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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단편/김경/슬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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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단편/김경/슬리퍼
슬리퍼
김경
이영은, 그녀는 갔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이 계절에 세상 밖으로 훌훌 떠났다. 이제 그녀는 영원히 마흔 한 살이다. 어제 오후, 나는 그녀를 배웅했다. 영정사진 속의 그녀는 20대처럼 환히 웃는데, 하늘은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잔뜩 찌푸려 있었다.
눈이 휘날린다. 풋눈이 아니다. 소금 알갱이처럼 자잘한 결정체의 싸락눈이 하염없이 흩뿌린다. 나는 거실에서 서성이다가 베란다로 나간다. 금세 한기가 달려들어 어깨가 움츠려들고 시야마저 흐릿하다. 눈발이 제멋대로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나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아, 깜박 잊고 있었다. 오후에 무정이 ‘어게인’으로 온다고 했다. 약속할 때에도 뜨악했는데, 오늘은 더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벽시계의 바늘 두 개가 겹쳐지려고 한다. 벌써 정오다. 오전 내내 하릴없이 손을 놓고 있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자부하는 요가 수업마저 걸렀다. 그녀가 나를 붙잡았는지, 내가 그녀를 놓지 않으려고 기를 썼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제 그만 미적거리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바리스타로 일하는 ‘어게인’은 아파트 상가 1층에 자리한 5평짜리 커피숍이다. 주인 여자는 하루에 한 번, 마감 시간 20분 전에 나타나 매상을 점검한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내가 주인인 줄 안다. 삼십 대의 선우가 오전 10시에 커피숍 문을 연다. 선우는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실내를 말끔하게 청소하고 배달 온 조각케이크도 냉장 쇼 케이스에 진열한다. 나는 1시에 선우와 교대해서 밤 10시까지 커피를 내린다. ‘어게인’은 나를 구원해준 최고의 터전이다.
나는 남편 무정과 이혼한 뒤 한동안 방황하다 못해 침잠했다. 집 밖으로 한 발을 내딛기가 두려웠다. 세상은 고생대의 정글보다도 더 음습하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싫었다. 내가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서는 데엔 바리스타 자격증이 단단히 한 몫을 했다. 푹 쉬면 아이가 들어서지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빈둥거릴 때, 취미삼아 따놓은 자격증이었다. 어떤 예지가 있었던가. 아니다. 임신을 위한 그 소중한 휴식기를 무책임하게 저버린 꼴이었다. 무정과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절대로 이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다.
어느 결에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탐스러운 눈송이는 허공을 선회하면서도 제 길을 잘도 찾아간다. 앙상한 나뭇가지나 보도블럭이 감쪽같이 흰옷을 입었다. 그녀의 얼굴빛도 참 희고 말끔했다. 쏟아지는 눈송이 사이로 언뜻 그녀의 얼굴이 내비친다. 까칠한 그녀의 두 눈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를 바라본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가. 아, 방싯방싯 웃던 준이‥… 그녀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이제 어떡하나. 나는 그만 현기증이 인다.
