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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장편연재3/김현숙/흐린 강 저편3/시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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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04회 작성일 19-06-26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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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장편연재3/김현숙/흐린 강 저편3/시아제


시아제


김현숙



일대 격전을 치른 듯 희연과 시누이 혜옥 사이에 누적되어 온 갈등의 폭발이 겨우 봉합된 후 한동안은 그런대로 잠잠한 나날이 흘러갔다. 혜옥은 아파트 단지 내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바이엘을 배우기 시작했고, 인근 상가의 편물집에 드나들며 곧 태어날 조카를 위해 작은 케이프를 뜬다며 한 뭉치의 노란 털실을 사와 골똘히 뜨개질에 몰두했다. 집안 일 외 뭔가에 빠져있는 혜옥의 모습은 보기에도 더없이 안정되고 평화로워 보여 희연은 안도했다. 뒤늦은 각성으로 희연이 혜옥을 위해 사들인 우리 가곡과 가요 음반을 들으며 혜옥은 유연한 솜씨로 뜨개질에 열중했다. 언젠간 꼭 뜨개질을 배워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의 스웨터나 머플러를 떠주고 싶다는 갈망을 품어 온 희연이기에 혜옥의 그러한 모습은 경이로울 뿐이었다.    


누구나 타고 난 재능은 따로 있음을 절감케하는 존재라 할까. 건강하고 다부진 모습, 타고난 많은 재능, 딱 부러진 성격 등등. 야성미 가득한 들판의 처녀 혜옥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산다 해도 나름의 견고하고 반듯한 성정으로인해 매우 탄탄하고 흔들림없는 삶을 살아갈 것임을 희연은 예감했다. 누구든 각기 다 지니고 천품이란 게 있다면 사람은 배움이나 환경과는 무관히 어쩜 출생 순간부터 일정한 고유의 격을 품고 태어나는 지도 모를 일이다. 혜옥에겐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격 같은 것이 배어져 나옴을 느끼며 희연은 가끔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떠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든 결코 비루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으리라는 확신 같은 것. 혜옥에게선 웬지 그러한 무엇이 느껴졌다.           
 
희연의 출산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추석이 가까워오는 초가을 무렵이었다. 제법 강하게 전해오는 태동과 함께 점차 몸이 무거워져 저녁을 먹은 후 TV를 보던 희연은 깜빡 선잠에 빠져들었다. 혜옥은 가까운 상가 편물학원에서 교육을 받는 시간이라 집에 없었다. 곧 다가올 추석은 산달이라 경석을 따라 시가가 있는 K시로 내려가야함이 아무래도 무리일 거란 생각. 또한 불현 듯 맏며느리라는 심리적 부담이 너무도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와 그즈음 희연의 심신은 매우 쳐져만 가는 상황이었다.


고요한 저녁, 철퍽철퍽, 힘겹게 계단을 밟아오는 둔탁한 음향에 이어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불안한 예감에 잠에서 깨어난 희연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무거운 발길로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까닭없이 가슴이 벌떡거렸다. 여느 방문객인들 초인종을 누르는 게 예사인데 이 무슨 변고인가. 누구세요. 잔뜩 긴장한 희연의 음성에 경계의 빛이 우러났다. 형수님, 전대여. 아버님 모시고 올라왔으라루. 헉헉 숨이 찬 듯한 한석의 음성이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어두운 저녁 전화 한 통도 없이 갑작스레 상경하다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당혹감에 희연은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현관문을 급히 열어젖혔다. 갈잎처럼 바싹 마른 체구의 시부가 한석의 등에 업힌 채 축 쳐진 모습으로 현관 안에 몸을 들였다. 한석은 밭에서 일하다 그대로 상경한 듯 흙 묻은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 올린 차림새였다. 아부지께서 요즘 통 밥도 못 드시고 곧 돌아가시게 생겨, 들에서 일하다 말고 곧장 들쳐 업곤 서울로 올라왔단께요. 헉헉 숨을 몰아쉬던 한석이 밭은 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희연은 너무도 황망한 가운데 우선 혜옥의 방으로 시부를 모셔 이부자리를 펴 누을 것을 권하며 간신히 소릴 내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식사는 하셨는지요. 시방 암 것두 안 넘어간다. 니 시아제나 쪼깐 입 다실 것 좀 차려줘야 혀. 기차 안에서 암 것두 안 먹었응께. 입도 딸싹 안혔어. 병중에도 시부는 잔뜩 가래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한석의 끼니를 염려했다. 그러나 한석은 웬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시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됐단께요. 한 끼 안 먹어도 암시렁 안혀요. 아, 근디 형님은 안직도 안 오셨나여. 혜옥인 워딜 갔당가요.


