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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시/김기준/채플린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버지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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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시/김기준/채플린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버지 외1편
채플린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버지 외1편
김기준
과일도 제 몸을 깎는 칼질에 아프다고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내 머릿속에서 늘 들려오는 소리, 시계추처럼 밤마다 사각사각 흔들린다. 지팡이를 옆에 낀 채플린의 발동작은 얼마나 더 걸어다녀야 멈춰 설까. 고양이의 애첩이었던 빈 접시에 다시 혀를 대고 핥기 시작하는 늙은 신사의 가을 저녁, 열두 번의 괘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사각사각 과일을 깎으며 벽에 걸린 시계추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손놀림이 떨리기 시작한다. 1977년 크리스마스, 런던에서 보낸 그의 편지는 관을 훔치는 도적들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는 여전히 사각사각 칼질하며 돋보기안경을 걸쳐야 받아볼 편지를 기다리고, 손주름이 늘어나는 동안 고양이들은 대물림하며 애첩의 미끈한 피부를 핥고 있었다. 채플린 선생! 당신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이미 도적들은 관을 놓고 모두 도망가 버렸소. 난 당신의 안부를 기다렸지만, 너무 늦었어요. 생포한 고양이들이 발정하는 동안 불안한 TV에서 런던 시민의 신음이 들렸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사를 외우는 당신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사각사각 웃옷을 벗는 여인의 황홀한 가을을 바라보며 난 편지 따윈 잊어버리고 껍질만 도려내고 있었던 거요. 채플린이 숨을 거둘 때 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 미리 답장을 썼다. 그의 편지가 붉은 바다를 건너오기 전 낡은 인생을 말리던 햇빛에 물들어 날아가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체국을 나오는 아버지의 발걸음도 시계추를 따라 옆으로만 움직이고 가을 불빛 속으로 저문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리움이란 그런 거야. 기다려도 오지 않는 편지를 뇌신경으로 읽는 거. 마른 장작불에 타는 영혼을 보면 주인 몰래 스스로 사라지는 고양이처럼 밤마다 긴 혀를 내밀어 상처를 치유하다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채플린의 편지를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답장은 이제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집배원을 기다리는 동안 늙은 손등의 주름을 따라 깊게 팬 강물도, 닳고 달아 각이 없어진 원형의 기억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늦은 저녁에 토해내고 마는 배설물이다. 칼질에 익숙한, 과일들의 신음처럼 밤마다 들려오는 채플린의 발걸음 소리. 아버지는 여전히 사각사각 과일을 깎으며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오로라
북극의 원주민들은 밤마다 휘파람을 불었지. 아기 예수를 포대에 감싸 안고 걸어가던 새벽이 돼서야 형체를 드러냈어. 무장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몸에서는 전투를 끝낸 소년 병사의 칼날을 타고 날아오는 빛이 보였어. 그 빛은 아마 노란색이거나 붉은색이었을 거야. 어두울수록 환하게, 또렷하게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너의 모습이랑 닮았다고 할게. 나도 휘파람을 불었지. 등 뒤로 따라오던 그믐밤 발자국을 휘파람으로 은폐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느새 지워지고 있었어. 사랑도 이와 같아 덮을 때면 휘파람 소리를 내지. 그때 형체도 없이 몸에서 우수수 빠져나가는 기억을 어찌할까. 미약한 바람마저 불지 않았는데도 너는 흔들리며 다가왔고, 그 흔들림에 상처를 묶어두고 돌아갔지. 그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그렇게 흔들렸어. 밤 사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양은 아침에 지구로 찾아와 상륙작전을 펼쳤어. 북극의 원주민들은 더는 지상에서 휘파람을 불지 않았지. 별의 뒤편으로 달아난 내 사랑처럼 말이야.
*김기준 1989년 ‘엽서시’, 2017년 《시와경계》로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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