어지러워요. 언니는 괜찮아요?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견상자세와 웃타나사나를 연속적으로 열 번하고, 막 고양이 자세에 들어가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전신에 번져나는 촉촉함을 은근히 즐기던 나는 그녀가 아직 호흡법에 미숙한 탓이라고 치부했다. 그녀는 초보였다. 그녀는 요가반에 나온 첫날, 바로 내 뒤에 요가매트를 깔았다. 약간 큰 키에 긴 생머리를 정수리에 올려 묶은 첫인상이 발랄하고 상큼해 보였다. 게다가 몸매가 요가 강사 못지않게 S라인이 돋보였다. 어지럽지 않아요? 그녀는 툭하면 어지럽다는 말을 했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자, 시선을 고정하고, 왼발바닥에 힘을 줍니다. 오른손으로 오른 발목을 잡아 왼 허벅지 안쪽에 발바닥을 밀착시킵니다. 나무자세를 하던 중에 그녀가 그만 털버덕 주저앉는 게 거울 속에 비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왼발 오른발을 교대하며 마지막까지 집중했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일어서는데, 그녀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디가 안 좋아? 조금만 쉬려구요. 다음 요가 시간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한 달……. 그녀는 내내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서너 달이 훌쩍 지났다. 내 머릿속에서 차츰차츰 그녀가 잊혀졌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어머, 이게 누구야? 저, 아기 낳고 키우느라 운동할 짬을 못 냈어요. 아기? 어쩜, 예쁘겠다. 아들, 딸? 아들이에요. 막바지 봄날 햇빛이 요란스레 반사하는 한낮, 휘트니스 센타 앞에서 장바구니를 든 그녀와 맞닥뜨렸다. 근 2년 만의 재회였다. 우리는 근처 은행나무 그늘로 들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저 눈인사나 나누던 우리가, 아니 내가 그녀의 출산 사실에 좀 들떠서 종알거렸다. 그녀는 우리 아이, 우리 아이를 연발하면서 아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은근히 과시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두 번이나 유산한 일까지 털어놓았다. 세 번이나 아이를 가져봤구나. 그녀의 상처마저도 마냥 부러웠다. 실은, 제가 좀 아팠어요. 출산 후에 자꾸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 동네 병원에선 단순한 피부병이라고 했는데, 점점 더 심해져 대학병원에 갔어요.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며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는 ‘루프스’를 앓고 있었다. 아이는 건강하지? 그럼요, 우리 준이는 우량아예요. 이젠 저도 좋아요. 그래도 피곤은 금물이래서 맨날 뒹굴었더니 몸만 불어났지 뭐예요? 그녀는 경쾌하게 웃었다.
다음 날,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내 뒷자리에 요가매트를 깔았다. 꼬박꼬박 출석은 물론, 눈빛부터가 예전과 달라보였다. 어지럽다는 말도 까맣게 잊은 듯, 열심이었다. 원래 빈야사 요가가 동작과 동작을 물 흐르듯 연결하는 데에 묘미가 있어 균형과 집중이 필수적이었다. 굼뜨고 끊기던 그녀의 동작이 빠르게 교정되어갔다. 고난이도의 비둘기나 낙타 자세에도 입을 앙다물고 덤벼들었다. 골반이 많이 틀어져 있다는 강사의 진단에도 의기소침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그녀가 불편했을까. 오기, 욕심, 집착……. 그런 말들이 그녀와 결부되면서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그녀가 흔들거리는 줄사다리를 타고 아슬아슬 저 하늘 끝에라도 오르려는 것만 같았다.
9월로 접어들었으나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날도 서둘러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요가가방을 둘러멨다. ‘어게인’ 때문에 항상 쫓기는 일상이었다. 아니? 탈의실 밖 신발장 앞에서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내 신발, 감색 핏플랍 슬리퍼가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신발장을 샅샅이 훑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순간 무정의 얼굴이 눈앞을 가렸다. 슬리퍼는 헤어진 지 4년 만에 무정이 택배로 보낸 생일선물이었다. 나는 뜬금없는 슬리퍼를 받고 한동안 얼떨떨했다. 그 동안 안부전화 한 통 없던 사람이었다. 기분이 야릇하다 못해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아이가 4개월째 접어들었어. 무정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뱉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고백이었다. 같이 보던 티브이 주말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업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막 집을 뛰쳐나가던 장면에서였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 연애 시절까지 더하면 함께 한 세월이 10년이었다. 10년을 키워온 사랑과 정이 튀밥 부스러기 날리듯 흩날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그 여자야? 무정이 대뜸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어머니에게서 여자에 관한 얘기를 들은 지 꼭 넉 달 만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대는 이어야 해. 시어머니는 난임의 원인 제공자로 나를 지목하고 닦달했다. 내가 난임 포비아가 된 데는 시어머니도 한몫을 했다. 병원에선 둘 다 건강하다고 했다며? 도대체 아이를 못 갖는 원인이 뭐냐? 시어머니는 말끝마다 원인을 추궁하는 데 열을 냈다. 회사도 만만치 않았다. 결혼사전에 아이는 없다구? 아이가 안 생기는 건 아니고? 같은 디자인 파트인 선배가 우동국수를 후루룩 빨면서 비아냥거렸다. 세 살배기 아이 엄마인 입사 동기도 입술을 삐죽였다. 멋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솔직히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죠. 부부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선홍색 립스틱이 추하게 반들거렸다. 정직한 내 몸은 식당에서 나오기도 전에 위경련을 일으켰다. 선배도 입사동기도 나도 모두가 다 꼴사나웠다. 나는 회사의 연초 워크숍에서 무정에게 깊이 끌렸다. ‘내가 본 한 권의 책’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시간이었다.