한석의 불퉁한 말투가 웬지 마음에 걸려 희연은 점점 더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형은 지금 출장 중이고요, 아가씬 편물 학원 갔는데 곧 올거에요. 삼촌 뭐라도 좀 드셔야죠, 제가 잠깐 상 좀 봐올게요. 얼른 부엌으로 몸을 빠져나오며 희연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아들집이라곤 해도 한밤중에 전화도 없이 병든 노인을 들쳐업고 집으로 들이닥친다는 건 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팔다리가 후들거렸기 때문이었다. 전기밥솥을 열어보았다. 밥이 전혀 남아있질 않았다. 깔끔한 성격 탓에 혜옥은 늘 끼니 때마다 식구에 딱 알맞은 양의 밥을 짓곤 할 뿐, 찬밥이 남는 걸 극히 꺼려했다. 휴웃, 숨을 내쉬며 쌀을 안치기 위해 쌀독을 열곤 바가지를 찾는데 찰칵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혜옥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 순간 비로소 살았다는 생각이 들며 희연은 오르르 몸을 떨었다.


아가씨, 아버님 오셨어요. 혜옥의 모습을 보자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듯 거의 사색이 다 된 희연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돌았다. 안방에 들어가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 인사를 나눈 혜옥은 예의 능숙한 솜씨로 쌀을 씻어 안치고 작은 냄비에 명태와 두부를 넣어 시원하고도 얼큰한 찌개를 끓여 얌전히 상을 차려내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요술을 부려 만들어내듯 혜옥이 행하는 그 모든 과정이 희연은 오직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 건 암 것도 아녀요. 시골에 살면 어떨 적엔 먼 데서 오는 친척들이 오밤중에도 들이닥치곤 혀서 가마솥에 불 때고 밥혀서 내가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란께요. 혜옥의 말이 기막혀 희연은 단지 상상만으로도 낯빛이 하얗게 질려갔다. 익숙치 못한 관습, 도무지 쉽게 적응이 안되는 환경이었다.


아부지께 물방댕이나 사다 푹 고아드려야 쓰겄다. 우선 기운부텀 채려야 하겄응께.  희연이 출근도 하기 전 하향한다며 새벽 첫 차로 아파트 현관을 나서던 한석이 혜옥을 향해 그렇게 당부했다. 어젯밤 시부와 시아제의 황당한 방문으로 잠을 설친 희연이 까슬한 음성으로 혜옥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물방댕이라뇨, 아가씨. 그게 뭐예요. 소무릎뼈를 말혀요. 물에 푹 고는 물골이 그것 있잖여요. 물 한솥 붓고 푹 끓여먹는거요. 혜옥의 설명에 그제야 희연은 대충 감을 잡곤 지갑에서 돈을 꺼내 혜옥에게 건네며, 마트에서 우족 앞다리를 사와 푹 고아 놓길 당부했다. 희연의 청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혜옥의 낯빛이 짙은 곤혹감으로 흔들렸다. 부친의 존재에 대해선 본능적인 한 가닥 가녀린 연민만이 있을 뿐, 거의 불만과 원의로 가득차 있는 대상일 뿐임을 늘 토로해 온 터라 희연은 그녀의 착잡한 속내가 그대로 전해오는 느낌이었다. 희연 또한 시부의 급작스런 상경으로 출근 길 발걸음이 너무도 무겁기만 했다.


최소한 전화를 통해 미리 상경 여부를 의논하던가, 아님 희연 쪽 의향을 미리 타진해보는 게 순서 아닐까. 하긴 당신 아들집에 가 머물고 싶다는 아비의 뜻을 왜 굳이 아들, 며느리에게 의논해야만 하는 것인지, 시부의 입장에선 그 점이 외려 납득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만큼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풍이 대를 이어 그대로 답습되어 온 것임을. 외려 시부의 상경에 힘들어 하는 희연의 사고방식 자체가 너무도 도시적이고 얄팍한 성정으로 치부되기 십상일 것이다. 가까운 가족간에도 개개인의 사적 공간, 사생활은 전무하고 그 무엇에도 우선되는 유교적 예의범절만이 삶의 패턴, 그것의 전부로 통용되는 관습에 대해 감히 무어라 항변할 것인지. 희연은 절벽을 마주한 듯 극심한 절망감에 가슴이 섬뜩 내려앉았다. 


