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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안성덕/꽃과 어머니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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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07회 작성일 19-06-2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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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안성덕/꽃과 어머니가 있는 풍경


꽃과 어머니가 있는 풍경
-김영진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안성덕



봄꽃 지자 여름꽃이 지천이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영산홍, 목련, 모란, 해당화, 살구꽃, 배꽃 피었던 자리에 기다렸다는 듯 봉선화, 채송화, 백일홍, 분꽃, 나팔꽃, 해바라기, 꽃창포, 과꽃, 접시꽃, 원추리……. 꽃이 적은 철이련만, 꽃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세상을 뒤덮은 이 여름꽃 진 자리에 또 가을꽃이, 그 가을꽃 진 자리에 비파나무, 감탕나무, 서향나무, 동백꽃, 복수초, 매화로는 모자랄까 싶어 서리꽃 눈꽃 얼음꽃까지 다투어 피어날 것이다.


30만 내외라는 지구상의 식물 중에 ‘꽃’ 이름표를 단 식물만 수만 종에 이른다고 한다. 장미만 만 오천여 종이라니, 눈감은 자리까지 따라와 꽃이 피는 건 당연지사 아니랴. 『삼국유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꽃 재배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4년 경주 안압지에서 시작되었다. 또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의하면 꽃에도 품계를 두었다. 산과 들에 피어나는 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안에서 기르고 또 품계를 둔 선조들의 꽃 사랑이 유별나다. 같은 꽃을 두고 진달래, 두견화, 참꽃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꽃 사랑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은 풍류를 좋아했다. 산수절경에 싸여 꽃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긴 겨울 지나 봄이 되어 꽃이 피면, 모두 나와 물 좋고 산 좋고 볕 좋은 자리에서 꽃에 동화되었다.『삼국유사』권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전해지는, 신라 경덕왕 때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에게 벼랑 위 철쭉꽃을 꺾어 바친 노인의 「헌화가」부터 조지훈·이형기의 「낙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정호승의 「꽃을 보려면」,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복효근의 「목련꽃 브라자」 등, 꽃에 관한 시작품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렇듯 예로부터 시인들이 꽃을 읊고 노래한 이유는 아름다움과 향기의 한시성에 있을 것이다. 그 ‘유한함’이 우리 인생과 같기 때문일 터이다.


지금 몇 번째 생애를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은 저보다 한 생을 먼저 오셨습니다. 어느 날 꿈이 하도 이상하여 하루 종일 먼산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송이를 바라보며 혼자 미소 지으셨다지요. 그리고 아들을 얻으셨습니다. 고향산천 다 버리고 떠나실 때 한없이 울었다는 기와집 한 채가 선하시다고요.


이제 구순, 노색이 완연하여이다. 두 팔 두 다리는 뼈만 앙상하십니다. 젖가슴은 바람이 빠져 헐렁합니다. 누군가가 모조리 파먹은 탓이지요. 허공에 매달린 육신은 조금씩 퍼주어도 정신만은 못준다는 당신은 우리를 어딘가로 줄기차게 인도하였습니다.


가시는 날 배롱나무 씨앗 하나 어머니 가슴에 심어 드리겠습니다. 고향 찾아가시면 따스한 봄날 그 기와집 안마당에 심으세요. 우리도 언젠가는 고향집에 찾아갈 겁니다. 그때에는 어머니 이미 심어놓으신 배롱나무꽃이 가득하겠지요. 어머니 머리맡에 배롱나무꽃이 피었습니다.
                                                    ―「배롱나무 꽃씨를 심다」전문


한 폭의 기억이 펼쳐진다. 기와집에서 바라보이는 선산쯤일 게다. “먼산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송이를 바라보며 혼자 미소” 짓는 젊은 어머니가 있다. 선산에 누워계시는 조상들이 점지해준 걸까,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올린 치성 덕분일까, 어머니는 학수고대 하셨을 “아들을 얻으셨”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고 정붙이고 살던 “고향산천 다 버리고 떠나실 때” 왜 아니 한없이 울“지 않았겠는가. 그런 “기와집 한 채가” 평생 눈에 “선하시”지 않겠는가. “이제 구순, 노색이 완연”한 어머니. “젖가슴은” “누군가 모조리 파먹어” “바람이 빠져 헐렁”하지만, “허공에 매달린 육신은” 상해가도 “정신만은” 온전하신 것 얼마나 다행인가. 화자는 어머니가 이승을 떠나“가시는 날 배롱나무 씨앗 하나 어머니 가슴에 심어 드리겠”다고 혼잣말을 한다. “고향 찾아가시면 따스한 봄날 그 기와집 안마당에 심으”시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고향집에 찾아갈 겁니다.” 가만 되뇐다. 한 그루 “배롱나무”가 한 알의 “배롱나무 씨앗”이 어머니가 화자를 잉태하고 낳으신 고향산천을 불러낸다. 봄볕 따스하던 기와집을 불러온다. “이제 구순”, “두 팔 두 다리 뼈만 앙상”한 그 어머니의 평생을 불러온다. 어머니의 풍경이다.


