럼,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설정된 개념으로 작품을 틀 짓는 것도 논의의 생산성을 막는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초현실주의’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성장시킨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와 김구용 시와의 관련성을 간략하게 비교하고 정리하는 한편, 이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김구용 시의 어떤 측면을 감각과 신체의 문제를 경유하여 읽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2. 브르통의 초현실과 김구용의 현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가 발견하고 탐구한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무의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프로이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거칠게 말해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환자를 치료하려는 목적의식과 결부되어 있어, 꿈을 억압되어 있는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으로 보아 그에 대한 해석(욕망의 구조를 축출하려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브르통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분출하는 욕망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그러한 무의식의 세계는 자유의 영역으로 간주되었고 당연하게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척하려했는데, 자유연상, 자동기술법automatism 등이 그것이다.
나의 아내에게는 불타오르는 수풀의 머리카락이
백열하는 번개의 생각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호랑이 이빨 사이의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최고등성 별의 화한과 꽃 매듭의 입이
하얀 흙 위에 하얀 쥐가 남긴 흔적의 치아가
연마한 호박과 유리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칼에 찔린 제물의 혀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인형의 혀가
믿을 수 없는 보석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어린애 글씨의 획의 속눈썹이
제비 둥지 가장자리의 눈썹이 있다
―앙드레 브르통, 최병우 옮김, 「자유결합」 부분
이에 기반을 둔 시 쓰기는 “신문기사를 일정 부분 잘라낸 다음 그 낱말 하나하나를 오려서 자루에 넣고 흔들어 자루 밖으로 튀어나온 순서대로 그 낱말들을 이어 붙이는 방식의” 유희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다만 이와 같은 유희-다다운동을 전개한 차라의 경우 “말의 단절을 강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브르통은 “사물들 간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촉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p111의 각주 53)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이후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를 무의미한 낱말들의 병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야할 부분으로 생각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은, 위 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불타오르는 수풀의 머리카락”과 “번개의 생각” 그리고 “모래시계의 허리”가 충돌되고 각 행의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뜻밖의 긴장, 브르통에 의하면 “이미지의 빛이 뿜어낸 두 항의 우연한 접근”(p105)에서 비롯하는 “이미지의 가치” 그렇게 “얻어진 섬광의 아름다움”(p106)이야말로 초현실주의자들이 꿈꾼 어떤 현실을 초극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의 빛이라는 것이다.
언뜻 김구용 시에 나타나는 난해한 문장들이 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는 유희와 우연성 그리고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쟁 이후에 그는 개인 차원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유희’라고 말하기에는 진지하고 관념적인 문장을 앞세우며, 무엇보다 능동적인 주체의 모습보다 수동적인 주체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시의 문장은 유희적으로 우연한 언어의 결합을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보다, 현실(전쟁)의 폭압이 만든 부자유의 상황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고, 그것을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층위에서 아무 것도 욕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감각에 대한 발화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의 난해하다고 알려진 문장들은 감각의 측면에서 보자면 전쟁이 일상적인 것들이 비일상적인 것으로, 기존의 감각이 혼란하게 되는 양상들을 낳은 것과 연관된다. 그것이 문장의 비일관성, 통사구조의 교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인데, 감각의 혼란이란 가령,
잎들은 저리도 우거졌는데/집들은 하나하나 터만 남고/꽃들은 이리도 만발한데/송장들이 어디서나 썩는 냄새//알 수 없는 일이다./모를 일이다.
―「잎은 우거졌는데」
안개를 흔드는 저승의 아우성소리, 망령처럼 선 고층들은 소스라쳐 놀라, 눈마다 불을 껐다. 그도 불을 죽였다. 창이 먼 포 소리에 떨린다. 마음속까지 진동한다. 닿으면 불이 활활 당길 듯, 해는 뱅그르르 돌며 첨탑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행길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어쩔 줄을 몰라 들끓는다. 라디오는 이십세기의 비극을 고한다. 그는 미래의 위치에 서서 빛도 냄새도 소리도 맛도 없는 유리창을 내다본다. 비가 두 눈에서 내린다. ―「유리창」
라디오의 보도로 갑자기 긴장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럴 때면 바다는 창에 일제히 몰려들어와 우리가 내다보던 시설과 잡답雜沓과 고역苦役을 뒤덮어버리고, 모두가 무애無涯로 전개하는 자실自失이 된다.