시부는 둘째 치고 오밤중 늙고 병든 아비를 등에 업고 무작정 상경한 한석의 당당함 또한 희연에겐 더 큰 충격임이 사실이었다. 결혼 전부터 비롯된 뭔가 설명못할 거리감과 경계심 같은 것. 그것이 가족이란 이름의 구성원으로 한 울타리를 형성한 후에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상호 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극히 상반된 정서, 그리고 강한 이질감 때문임이 분명했다. 한밤 시부를 등에 업고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던 한석의 경계 어린 눈빛이 그 모든 걸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마치 며느리로서 희연의 부덕과 인간성, 그리고 인내심의 한계를 한 눈에 저울질하려는 듯한 대항적 자세. 그러한 그의 대나무처럼 뻣뻣한 위악적 태도가 희연에겐 기실 더 큰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킴은 그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모종의 목적을 위한 목적. 언제까지나 그와의 사이에 그러한 대립적 구도, 괴리가 이어져갈까. 병환 중인 시부와 한석과, 혜옥. 그들을 향한 희연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더 엄청난 중압감으로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한석은 예컨대 동네 처녀들에겐 꽤나 인기가 많은 총각이었다. 농한기면 동네 마을회관에 휴대용 축음기를 마련, 읍내 춤선생을 불러 와 소위 소셜댄스를 배워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가 하면, 노래 실력 또한 대단하여 그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고 그로인해 많은 처녀들이 그를 따랐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 결코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다감하고 언변 좋고 과감한 성품이 뭇처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된 농사 일을 끝낸 밤이면 으레 동네 처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석을 부르러 몰려와 삽짝을 서성이기 예사였다.


그러나 어인 일로 그는 자신과 함께 어울렸던 처녀들과는 그리 오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상대를 바꾸기 일쑤였고, 그러기에 그러한 교제가 혼인으로 이어지긴 좀체 쉽질 않았다. 적어도 함께 놀던 근동의 잘 아는 처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긴 싫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입지立志의 의미랄까, 그는 일단 30살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뜻을 세워 집안을 돌보고 일으켜야만 한다며 29세가 되던 해 겨울. 그는 부쩍 맞선을 보고 소개팅을 하며 결혼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올해 넘기기 전 우선 약혼식이라도 간단히 치러야 쓰겄는디 형님이랑 형수씨 쪼깐 내려오셔야 헐 것 같소. 성탄을 며칠 앞 둔 어수선한 연말, 느닷없이 날아온 한석의 정혼 소식에 경석과 희연은 도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에게 맞춤한 연분이 나타난 것인가, 내심 한편은 안도의 마음이 들기도 하여 부리나케 K시로 내려갔다. 기차를 내려 소읍의 한산한 역사를 들어서는 순간, 눈망울 초롱하고 복스럽게 생긴 처자 하나가 한석의 곁에 나란히 서 생글거리며 그들의 귀향을 맞아주었다. 첫 대면의 서먹함이라곤 전혀 없는 다정한 대면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낯섦이 느껴지질 않는 친밀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바로 그날의 만남이 희연과 계순의 첫 상면이었다. 손아랫 동서를 맞는 희연의 마음은 모든 게 낯선 시가에서 비로소 강력한 우군 한 명을 획득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으나 K시의 중심가에서 한석과 계순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눔으로써 예컨대 일종의 상견례 절차를 치른 셈이었다. 


예비 신부, 계순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귀염성스럽고 친화감 깃든 밝은 미소가 특징인 부산 아가씨였다. K시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부모님의 생업을 따라 남녘 항구 도시 부산에서 성장한 처녀. 저는 어디에서 살든 교회만 다닐 수 있다믄 젤로 행복헐 것 같어요. 영남과 호남의 방언이 적절히 뒤섞인 꾸밈없고 순박한 억양이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여느 때의 경계심 어린 눈빛은 간곳없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는 한석의 상기된 모습은 혼기를 앞 둔 풋풋한 총각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희연은 미소 지었다.