하얀 딸기꽃이 피었네
이 꽃 저 꽃 뒤영벌이 인사하네
연둣빛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네


하얀 쟁반의 딸기
내가 먹었지 없지 어머니가 먹었지
딸기 먹었지 없지 뒤영벌이 먹었지
해와 달과 별도 먹었지


하얀 쟁반의 딸기
먹었지 없지 무릎이 먹었지
먹었지 없지 허리가 먹었지


무릎에서 딸기가 열렸네
허리에서 딸기가 열렸네


- 중략-


하얀 쟁반 속으로 붉은 딸기 속으로
등어리 휜 어머니 걸어 들어가시네
                                                           ―「딸기」부분


“하얀 딸기꽃이 피”자 “이 꽃 저 꽃 뒤영벌이” 날아든다. 온종일 딸기밭에 엎드려 “무릎”이 닳고 “허리”가 끊어지도록 딸기농사를 짓는다. 힘에 부쳐 “얼굴이 붉게 물들어”간다. 해마다 딸기꽃은 피고 지건만, 매년 열심히 농사를 지어보건만 형편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조차 없다. “내가 먹었지 없지 어머니가 먹었지/딸기 먹었지 없지 뒤영벌이 먹었지” 빈손이기는 나도 어머니도 잉잉거리며 매년 찾아오는 뒤영벌도 매한가지다. 1, 2, 3연 첫 행의 “하얀”은 삼십년 딸기농사를 함께 지으셨을 어머니의 ‘백발’이리라. 하얀 딸기꽃이 핀 딸기밭에 뒤영벌이 잉잉거리며 난다. “등어리 휜 어머니”와 내가 엎드려 붉은 딸기 속으로 들어간다. “하얀 딸기꽃”이, “허벅지 바늘 찔러 외로움 떨쳐 내고/접동새 속울음 우시고 쪼글쪼글 곶감 되”신 (「하얀 찔레꽃」) 어머니와 나와 잉잉거리는 뒤엉벌을 불러낸다. 불려나온 어머니가, “개울가 둔덕 봄나물 밭에서/곤드레 뜯어 돌아온 어머니”가 “고무신 벗어 타닥타닥 흙을 턴다.”(「타닥타닥, 곡우시절」)


장미를 심어 밤늦게까지 꽃을 키우고 계셨다.
당신은 해마다 장갑 위에 핀 꽃을 선물하셨다.
눈물점에 습기가 꽃의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입동 무렵, 벙어리장갑 위에서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해 봄까지 피어있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고
당신은 벙어리장갑 위에 핀 장미꽃에서 나오시더니
당신의 주름살에 핀 검은 꽃에 분을 바르고 계셨다.
                                                ―「벙어리장갑에 핀 꽃」부분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는 “입동 무렵”, 당신은 “밤늦게까지”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셨다. “장미꽃이 활짝” 핀 벙어리장갑, 그 겨울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따뜻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내 눈물 꽃은 “입동 무렵, 벙어리장갑 위에서” 피기 시작하여 “장미꽃이 활짝 피”어나는 봄까지 손등을 적셨다. 어머니는 하고많은 꽃 중에서 왜 하필 장미꽃을 수놓으셨을까? 훌쩍 세월을 건너와 생각는다. 장미꽃보다 고운 젊은 어머니가 “벙어리장갑 위에 핀 장미꽃에서” 걸어 나오신다. “주름살에 핀 검은 꽃”, 저승꽃에 “분을 바르”신다. 그렇다 백발의 저 어머니도 붉디붉은 장미보다 더 뜨거웠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저 검은 저승꽃, 다 식은 어머니의 생이 ‘장미꽃’보다 뜨겁다. “동네 어귀에서 말뚝박기 놀이 하”고 “분꽃이 피면 누렁이와 집으로 돌아”오던(「분꽃축제」) 시절로 되돌아간다. “왼쪽 오른쪽으로 비비고 나면 후루룩 고소하게 넘어가던”, “노란 개나리꽃 단무지가 웃”던(「차이나타운」) 시절이 생각난다. “꽃들의 미소가 환”하고(「돌돌 말린다」) 우리도 환하던 시절이었다.