―「정경情景」
와 같은 인용문들에서 나타난다. 위의 구절들은 50-53년에 쓰인 시의 한 부분으로, 등단작으로 알려진 전쟁 이전에 쓰인 「산중야」와 비교하면 전쟁 이후에 달라진 감각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등단작은 짙은 밤 산의 풍경을 그리고 있고, 이때 산의 풍경은 예컨대 ‘외로운 국화’와 같이 화자의 내면의 외로움을 투영한 것처럼 읽힌다. 산을 구성하는 세목들은 동물, 바람, 꽃 등 다양하지만, 그들은 각기 개별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장치로 보이며, 이렇게 구성된 한 편의 풍경화는 파편화되어 있다기보다는 자아의 내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세계로 느껴진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 쓰인 위 시들은 꽃이 만발한 것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려는 관습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사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디서나 ‘송장들이 썩는 냄새’를 맡게 된다거나, 라디오를 듣는 일상이 “갑자기 긴장하는” “습관”이 되어버린다거나, 그로 인해 “빛도 냄새도 소리도 맛도 없는” 일상적 감각이 마비된 어떤 상태가 되는 등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감각이 변형, 왜곡, 전복되는 양상들로 나타난다. 이것이 일상의 감각과 비일상의 감각이 혼재된 어느 한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감각은 “해는 뱅그르르 돌며 첨탑으로 떨어”지거나, 뭔가를 “알 수 없는 일이다./모를 일”이라고 무지無知의 상태를 중얼거리는 주체를 낳는 등 어떤 통일적인 의식, 감각이 해체되고 파편화되는 조짐으로 이어진다.
이는 ‘나’라는 개별자의 감각이 아니라 ‘집들’, ‘사람들’, ‘모두’, ‘송장들’, ‘고층들’과 같이 복수형 접미사 ‘-들’이 거의 습관적으로 붙을 수 밖에 없게 된 상태를 맞이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사람들이 ‘들끓는다’라는 표현은, 마치 벌레들이 들끓는 것처럼 방향을 상실한 군중의 아비규환의 상태를 증언하며, ‘나’ 역시 그러한 ‘-들’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가 예외가 아니라는 것, 즉 ‘나’와 ‘너’는 구분될 수 없는 군중에 속하며, 따라서 개별자로서의 감각이 무화된다. ‘무애無涯’는 불교의 용어로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거의 해탈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무애’된 상태는 세속에서 벗어난 어떤 해탈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나를 유지할 수 없는 자아의 상실自失을 의미한다.
목首을 잃은 나는 방안에 우뚝 서 있는 놈의 동체를 보았다.
―「신화」
다리가 계단을 오른다
―「계절」
어느 날, 내 몸이 나의 우상偶像임을 보았다.
―「반수신半獸身의 독백」
전쟁이 만들어낸 자아 상실의 감각은 독특한 신체 이미지를 낳는데, 위에서 목을 잃었다는 표현이나, 다리가 계단을 오른다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 이는 자신의 의식과 신체 사이에 간극을 느끼는 주체의 감각이 반영된 것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김구용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주인 없는 노예’의 상태를 말한다. 위와 같은 문장이 종종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무의식의 발현, 자동기술법, 우연성, 자유연상 등의 기법이 이성적 사고 습관에서 벗어난 자유의 상태를 목적으로 두는 것과 달리, 위 시의 구절은 단지 당대의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러한 감각은 김구용 시에서 독창적인 사례로 뽑히는 몇몇 서사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거의 단편소설 이상의 분량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김구용의 ‘서사시’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라고도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서사의 형식이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을 타당한 인과관계에 의해 묶이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면, 김구용의 서사시는 문장 단위에서 의식과 의식이 충돌되는 양상을 보이거나,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인과성이 심각하게 붕괴되어 있는 등 일반적인 서사와 구분되는 특징들을 내재한다.
의식과 의식이 충돌하는 문장, 사건과 사건의 인과성이 배제된 문장들이 나타나는 이유를 전쟁이라는 대참사로 인해, 자신을 인과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인과적으로 설명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유년시절-청소년시절-성인시절에 있었던 여러 사건(점)들을 선으로 연결하고 재구성하여, 현재의 ‘나’를 만든 원인으로 두는 것이겠지만(그럴 때 ‘나’라는 단일하고 안정적인 자아가 형성된다), 전쟁의 경험은 언제든 죽을 수 있었다는 생각, 그러니까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생각으로 인해 삶의 우연성, 생의 유한성이 전면적으로 인식된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모두 우연이기에, 왜 저 사람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는가,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모른다’, 혹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말의 불가능성, 혹은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김구용의 중요한 시 중 하나인 「소인消印」의 형식과 주제에 서려 있다. 물론 이 시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모호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 논자들마다 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겠으나, 이 시를 설명하는 논자들이 자주 추상적인 단어들이 자유연상에 따라 파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이 시에는 현실에 대한 주체의 감각이 의식적인 반영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에서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 녹빛 외투의 여자를 우연히 전차에서 만났고, 또 우연히 도움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다방에서 잠깐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삶에서 중요한 만남은 아닐 그런 만남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헤어진 여자가 그날 죽고, 남자는 그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살인의 누명을 쓴다. 그러나 남자는 살인을 할 동기도 계기도 없었으며, 시에 드러나는 정황들 역시 그가 살인을 했다는 것으로 이어질 만한 요소가 없다. 때문에 왜 나는 살인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된다.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과 다르다. 시에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가 살인을 실제로 저질렀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나’가 그저 살인자라는 ‘소인消印’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소인消印이라는 한자는 김구용의 시에서 종종 나타나는 일종의 역설이 깃들어 있는 말장난이다. 소인의 ‘소’는 사라지다라는 의미가 있고, 도장을 뜻하는 인은 판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우편물에서 우표 위에 소인을 찍는 것은, 그것이 접수된 우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 ‘우표’의 가치를 무용하게 만드는 작인이 된다. ‘살인자’라는 소인이 찍힌 남자는 ‘살인자’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받지만, 동시에 현실의 논리적 세계에서 ‘사라진’ 존재가 된다.