맞선 보는 자리에서 걍 솔직허니 제가 다 말해부렀어요. 이 자리에서 서로 맘에 들믄 당장에 사진관 직행하여 약혼 사진 한 장 팍 밖아불곤 혼인 날짜 잡자고 혔단께요.


호탕하게 내뱉는 한석의 말에 동의를 표하듯 계순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매단 채 고개를 까딱였다. 제아무리 상대가 맘에 든다 해도 맞선을 보는 당일 약혼을 해버리고 혼인 날짜까지 잡다니 희연으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직감. 말하자면 두 사람은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함에 있어 무엇보다 순간에 다가오는, 맞은 편 존재로부터 감지되는 모든 것, 그러니까 바로 그 직감에만 의존, 전적으로 그것만을 믿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려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려 하는 것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체중까지 줄여 군 입대를 면제 받고, 장남인 경석을 대신하여 농사일이며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도맡아야만 하는 처지이기에 결혼을 서두르는 그의 심경은 백분 이해하나,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반려자라면 적어도 단 한 계절만이라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게 희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해 음력설이 다가올 즈음, 마침내 한석은 계순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관에서 약혼 사진을 찍은 지 근 한 달만의 일이었다. 속성 코스도 그런 초속성의 전례란 찾아보기 힘들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된 혼인이었다. 한석은 그만큼 매사에 과단성 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또한 세상의 무엇보다 자신의 촉과 감을 굳게 믿는 그런 유형임을 재확인한 계기랄까. 지나치게 사려 깊고 신중한 성격인 경석과는 확연히 좀 다른 성향의 시아제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계순이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굳이 농촌으로 내려와 꿈 꾼 삶은 대저 무엇일까. 허름한 농가, 그 삽짝 앞으로 한없이 펼쳐진 황량한 겨울 들판을 저 푸른 초원, 그림같은 집으로 환치시킨 그녀의 환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부모 모시고 농사 지으며 살아가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조차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계순은 고백했다. 어린시절을 보낸 그리운 고향 땅에서 맘에 드는 성실한 남자 만나 시부모 모시고 함께 농사지으며 매주 주일 교회만 나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는 것이 자신의 소박한 꿈이었노라고. 낯선 항구 도시의 변두리, 빈한한 대가족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온 성장기의 불안정한 나날이 계순의 가슴에 은연중 도시의 삶에 대한 혐오와 피폐함을 안겨주었고, 마음에 드는 남자와 더불어 신앙생활만 지켜갈 수 있다면 귀촌의 삶이 외려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결코 녹록칠 않았다. 다름아닌 바로 고부간의 갈등이 문제였다. 병석에 누워 거동조차 불편한 시부의 바라지는 차치하고라도 매사 바지런하고 일 욕심 많고 일손 빠르기로 소문 난 시모는 도무지 한시반시도 새며느리 계순이 가만히 앉아 쉬는 꼴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미였다. 정 많고 경우 바르고 사리분별 확실한 성품이 미덕이나, 7대 독자인 지아비의 이기와 병약으로 오랜 세월 맘고생을 해온 탓에 극심한 외로움, 그리고 얼마간의 애정결핍이 혼재된 일 중독증이 거의 강박으로 작용하는 듯한 심리 상태를 보임이 시모의 특징이었다. 


더구나 둘째 아들 한석은 시모에게 있어 집안의 기둥이며, 정신적 지주, 또한 허약한 지아비의 분신과도 같은 막강한 존재이기에 새며느리 계순의 처신은 애초부터 참으로 위험천만의 뇌관을 안고 있는 상황일 밖엔 없었다. 시모의 집은 ㄱ자 형의 구조로 좁은 툇마루가 딸린 본채와, 마당을 내려서면 우측에 별도로 방을 낸 사랑채가 부엌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을 이루고 있는 형태였는데 급조된 방의 결함이 그대로 드러나 보온이며 난방이며 그 모든 것이 전혀 기능을 못하는 허술한 거처였다. 희연 또한 겨울에 결혼했기에 신행 온 첫날 밤을 그 방에서 보낸 기억이 생생했다. 생경한 닭 울음 소리와 함께 잠을 깬 혹한의 아침, 입김을 불면 천장에서 그대로 팍, 얼어붙고 말 듯한 그 혹독한 추위를 못내 잊지 못했다. 