밤새 달도 따고 별도 삼켜보고 한 줄 쓰면 귓속에서 애벌레 잠자는 소리 들린다.
개나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고집 부리며 저 잘났다고 하지 마음의 문에 돌쩌귀를 채우고 나리나리 개나리꿈 꿔 봤나 心象을 거울 속에 비춰 보았나.


진달래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바늘귀가 낙타를 통과중이다 언어들이 사막에서 꿈틀대고 달래달래 진달래꿈 꿔 봤나 心象을 거울 속에 비춰 보았나.


천년의 국화무늬 동거울 물고 거울 속에서 장닭이 걸어 나온다 고려산 비탈을 바라보는데,


초경의 분홍 피 토하고 폐경의 노란 꿈 펼치고 애벌레가 잠에서 깨어나자 영혼의 달빛과 별빛 속에서 모래무덤을 개미귀신이 파고 있다 시끄럽던 귓속이 무풍지대가 된다.


원고지 칸의 여백이 채워진다.
개나리 진달래꽃이 흐드러진다.
노랑치마 연분홍저고리 봄날이 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개나리 진달래꽃」전문


시를 짓는 일은 지난한 작업이다. 한 줄 시를 얻으려 “밤새 달도 따고 별도 삼켜”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시구 “한 줄 쓰면” “귓속에서 애벌레 잠자는 소리 들린다.” 밤새 웅웅거리던 귓속이 평온해진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고집 부리며 저 잘났다고 하”는 시어들, “마음의 문에 돌쩌귀를 채우고 나리나리 개나리꿈” 꾼다. “心象을 거울 속에 비춰”도 보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만큼 어려운 게 시업이다. “달래달래 진달래” 피는 밤 두견새처럼 피울음을 토해내야 한다. “초경의 분홍” 빛 진달래 피는 봄부터 “폐경의 노란” “국화꽃” 피는 가을까지 “애벌레”의 삶을 견뎌야 한다. 무서리 칠 때쯤에나, 시로 시끄럽던 “귓속이 무풍지대가 된다.” 어머니의 텃밭에 “오이꽃 피”듯 “햇살이 쏟아지고” “애호박도 열”려「텃밭」“원고지 칸의 여백이 채워진다.” “개나리”, “진달래”, “국화”를 부르다가, “하얀 까시 하얀 향기 좋아했던 하얀 찔레꽃 닮은 어머니”를(「하얀 찔레꽃」) 부르다가 봄날이 간다. 평생이 간다.


김영진 시인은 무심한 듯 툭 툭 ‘꽃’들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기억과 풍경을 호출한다. 꽃잎을, 톡 톡 건드려 기억에 얹힌 또 다른 기억과 그 기억 속의 풍경을 불러낸다. 기억 속의 풍경과 풍경 속의 사람에게 향기를 입힌다. 기억과 풍경에 꽃을 입힌다. 그 기억과 풍경에 물씬 사람냄새가 배어있다. 김영진 시인의 『달보드레 나르샤』에는 30 편에 달하는 꽃에 관한 작품이 들어있다. 그냥 꽃이 아니라 ‘꽃과 어머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한 권의 시집에는 시인의 세상을 향한 눈이 얹히기 마련이다. 시인이 건너고 있는 강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유독 많은 꽃과 어머니 관련 작품들에서, 우리는 김영진 시인이 왜 꽃만이 아니라 어머니만이 아니라 ‘꽃과 어머니’를 동시에 호명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은 우리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미 삶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일생의 축하와 애도의 자리에 꽃이 빠진 적 없다. 관계와 관계의 촉매제이며 매개체이다. “가시는 날 배롱나무 씨앗 하나 어머니 가슴에 심어 드리겠습니다. 고향 찾아가시면 따스한 봄날 그 기와집 안마당에 심으세요. 우리도 언젠가는 고향집에 찾아갈 겁니다.”「배롱나무 꽃씨를 심다」. 윤회의 시작과 끝이기도 한 것이다.
‘웃음꽃’의 꽃, ‘꽃 시절’의 꽃, ‘꽃길’의 꽃 세상의 모든 꽃은 절로 피지 못한다. 땅, 하늘, 사람이 있어야 꽃이 핀다. 꽃을 피우는 땅, 하늘, 사람은 또 그 꽃이 있어야 완성된다. 하나의 풍경이 된다. 김영진 시인의『달보드레 나르샤』는 꽃으로 완성된 어머니의 풍경이다.





*안성덕 2009년 <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몸붓』. 원광대 출강. 《아라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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