현실에서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 그것은 우연한 것이고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난해한 일이다. 시에서 ‘나’는 왜 살인자가 되었는가. 그것 역시 우연한 것이고 살인자가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며 난해한 일이다. 긴 시를 상세히 인용하고 설명할 수 없어 매우 단면적인 제시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러한 줄거리 재구성을 통해 김구용이 현실에서 체험한 삶의 우연성과 자아 상실의 문제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김구용이 산문 여기저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는 ‘초현실적 기법’으로 쓴 것이 아니라 전쟁 등 ‘현실’이 만들어낸 이해 불가능한 세계를 다분히 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김구용의 시는 몽상가의 그것이 아니다. 의식의 충돌, 부자유의 감각, 우연성, 비인과적 구성 등과 같은 ‘난해한’ 형식은 그야말로 김구용 식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3. 전쟁이 낳은 신체 이미지
일단 초현실주의와 같은 용어에서 조금 벗어나서, 앞장에서 수행한 것과 같이 주체의 감각을 따라 시를 읽다보면, 김구용의 시에는 당대의 시대상 혹은 어떤 종류의 담론과 결부지어 생각할 만한 신체 이미지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가령 매음녀, 거지, 아이 등 도시의 빈민들 소위 서발턴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다양한 신체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전쟁에 대한 김구용의 감각, 사상 등을 추적할 수 있는 표층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신체와 관련한 여러 이미지 중에서,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시적 주체의 감각 혹은 관념이 반영된 이미지들, 그의 시에 종종 출몰하는 “반수신半獸身”, “인간 기계”, “심장 있는 인형” 등이다. ‘반수신’이라는 용어에는 이미 신체身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 있으며, ‘인간 기계’라는 표현이나 ‘심장 있는 인형’과 같은 용어 역시 인간의 형상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호화된 ‘신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이, 매음녀, 어머니 등의 실체적인 인물과는 다르게 상상적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김구용 시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주체의 감각, 사유, 의식의 충돌 등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핵심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김구용의 시에서 동물, 기계, 인형이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가를 분석하다보면, 이 이미지가 품은 외연은 복잡하고 넓어진다. 전쟁으로 인해 거의 먹고 자는 동물적 삶에 급급하게 된 인간 군상, 혹은 주체성 없이 타인의 욕망을 따라가는 속물적 삶,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는 기계적 삶은 그야말로 자아를 상실한 인간들의 한 형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 인형, 기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다. 이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시적 주체의 내부에서 쟁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구용의 시에서 주체는 세계가 부여한 자아상실의 조건을 단지 무기력하게 수용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것과 충돌하는 양상-삶과 죽음, 숭엄한 삶과 속물적 삶 등이 싸우는 하나의 장場-으로서 ‘신체 이미지’를 상상한 것이다.
김구용의 신체 이미지와 그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감각의 접촉 양상을 따지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의 내재적인 주제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상과 함께 당대의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이 글에서 수행할 수 없겠지만, 김구용이 신체와 결부된 감각이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떠오르는 미지의 얼굴들을 더듬으면 혈조가 다시 나의 손에 따뜻이 전한다.
―「未知의 모습」
나에게서 너를 찾아야 한다. 정신이 더 해부되기 전에 핏줄을 따라 손이나마 만나야 한다.
―「양지陽地」
우리는 살아 있는 기적을 믿기에 분별을 버린다. 그러면 모순도 안정의 숨결, 비로소 생자生者와 사자死者가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가지 못하는 발들,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 그 눈물이 어리어 ‘신도 만들지 못할 완충 지대’는 밤이면 나의 별들이 찬란하리라고 상상하는 때가 간혹 있다.