바로 그 방에 신혼 살림을 부린 계순은, 겨울 새벽 새색시다운 장밋빛 벨벳 홈드레스에 정갈히 앞치마를 두르곤 강추위에 몸을 옹송그리며 거의 한데와도 같은 부엌으로 들어서곤 했으나, 이미 거기엔 꼭두새벽 한 발 앞서 미리 나와 식솔들의 따끈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시모의 엄혹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어 계순은 매번 극심한 당혹감을 느꼈다.         


시모는 새며느리 계순이 조금만 더 바지런하길 바랐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고 조금만 더 몸을 바지런히 놀리고 조금만 더 농사일을 잘 하길 간절히 바랐으나 계순은 워낙 그렇게 좀 느긋하고 급할 게 없는 천성을 타고난 여자라 그 점이 바로 고부간 갈등을 야기시키는 근원이 되곤 했다.


시모보다 먼저 일어나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팔팔 끓여 식솔들 씻을 물을 마련한 후 다시 그 솥에 밥을 앉혀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하고, 따뜻한 국과 맛깔스런 몇 가지의 찬을 만들어내는 일. 제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제 아무리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행해온 부엌의 엄숙한 의식과도 같은 일련의 행위들. 그걸 이어받을 사람은 시모에 이은 계순임은 부동의 사실. 그러나 외풍 센 추운 방에서 남편 수발에 시달린 새색시의 고단함은 날이 밝는 게 두렵기만 했고, 단잠을 깨어남이 죽기보다 싫었음을, 시모는 계순의 그 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쩜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단 시모는 애시당초 아예 이해할 마음이 없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한석의 존재란 시모에게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나약한 지아비를 대신하는 강력한 조력자이며 집안의 가장, 하늘 같은 존재였기에 그 누구라도 그를 완전 독점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끝 맵고 무엇에든 남보다 뒤처지는 걸 못참는 시모는 사사건건 계순의 느긋한 행동거지를 나무라며 앞장 서 일을 채근하곤 하여 계순과의 갈등이 악화되어 갔고, 급기야는 한석과의 사이에서도 점차 그 대립의 골이 깊어만 갔다. 특히 시모가 계순에게 가장 불만인 점은 고양이의 손도 빌린다는 바쁜 농번기에도 주일엔 만사를 제쳐놓고 일손을 팽개친 채 교회로 달려가는 그녀의 유별난 신앙심, 바로 그것이었다.


도시에서 성장한 계순이 애초 농촌으로 시집온 건 그나마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 때문이었거늘 그러한 점은 간과한 채 그저 일 욕심만 앞세운 시모의 마음가짐에도 문제는 있었고, 그러한 불화를 적정선에서 타협하지 못한 계순의 지나친 종교적 아집도 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보리 수확이 한창인 망종 즈음, 시모는 뙤약볕 아래 온몸에 까끄라기가 묻은 몸으로 한석이 땀 흘려 베어낸 보리를 단으로 묶어내며 한숨 지었다. 일손이 너무 바빠 발등에 오줌 눌 시간도 없다는 망종이었다. 한데 그놈의 교회란 곳이 대관절 뭔 곳이기에 며느리란 게 시어미도 몰라라 그리로 내빼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몸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꼬꾸라질 듯 통증이 이는 허리를 펴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순간 들녘 저만치에서 예배를 마치고 한들한들 여유로운 걸음으로 고샅을 향해 다가오는 계순의 모습이 보이자 시모는 돌연 화가 치밀어땀에 절은 수건으로 온몸에 들러붙은 까끄라기를 탁탁 털어내며 자신도 모르게 악을 썼다. 시상에 동네 길 막고 함 물어보란께. 대저 이런 경우가 워딨다냐. 시에미랑 신랑은 시방 까끄라기 땜시 눈도 못 뜨며 일허는디, 메누리란 사램은 대저 워딜 갔다오는 것이냐. 하느님인가 뭐시껭인가 그거시 시에미나 신랑보다 중한겨, 뭣이 중한겨. 마악 밭두렁을 향해 다가오던 계순이 얼어붙은 듯 멈춰서 시모의 하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오죽허믄 보리농사 잘 되라고 풋보리를 다 그슬려 먹었겄냐. 보리란 것은 망종을 넘겨블면 스물 넘은 처자 꼴이란께. 맴이 급해 시방 뛰다가 죽을 일인디 하느님이 다 뮈시냐고오. 안그냐. 너두 대저 생각이란 게 있음 말혀보란께! 낯이 벌겋게 달아오른 시모는 깃발을 흔들 듯 수건을 휘두르며  계순을 향해 소리쳤다.   