그대가 그곳에 있어 내가 이곳에 있다/내가 이곳에 있어 그대가 그곳에 있다/그래서 우리는 행복했다/인간의 가치는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존재하는데 있다
기획실 팀 대표로 나선 무정은 듬직한 중저음으로 에릭 프롬을 소개했다. 나는 이내 김춘수의 <꽃>을 떠올렸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듯 로맨틱하게 출발했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면 결혼의 결실은 아이라고 믿어. 그래? 하연인 참 생각이 소박하네? 무정은 ‘우리’라는 틀보다는 ‘나’에 천착했다. 특히 아이에 대해선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나의 조촐한 인생관에 비해 무정의 꿈은 아득하게 깊고 원대하게 다가왔다. 아이가 무슨 대수인가. 나는 세뇌라도 당한 듯 쉬이 내 사고를 접고 무정의 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날이 갈수록 무정이 오히려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과 출산은 별개의 문제이고, 짧은 인생에 2세 계획은 무리수였다. 통장에 돈이 모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 계획을 짜고 비행기 트랩을 밟았다. 낯선 풍광, 낯선 사람, 낯선 음식이 행복의 바로미터였다.
비행 속도처럼 빠르게 결혼 3주년이 지나가던 나날이었다. 기세등등한 서울의 꽃샘바람에 비해 히로시마의 미풍은 보드랍고 연했다. 제일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를 찾았다. 야,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환상적이네. 무정이 탄성을 지르며 양손을 추켜들었다. 바다와 신사기둥의 청과 홍, 그 대조적인 색감에서 발산되는 신비스러움에 취할 때만 해도 우리는 손색없는 여행객이었다. 그곳을 나온 뒤, 나는 왠지 예정된 평화기념 공원 행을 거르고 싶었다. 일제 강점기의 어둠, 그 흔적을 꼭 돌아봐야 해? 여행은 온몸으로 하는 독서다, 몰라? 무정은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할 수 없이 공원에 발을 디뎠다. 첫눈에 원폭 돔이 들어오면서 그만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치명적인 전쟁의 상흔은 고스란히 우리 역사의 비극과 직결되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여튼 성마르고 감정적이긴……. 당신은 너무 민감해서 탈이야. 자기 절제 훈련이 필요하다구. 무정의 손을 잡고 평화 기념관을 향하는 데도 자꾸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들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혼령들의 아우성이 공원을 마구 떠돌았다.
그날 밤이었다. 난데없이 무정의 남성이 폭발했다. 아이 갖자, 우리. 아니 꼭 가져야겠어. 무정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소곤거렸다. 좋아, 오케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이상하게 떠돌이 방랑자가 집으로 회귀한 것 같은, 안온한 평화가 밀려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당장 피임약부터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나 일체동심만으로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실패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조바심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소심하고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갈급증에 허덕이면서 난임 클리닉 문을 두드렸다. 임신이 가장 잘 되는 온도인 37.2도에까지 집착했다. 그랬다. 결국 아이가 오긴 왔다. 우리의 아이가 아닌, 무정의 아이로 왔다. 아이가 오지 않는 걸 형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온 아이는 그보다 몇 백배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아이의 존재는 결코 중요하지않았다. 무정만이 아이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옭아매고 압박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줄다리기를 하지 않았다. 아이가 그들의 아이였기에 나는 백기를 들고 홀로 남았다. 슬리퍼를 보내기 전까지 무정은 완전히 감감했다.
