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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미니서사/김혜정/남편의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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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미니서사/김혜정/남편의 대자보
남편의 대자보
김혜정
“술 한 잔 할래?”
“좀 피곤한데. 오늘 일이 좀 많았거든.”
“알았어. 그럼 자.”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이 술을 마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이 마시는 거도 피하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서 반 년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자 남편이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막내라서 그런지 남편은 유난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는 남편과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 남편은 결혼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울 거라는 고백이었다. 결혼은 현실이라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렸을 때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많이 사다가 키웠어요. 제가 안 사면 병아리가 죽을 거 같아서요. 그 말에 끌렸다.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 나를 버리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한 달 전 시어머니의 자가호흡이 곤란해지자 병원에서는 목에 삽관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시누이 셋은 반대하고 남편은 꼭 해야 한다고 했다. 삽관하면 깨어나도 말을 할 수 없다고 해도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엄마를 만질 수만 있어도 된다고. 그 말에 시누이들도 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깨었는데 옆자리가 허전했다. 거실로 나가 보니 촛불을 켠 채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새벽 두 시였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술을 마셔?”
남편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이 없었다. 혼자 잠을 잔 게 미안하고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러나 해서 걱정도 됐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말해 봐. 걱정되잖아.”
“이번 일요일에 아버지 산소에 갈 수 있어?”
남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산소는 집에서 차로 삼십 분이면 가는 곳에 있었다. 친정아버지를 모신 추모공원도 그 근처여서 어느 쪽이든 산소 가자, 하면 두 말 없이 그러자, 했다 그만큼 산소에 다녀오는 일은 우리 부부에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덧붙였다.
“산소?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또 가자.”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마워.”
새삼스럽게 왜 이럴까. 그러고 보니 최근 며칠 동안 남편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하니 앉아 있고, 이따금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해 봐.”
“아냐, 아무것도.”
“그냥 아버지 산소에다 뭐 좀 붙이려고.”
“뭔데?”
“대자보.”
산소에 대자보라니, 취중농담도 아닐 테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남편은 할 일이 있다며 나에게 다시 들어가 자라고 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잠시 후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남편이 눈치 채지 않게 거실을 엿보았다. 남편은 전지 위에 네임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나는 남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지를 펼쳤다.
‘아버지! 엄마가 사는 집이요, 엄마가 저 준다고 약속했거든요. 근데 누나들이 뺏어 갔어요. 엄마는 말도 못하게 돼서 물어볼 수도 없고……. 집이 몇 채씩 있는 부자들이 집도 없는 저한테 그러는 게 말이 돼요? 죄송해요. 이런 걸 말씀드리게 돼서…….’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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