아, 엄니이, 그만혀요. 지발 좀 그만, 그만 하란께요.
보릿단을 경운기에 싣던 한석이 들판을 향해 보릿단을 냅다 던져 흩어버리며 시모와 계순을 향해 소릴 질렀다. 나가 참말로 폭폭혀서 못산단께. 한시반시도 속 편할 날이 읎응께로. 힘든 농사일 해도 사람이 뭔 낙이 있어야 살 것 아녀요잉. 허구허날 고부간에 쌈박질이나 해쌓고 잠시도 서로 꼴을 못 보고 으르렁대니 대관절 워찌 살겄소. 에잇, 둘이 박 터지게 함 싸워보소. 이꼴저꼴 안 보고 당장 워디로 가버릴텐께 다신 날 찾지마소.


한석이 불같이 화를 내며 보릿단을 허공에 마구 흩뿌렸다. 마치 뿔난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떨던 한석은 그 길로 곧장 마당 펌프장으로 달려가 푸푸, 몸을 씻고는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졌다.  
 
그날 집을 나간 한석으로부턴 근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알만한 데, 가까운 인척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해 알아보았으나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모는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속이 까맣게 타 몸져누었고, 계순은 연일 눈물바람으로 한석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행여 며칠 내 동생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던 경석도 점차 사색이 되어 경찰에 신고하고 직접 찾아나서려 마악 귀향을 준비하던 밤, 마침내 한석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형수님, 전대여…….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한석의 음성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침착하여 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간 온가족을 노심초사, 온통 애를 말린 장본인이 정작 본인은 너무도 멀쩡히 자신의 생존을 알려오고 있음이 기막혀 그녀는 말을 잃었다.


삼촌, 어머님이 거의 돌아가시게 생겼어요. 동서 상황도 말이 아니고요. 진작 우리에게라도 소재를 알리고 연락을 줬어야죠. 처음으로 시아제를 향해 손윗 사람다운 따끔한 말로 질책하는 희연의 음성은 단호했다. 그러나 내심 한편은 말할 수 없는 반가움이 솟구침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사라진 집안, 그가 없는 시댁이란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온갖 난제가 가득하여 희연은 늘 보리 까끄라기같이 깔끄럽게만 여겨지던 시아제의 존재가 얼마나 큰 비중으로 자신의 삶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는지 비로소 절실히 깨달았다.  


한석은 고향에서 가까운 부안의 내소사에 머물고 있었다. 홧김에 집을 나가 울적한 마음에 발길 닿은 곳이 그곳이었다. 힘들고 외로운 삶의 고비마다 왠지 문득문득 불가에 귀의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침을 간신히 다독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소위 금수저,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불우한 환경으로인해 학업에의 꿈도, 그 어떤 작은 성취도, 아무것도 이뤄내질 못한 뼈아픈 좌절, 상실감은 그의 내면을 좀 먹는 악성 종양과도 같이 점점 커져만 갔다. 때문에 그는 늘 어디론가의 가출을 꿈꾸었고 곧잘 방황과 일탈을 일삼곤 했으나, 그것만으로 그의 깊은 상흔은 결코 사라지질 않았다. 
 
신혼 초 어느 해 6월, 주말을 이용하여 경석과 희연이 K시에 내려간 때였다. 때는 마침 모내기 철이라 노모와 한석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희연 또한 뭔가 일손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석은 직접 논으로 뛰어들어 제법 능숙한 솜씨로 모를 심었고, 노모와 함께 새참을 나른 후 논가에 앉아 그들의 일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연 또한 일순 바지를 둥둥 걷어붙이곤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학교에서 농번기 일손 돕기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지도한 체험이 있어 미약이나마 일을 거들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완전 오판이었다. 한석과 노모의 유연한 동작에 따라, 모판에서 빼낸 모를 물이 찰랑이는 논에 줄을 맞춰 가지런히, 적절한 힘과 속도, 깊이로 탁탁 꽂아 넣는 일은 보기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었다. 미처 몇 모를 심기도 전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고 눈앞이 핑핑 돌아 희연은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아고나, 형수님, 논 가운디서 곧 쓰러지게 생겼구만요. 인자 고만덜 허고 나가서 쪼깐 쉬었다 헙시다잉. 다행히도 한석이 희연의 핼쑥한 낯빛을 보며 작업에 제동을 걸어왔고 모두 땀을 닦으며 논가에 나가 앉아 새참을 먹었다.        