휴대폰에서 무정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당신, 외반증이잖아? 신발멀티숍을 지나다가 우연히 쪼리 스타일이 보여서……. 회사에 다니던 때였다. 지하철 역사의 계단만 보여도 겁부터 났다. 운동화를 신으면서 행보에 자신감이 붙었다. 무정과 나란히 동네 공원의 우레탄 트랙을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핏플랍 슬리퍼는 운동화보다 훨씬 편했다. 여름 내내 발에 찰싹 붙어 그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굴리며 탈의실에 들고나는 회원들을 흘낏거렸다. 이거 아니에요? 나가려던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발장 앞 발판 주변과 그 너머 저쪽까지 무질서하게 널린 신발들. 멀리 한쪽 구석에 핏플랍 슬리퍼가 보이는데, 얼핏 보아도 내 것이 아니었다. 검정색인데다가 굽이 꽤 닳았다. 이 슬리퍼 주인 있어요? 누가 바꿔 신고 갔네. 어떡해요? 여기저기서 내 말을 툭툭 받아 주었다. 나는 일단 그 슬리퍼를 꿰었는데, 영 밀착감이 없이 헐렁했다. 발가락을 꿴 고무줄이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털버덕털버덕, 발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천만다행으로 시시티브이가 작동 중이어서 카운터에 일임했다.
슬리퍼가 바뀌었나 봐요. 내일은 요가수업이 없으니, 월요일에 만나면 되겠죠? 전화 목소리가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요가수업은 월, 수, 금요일만 있었다. 집이 어디에요? 은근히 불쾌해 나도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4차선 한길 건너 쪽의 빌라에 산다고 했다. 가깝네요. 그냥 내일 우리 아파트 앞으로 오세요. 나는 단호하게 혀를 굴리고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현관을 나서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한길 건너오실 수 있죠? 참 당돌했으나 꾹 참으며 침만 꿀꺽 삼키는데, 금세 뒷말이 나왔다. 근데요, 누가 먼저 신고 간 거죠? 센터 전화 받은 사람이 누군데요? 새삼 열이 뻗쳐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횡단보도의 녹색불이 깜박거렸다. 나는 헐레벌떡 횡단보도를 건너 빌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머, 언니! 그녀였다. 뜻밖에 그녀가 유모차를 앞세우고 걸어오면서 흔연스레 활짝 웃었다. 그녀의 발은 내 감색 슬리퍼 안에 살포시 얹혀 있었다. 언니일 줄 몰랐는데, 미안해요. 어제 준이가 열나고 설사한다고 놀이방 전화를 받다가… 정신이 없어……. 그녀는 전화 목소리를 잊을 만큼 아주 사분사분했다. 준이가 나를 쳐다보며 방실거렸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굽혀 아이의 뽀얀 볼을 쓰다듬었다. 준이는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힘 있게 잡아당기며 까르륵 웃었다. 준이의 볼에 내 뺨을 비비댔다. 넘 귀여워. 자긴 정말 행복하겠다. 우리 준이 많이 컸죠? 나는 내 볼에 닿았던 말랑한 볼의 감촉과 달콤한 아이 냄새에 취한 채, 멈칫멈칫 돌아섰다. 집에 와서야 알았다. 슬리퍼를 바꿔 신지 않았다는 것을.
이틀이 지난 월요일, 그녀는 요가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귀엽게 웃던 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요일엔 나오겠지. 수요일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감감했다. 뭐 그 따위가 다 있어? 상습범이라면서요? 비주얼이 좋으면 뭐해? 탈의실 거울 앞에서 여자들이 수다를 떨었다. 이번엔 핏플랍이지만 옛날엔 부츠였다구. 겨울이었으니깐……. ‘핏플랍’이라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안이 벙벙했다. 머리가 쭈뼛거리고 종아리가 떨렸다. 나는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곧장 탈의실에서 나왔다. 까마득한 시절의 한때가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초록 바람이 살랑거리는 5월, 어버이날 하루 전이었다. 나는 등굣길에 그 동안 모은 용돈 3만원을 챙겼다. 중학생에게 3만원은 거금이었다. 아파트상가에 점 찍어놓은 어머니의 분홍색 지갑을 살 셈이었다. 종례시간 직전에야 가방 속 지퍼가 열린 걸 알았다. 대번에 뒷자리의 윤희에게 의심이 갔다. 5교시 체육시간에 어지럽다고 혼자 교실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반 친구 모두가 책상 위에 앉아 눈을 꼭 감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참지 못할 때가 있다. 순간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한 손만 들면 선생님만 알고 있겠다. 선생님이 몇 번이나 간곡히 종용했지만 허사였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모두들 자리를 털고 내려왔다. 나는 여전히 의심에 찬 눈으로 윤희를 흘겨보는데, 그만 윤희가 비틀거렸다. 파르르 떠는 눈꺼풀과 꼭 닫힌 잿빛 입술. 혹 연기하는 거 아냐? 나는 선생님의 등에 업힌 윤희를 차갑게 외면했다. 며칠 뒤에 윤희는 아주 말짱한 얼굴로 나타났다. 심장 판막증이라고 아이들이 수군댔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이따금 창백한 윤희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마다 궁금증으로 애가 탔다. 윤희가 범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금요일에야 슬리퍼가 든 종이가방을 들고 나왔다. 괜히 뒷목이 따가웠다. 오늘도 준이는 놀이방에 갔겠네? 