―「관조觀照」
김구용의 신체 이미지는 현실의 고통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게 ‘손’이라는 신체에서 교호되는 감각(따듯함, 소리 등)이 나타나며, 이는 시적 주체가 자아를 찾는 고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흔적 혹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고 애도하는 하나의 ‘완충 지대’와 같이 ‘상상’되는 장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단은 소략하게나마 김구용의 시에서의 신체 이미지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의 분열된 감각이 지나가는 통로이자, 그것이 어느 한 순간에 통합되어 진정한 의미의 인간 존재에 대한 꿈이 집약된 세계로 설명할 수 있겠다.
4. 결론
한국의 현대 시사에서 김구용의 시가 매우 독특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대에나 현재에나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해 그의 시는 여전히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으며,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행해진 연구에서 논의가 공회전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 글은 그러한 원인 중 하나로 ‘초현실주의’라는 개념이 엄밀하지 않은 방식으로 쓰인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초현실주의’의 몇몇 기법들을 포괄적으로 적용하여 김구용의 시를 읽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김구용의 시가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주목하였다.
시가 현실에 대한 감각을 반영한다는 점, 특히 50년대의 시에서 전쟁의 흔적이 서려 있다는 언급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가령 그와 거의 동세대인 김종삼(1921년 생) 역시 “폭탄에 마구 불타 버리는 현실과 생명을 보고서도 눈을 감고 오히려 다른 에고이즘의 위장을 꾸미기에 바빴던 타기할 만한 시인들”과 분리시키며 본인의 시적 지향을 밝히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정시와는 결을 달리하였고, 다음 세대이기는 하지만 56년에 등단한 신경림(1936년 생) 역시 한국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물리적 정신적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전통 서정시’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서정시’에 가까운 데뷔작 이후 10여 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고 술회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만 참조하여도 한국전쟁이 시인들의 시 혹은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감각이 당대의 시인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대체로 공유되는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시인들 모두가 똑같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김구용은 전쟁이 남긴 상흔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이 글에서는 특히 감각에 주목하였고, 하나의 가능성으로 특히 그가 창안한 독특한 신체 이미지들에, 현실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주체의 다양한 감각이 중첩되고 분기하는 양상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글에서 후자에 대해 충분한 분석 및 해석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신체 이미지에는 시 내재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사유가 반영된 것이면서, 당대의 현실과 문화적 조건 등과 결부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접근을 비롯하여 다양한 논의가 진행될수록 미답의 영역인 김구용의 시의 다양한 읽기가 가능해질 것임을, 그로 인해 한국의 현대 시사가 더 풍성해 지리라 믿는다.
1)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황현산 번역 주석 해설, 미메시스, 2012. 이하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를 본문에 병기함.
2)앙드레 브르통, 최병우 옮김, 『세계대표명시선』, 금우당, 1983. p.69.
3)열매들 고운 살이 흐물어질 때 달빛은 푸른 산 가슴에 스며, 골짜기마다 조개처럼 흩어진 희끄무레한 뼈다귀도 굶주린 짐승들의 검붉은 주둥이도 꿈이 잔조殘照로운데, 소슬한 빗발이 흐느끼면 썩은 씨가 움트는 기약은 어둡기도 하더니, 십오야 밝은 빛을 올올이 받아 사무칠 듯이 향기로운 샘 곁에 외로운 국화야 다시 꽃은 폈건만, 숲 사이 아롱지는 바람도 없고, 짙은 밤 온 산은 잠이 깊구나. ―「산중야山中夜」 전문
4) 이 문단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칸트로비치의 ‘국왕의 두 신체’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였다. 푸코는 중세 시대에 국왕의 신체를 시해하려고 한 죄인을 공개적으로 신체형에 처하는 것을 분석하는데, 간단히 요약하여 말하자면 국왕에게는 늙고 병들고 죽는 자연적인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신성함을 이어받아 보존, 존속하는 ‘왕으로서의 신체’ 또한 있다는 것이 핵심이며, 이를 시해하는 행위는 왕의 자연적 신체를 시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성함을 침범하는 일, 즉, 권력(기호화된 신체)을 침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중세 시대에 죄인의 신체를 훼손하는 참형은, 죄인을 괴롭히려는 목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권력의 힘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참형을 받는 수형자의 신체는 권력자의 힘과 (대중을 포함한) 수형자의 힘이 대결하는 장소로 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경유하여 김구용 시에서 몇몇 신체 이미지는 하나의 기호로서 문화적,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감각들이 쟁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미셸 푸코,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나남, 2003. 1부 참조.
5) 권명옥 편, 「피란 때 연도年度 전봉래」, 『김종삼 전집』, 나남, 2005, p.294.
6) 신경림,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참조
*이성주 2015년 <동아일보> 평론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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