형수님, 밥 안 먹어도 좋으니 인자 일 그만허고 도망가고 싶지요잉. 농사일도 몸에 배어야 허는 것이제 아무나 허는 것이간디요. 자고로 들에서 일헐 땐 이랑 끝을 봐선 안된다는 말이 있지라우. 아까 봉께 형수씬 겨우 모 한 포기 심고 허리 펴 쩌그 이랑 끝 바라보고 또 허리 굽히고…… 농사일은 고렇코롬 허믄 폭폭혀서 당췌 못허는 것이란께요. 


한석이 막걸리 잔을 들이키며 희연을 향해 말했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희연이 순순히 응수했다. 하긴 프랑스 속담에도, 풀을 베는 농부는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음을! 그래도 세상 모든 직업 중 젤 떳떳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일이 농사란 생각이 드네요. 온전히 자신의 노동으로, 씨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자면 어떤 부정이나 비리 같은 게 끼어들 여지가 없잖아요. 희연의 좀 맹하고도 진지한 말에 한석이 실소했다. 근디 이 농사일이란 게 몸뚱이만 성하면 누구나 허는 것인디 거기에 뭔 보람이나 가치 같은 것이 있겄어여. 때론 뼈 빠지게 일 허다가도 허망허기 짝이 읎단께요.


애써 가꿔 수확하는 기쁨, 그리고 그걸 여러 사람이 유용한 양식으로 일용하고, 생산성과 가치를 인정 받고, 돈도 되고……. 그렇게 따진담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을까요. 희연이 반문하자 한석이 말했다. 아, 형수님 맹키로 애덜을 갈치는 일은 을매나 보람이 있겄소. 잘 갈쳐놓으믄 나중에 훌륭하게 되갖고선 선상님 고맙다고 찾아도 오겄고, 여하튼 사람을 갈치는 일처럼 보람 있는 일은 없을것이요잉. 한석의 말에 이번엔 희연이 실소했다. 교육이란 게 그리 간단칠 않아요. 이론처럼 쉽지도 않고요. 그럼 삼촌은 농사일 안했음 어떤 일을 하고 싶었죠? 스치듯 던지는 희연의 물음에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이 되어 한석이 답했다. 난 억울한 경우. 맴이 아픈 사람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읎게 생겨먹은 사람인께 아마 판사나 시인이 됐을까 몰겄네요. 초등핵교 때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동시로 대상 받은 것이 첨이자 마지막 상이었응께요. 새참 먹는 논가엔 어디선가 마침 땀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노동 후의 짧은 휴식은 참으로 감미로웠다. 미풍에 찰랑이는 논물처럼 가슴 가득 훈훈한 가족애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애초 내소사에 닿은 한석은 그저 한동안 요사채에 머물며 마음을 달래고 내적 평안이나 얻어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머물다 보니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번뇌 모든 걸 잊고 오직 출가를 갈망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전신을 뒤덮어왔다. 수차에 걸친 주지승과의 면담, 그리고 며칠간의 고심 끝에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행자 입문을 앞 둔 삭발식을 행하기 전 최소한 형과 형수에겐 알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 다행이랄까.


한석의 거처를 알게 된 희연은 경석과 함께 잠시도 지체함 없이 내소사를 향해 달려갔다. 고향집에 몸져 누운 노모와 계순에겐 우선 전화로 한석의 무사함과 신변의 안전을 전하며 부디 안심토록 당부했다.


기차를 타고 K시에서 내려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내소사 입구까지. 그리고 매표소인 일주문에서 시작되어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긴 전나무 숲길을 걸어갔다. 마음이 급박한 중에도 높다랗게 뻗어나간 키 큰 전나무에서 뿜어나오는 짙은 향기에 희연은 문득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꼈다. 한석을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그러나 정작 사찰이 가까워올수록 적이 착잡해지는 기분에 희연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점차 느려져만 갔다.  