이상하게 내 목소리가 잦아들어갔다. 그럼요. 언니는 아이를 정말 예뻐하는 것 같아요. 언니 애는 몇 살이에요? 사생활이야.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어딘가 좀 달라보였다. 드문드문 요가반에 나오는 것도 그렇지만, 늘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나는 일부러 무관심하려고 애썼다. 자꾸 사람들이 빈정거리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무채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괜히 마음이 착잡해지는데, 문득 준이의 모습이 감치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오늘은 요가반에 나오려나? 준이를 데리고 ‘어게인’에 놀러오라고 할까? 생각에 빠져 드는데, 첼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비발디의 첼로소나타 E단조, 컬러링 사운드였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무정이 마치 한 집에 살 때처럼 굴었다. 슬리퍼 선물 후에 이따금 안부 전화를 했으나 밥을 먹자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무정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께끄름했다. 시쳇말로 나는 쿨한 여자가 아니었다. ‘어게인’을 핑계로 단칼에 거절했다. 당신, 나 잘 알잖아? 나 좀 봐 주라. 무정답지 않게 물고 늘어졌다. 그랬다. 무정은 절대로 조급하게 군 적이 없었다. 지나치게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인도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진한 카레 냄새가 훅 끼쳤다. 우리는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구석진 테이블에 마주앉아 카레 밥을 주문했다. 무정이 의외로 초췌해 보였다. 무정은 내가 아주 좋아 보인다며 소리 없이 웃는데, 그 웃음이 이상하게 울음으로 다가왔다.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카레접시를 물리고 홍차로 입을 헹군 무정이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무슨 일 있구나. 그렇지? 나는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애 엄마가 유방암이야. 이미 뼈와 간까지 다 전이된 상태라… 6개월 남았다는데…… 무정은 찻잔을 움켜쥔 채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꺾었다. 아이는? 아이는 누가 돌보는데? 어머니가 와 계셔. 그 사람이 아이와 안 떨어지려고 해. 어렴풋이 슬리퍼에 대한 의구심이 풀리면서 불쾌감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내 안쓰러움에 가슴이 죄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그리 빨리 간대? 누가 내 준 자리인데……. 알콩달콩 오래오래 지켜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기어이 되는 대로 마구 쏟아냈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허둥지둥 휘트니스 클럽으로 달렸다. 지금도 여기에 나온다대? 참 뻔뻔해. 도대체 어떤 여자예요? 슬리퍼에, 부츠에……. 부츠 사건 땐 시시티브이가 없었다면서요? 바삐 요가복으로 갈아입던 나는 짐짓 못 들은 척했다. 락커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얼핏 그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요가복을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열다섯 살 윤희의 파르스름한 얼굴이 겹쳤다. 그녀가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우물쭈물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다음 요가 시간부터 그녀는 종적을 감추고, 나는 차일피일하다가 열흘쯤 지나서야 겨우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 샘으로…… 똑같은 멘트만 계속 흘러나왔다. 한 달이 훌쩍 지난 날,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그녀가 준이의 손을 잡고 ‘어게인’의 유리문 밖에 서 있었다. 언니는 내 맘 잘 알죠? 부츠는 전혀 모르는 얘기에요. 그럼, 다 알지. 잠깐 들어와서 차 한 잔 하자. 담에요, 언니. 머리가 좀 아파서…… 그냥 언니 한번 보고 싶어서……. 그녀가 투명비닐 우산을 펼쳤다. 투명우산 안에서 준이가 아장아장 걸어갔다. 나는 모자가 가물가물할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괜히 가슴이 찡했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찬바람이 불었다. 걸음걸음마다 플라타너스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어젯밤 우리 빌라에 119 구급차가 출동하고 난리였어요. 깜찍하게 생긴 애기 엄마가 들것에 실려 갔다니까요. 아, 그 여자? 슬리퍼를 신고 갔던? 요가반 회원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잔잔한 컬러링이 울려 퍼진다. 선우가 ‘어게인’에서 나를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했다. 벌써 1시 20분이다. 현관으로 달려가 부랴부랴 거울 앞에 서는데, 그녀가 나보다 먼저 와 서 있다. 맨발이다. 미안해요, 언니…….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문득 그녀에게 내 감색 슬리퍼를 신겨주고 싶다. 신발장을 열어젖힌다. 그런데 신발장 그 어디에도 슬리퍼가 보이지 않는다. 슬리퍼가 없다. 마치 그날처럼.
