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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시/이연희/골목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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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시/이연희/골목 외1편
골목 외1편
이연희
골목이라는 발음 끝에는 목을 꺾은 가로등이 서 있다
하늘색 철문을 열고 나온 두 여자가 인사를 하며 흩어지고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아이는 달려간다
울어야 하는 아이들은 모두 골목을 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람의 목구멍은 골목 같아서
소리가 지나가고
어둠이 깃들고
모퉁이를 돌아 달아나는 발소리를 아무도 모르게
삼킬 수도 있다
이제 나는 골목 같은 건 없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어제 먹은 음식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골목을 잊고
골목길의 사람들을 잊고
굴착기 소리에 잠이 깬
유적지의 유령처럼 일어나 빨래를 걷는다
저녁은 어스름 사이로
세상의 모든 골목들을 한꺼번에 풀어놓는 게 아닐까
자루에서 쏟아진 뱀처럼 기어온 골목들은
어쩌다 깨어난 유령들의 기억 속에서 불을 켜는 게 아닐까?
넝쿨 장미 한 다발이 베란다 난간에 목을 걸고 있다
어떤 기분
낙타를 낳았지 뒷발부터 나와 바닥을 딛고 섰지
막 뒤에서 등장하는 마술사처럼 내게서 벗어났지
나오자마자 나와 눈을 맞추었지 네가 엄마야?
뭐 그런 눈빛으로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 그런 느낌으로
입을 우물거리고 코를 씰룩거렸지
어떻게 사람이 낙타를 낳지? 그날 밤 그 남자가 낙타였단 말이야?
쭈뼛거리며 낙타가 걸어왔지 그렇지만 나는 줄 게 없었지
네 맘대로 나왔으니 네 맘대로 가야 했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한낮이었지 편의점 앞이었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있었지 다시 봐도 내가 낳은 건
분명 낙타였지 긴 속눈썹이 달린 커다란 두 눈을 껌뻑이며
낙타는 울었지 나는 못 본 척 했지
이건 전부 네 탓이야, 뭐 그런 눈빛으로
낙타는 나를 봤지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평생 살게 해 줄게
뭐 그런 느낌으로
낙타는 무단횡단을 했지 차들이 달려왔지
한낮이었지
손바닥으로 나는 해를 가렸지
낙타의 울음소리가 지나간 것 같았지만
이전에도 그 후에도
사람이 낙타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
지독한 황사가 다녀갈 뿐이지
*이연희 2018년 <영남일보>문학상·구상詩문학상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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