사찰 마당을 들어서자, 저만치 대웅전에서 마악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 한석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없이 초췌한 낯빛에 검정 고무신, 잿빛 절옷 차림의 생경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과 열흘 남짓한 사이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경석과 희연의 출현을 알아 본 한석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전화로만 야그 혀도 충분헌디 뭐더러 오셨대여. 야윈 얼굴에 메마른 미소를 띠며 한석이 형, 경석을 향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경석이 비감한 낯빛으로 한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맘고생 많았지. 다 내 탓. 형이 못난 탓이다. 그간 내색은 안했으나 내심 동생의 실종에 대해 고통이 극심하였음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뭔 말씀이다요. 제가 외려 형님께 심려 끼쳐 죄송헐 뿐여요. 저도 여그 와서 기도하며 많은 걸 깨달았단께요. 승질머리 못돼갖구선 식구덜에게 참말로 못헐 짓 헌거 다 알고 있지라우. 헌디 이것도 다 운명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얻어 형님께 연락드린 거구만요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석간수 옆 나무그늘로 앞장 서 걸어가며 한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뭐시냐, 저 고렇큼 경솔한 인간은 아니어요. 출가에 대해 맘 굳힌 것,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맘에 두고 곰곰 생각해온 일인 것인디…….


한 바가지의 석간수를 퍼 희연에게 건네며 한석이 말했다. 지가 겉보기 허곤 달리 원캉 좀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데가 있는 인간인가봐여. 농사일 하며 잘 살다가도 워찌다 한번씩 걍 팍 죽고잡은 생각이 들어 환장했응께요. 엄니랑 집사람, 찌그락찌그락 쌈 해쌓는 꼴도 이제 더 이상은 못봐주겠고여, 지 속이 늘 시끄럽고 한시도 편헐 날이 없응께요. 근디 여그 와서 조용히 경 읽고 기도하며 살다보니 세상 천지 여그 같이 맘 편허고 좋은 디가 또 위딨것냐, 허는 생각이 들고 참말로 속세에 절대 나가기가 싫어졌단께요. 절간 행자 생활이 아무리 힘들다 혀도 워디 농사 짓는 일 같이 힘들겄으라우. 글안혀요?


한석의 말은 더없이 진지하고 진솔함이 느껴져 희연은 문득 목이 메었다. 빈한한 환경 탓에 겨우 중학교만 졸업한 후 그대로 논두렁에 내던져지고 만 자신의 처지가 때론 그 얼마나 슬프고 불운하게 느껴졌을까. 경석이 더없이 침울한 음성으로 혼잣말을 하듯 한석을 향해 말했다. 
꼭 그래야만 했니. 꼭 그 길 밖엔 없었니. 무능한 형으로서의 아픔이 절절히 배어나는 슬픈 어조였다. 한석이 가업인 농사를 떠맡기 위해 군 면제를 받으려 체중 감소에 안간힘을 기울이며 단식하던 그때와 똑같이 자조 어린 물음이었다. 한석이 떠 준 석간수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말없이 듣고만 있던 희연이 비로소 한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삼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결코 옳지 못해요. 오랜 세월 혼자 고심하고 또 고심해온 결론이라 하더라도 이건 정말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우선 삼촌은 이미 결혼한 몸이에요. 혼잣몸이 아님을 아셔야죠. 그렇담 본인이 선택한 길, 그에 따른 마땅한 책임도 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어머니껜 삼촌이 당신 생의 전부임을 잊어선 안돼요. 그 누구도, 그 어떤 형제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건 삼촌도 잘 아시잖아요.
더구나…….


음미하듯 석간수를 한 모금 들이마셔 목을 적시며 희연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더구나……동서는 지금 홀몸이 아니예요. 아기를 가졌어요. 병원에 가서 정확히 확인한 바입니다. 어제 저랑 통화하며 통곡을 하더군요, 입덧이 한창인데 어머닌 아파 누워 삼촌 가출 원인이 동서 탓이라고만 나무라시고. 도무지 좌불안석, 죽고만 싶다고 하네요. 만약 삼촌이 돌아오지 않는담 본인도 더 이상 살 뜻 없고 그대로 만경강에 몸 던져 죽겠다고 줄곧 울기만 하니 딱해서 볼 수가 없었어요.    
순간 사색이 된 두 남자의 눈빛이 뚫어져라 희연을 바라보았다. 두 남자의 눈빛 중 한석의 쪽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으며 희연을 주시하였음은 당연했다.
 
다음 날 아침, 한 남자가 해가 환히 떠오르는 사하촌을 뒤로 하고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신작로를 향해 황황히 걸음을 옮겨갔다. 한석이었다.

<제 3회 끝>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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