나는 우산도 없이, 머플러도 두르지 않고 ‘어게인’으로 향한다. 함박눈을 머리에 이고 잰걸음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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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음습하다. 대낮인데도 울창한 수목이 빛을 차단시키고 있다. 한 발 한 발 나아갈수록 가시덤불과 칡넝쿨이 더욱 더 무성하다. 고개를 수그려도 얼굴을 사정없이 할퀸다. 설상가상으로 지면은 거친 풀도 모자라 질척거린다. 도대체 지금 여기가 어디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쩌다가, 언제부터 밀림 속을 헤매고 있는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캄캄하다. 기억 속의 나는 분명히 남색 반바지와 흰 면티에 새 런닝화를 신고 산책 중이었다. 지금처럼 헐렁한 추리닝을 입지 않았다. 아, 기억에 문제가 있다. 운동화가 아니라 핏플랍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를 내려다보다가 공원의 조깅코스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뭔가가 좀 이상야릇하다. 슬리퍼라니? 그녀가 떠나던 날, 아무리 찾아도 슬리퍼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키기 시작한다. 털썩 주저앉는다. 풀 속에 파묻힌 발등이 훤히 드러난다. 맨발이다. 운동화도 슬리퍼도 다 착각이었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숨이 가빠온다. 어서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황급히 일어나 탈출구를 찾아 눈을 번득인다. 그만 균형을 잃고 거꾸러진다. 문득 눈이 부시다. 저 멀리 귀퉁이에서 한 점 빛이 터진다. 눈을 번쩍 뜬다. 새벽 4시, 아직 어둑새벽이다. 한 시간 정도 그루잠에 떨어져 있었다.
현실이 낯설다. 나는 아직도 밀림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장면 장면이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로 나를 붙든다. 낯선 여자, 벌레보다 더 끔찍하게 싫은 무정의 아내도 간당간당한 생명 줄로 악착같이 나를 붙들고 매달렸다.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혹 그 여자에게 큰일이라도? 나는 벌떡 일어나 휴대폰의 액정을 재바르게 터치한다. 새로 들어온 메시지는 없다.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무정이 침묵할 리가 없다. 아니다. 침묵할 확률이 백 퍼센트다.
나는 결국 무정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게인’의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무정이 불쑥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어. 시르죽은 목소리였다. 부수수한 머리, 축 쳐진 어깨, 초조하고 불안정한 눈동자……. 내 마음이 종작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정의 행복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바람인가. 정말 면목 없지만…… 가는 사람 소원이라니……. 제발, 단 한 번이면 돼. 와줄 수 있지? 무정은 가여울 정도로 위축되어 사뭇 애원조였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행여 마음 바뀌면 꼭 연락해 줘. 휘적휘적 걸어가는 무정의 등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앞세워 무정을 앗아간 요물의 소원이라고? 짠한 마음보다는 분노의 앙금이 더 유효했다. 하지만 하루도 채 버티지 못하고 나는 무정에게 전화했다.
일주일 전에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 다녀왔다. 오후 2시의 햇살은 시신처럼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을 쉴 새 없이 건드렸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여자가 눈을 깜박거렸다. 여자의 희미한 눈망울에서 습기가 번져났다. 염치없는 줄 알지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녀는 울먹이다 못해 잔약한 울음소리를 토했다. 언니, 은아를 부탁해요. 여자는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너무나 익숙한 돌출한 이마와 올라간 눈꼬리……. 은아는 자잘한 하얀 이를 보이며 상큼하게 웃었다. 걱정 말아요. 나는 여자의 앙상한 손을 잡으면서도 그 한 마디를 내뱉지 못해 쩔쩔맸다. 병실에서 나오자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여자를 평온하게 해주어야 했다. 여자도 꿈속의 나처럼 공포와 두려움의 늪에 빠져 있었을 터다. 꿈은 현실의 연장선상에 놓인 가상의 세계다. 밀림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 역시 꿈이면서도 현실이다. 나를 구원해 줄 그 빛은 누구일까. 영은일까, 그녀의 아이 준이일까.
‘어게인’에 가는 길이었다. 매서운 꽃샘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는데, 물방울이 툭 이마를 건드렸다. 몇 발짝이나 뗐을까. 타다닥 타다닥, 빗방울이 요란하게 땅에 떨어져 굴렀다. 아니 빗방울이 아니라 우박이었다. 목에 두른 머플러로 머리를 감싸고 정신없이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어게인’에 들어서는데 영은의 전화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떠올랐다. 흠칫 놀랐으나 실은 내가 앞선 발신자였다. 식탁에서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메뉴는 올리브기름과 발사믹식초를 바른 호밀식빵 세 조각과 시럽을 생략한 카페라떼 한 잔이었다. 무정과의 식탁에서는 아침 메뉴였다. 결혼 4주년 기념 여행지는 스페인이었고, 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스페인 풍을 즐겼다. 아무튼 나는 카페라떼를 홀짝이다가 그녀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고구마라떼를 떠올렸다. 그리고 준이가 보고 싶었다. 나는 대뜸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발신음이 예닐곱 번 울리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그때의 나처럼 누군가가 발신음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긴장감으로 혀가 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준이 아빠인데…… 며칠 전에 전화하셨죠? 아, 저…… 저는 준이 엄마 아는 사람인데요. 알고 있습니다. 여기 하연언니라고 저장해놓았네요. 준이, 준이가 궁금해서……. 나는 다행히 준이를 들먹이면서 어색한 통화를 마쳤다.
그 동안 준이 아빠와 네 번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다. 상가가 문을 닫지 않은 날은 선우에게 사정사정해 겨우 시간을 냈다. 깐깐한 무정과는 달리 첫인상이 무던하고 소탈해 보였다. 호리호리한 키에 앞머리를 내리고, 철 지난 패딩 점퍼에 후줄근한 면바지 차림이었다. 내가 먼저 슬리퍼 얘기를 꺼냈다. 그는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생도둑이 되었다면서요?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 오죽 했으면 자다가 가위에도 눌리고……. 그 여자들, 완전 막가파 아닙니까? 나는 그만 움찔했다. 무엇보다도 스트레스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죽음에 내가 연결될 수도? 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아마 저를 제일 원망했을 거예요. 무슨 말씀을……. 준이를 아주 귀여워한다면서 되레 많이 의지하는 눈치였죠. 그런 말을 했어요? 그가 씩 웃으며 비로소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준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칼릴 지브란의 말을 웅얼거렸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무정이 밑줄을 그어둔 문장이었다. 나는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준이를 탐내곤 했다. 내게도 그런 아이가 있다면……. 부질없는 소유의 갈망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이는 어때요? 돌봐주는 아줌마도 오고 놀이방에도 가고…… 요즘은 그런 대로 잘 놉니다. 준이가 있어 우리는 버성기지 않고 술술 대화를 나누었다. 지지난주에는 ‘어게인’에서 준이와도 만났다. 첫눈에 준이의 먼지투성이 운동화가 눈을 찔렀다. 준이는 볼이 통통한 예전의 준이가 아니었다. 부쩍 크기도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꾀죄죄하고 풀 죽은 모습이었다. 한바탕 놀이터에서 뒹굴었더니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준이 아빠는 늘어난 준이의 티셔츠 목을 끌어올리며 계면쩍게 웃었다. 준이 안녕? 내 눈 속으로 준이의 까만 눈망울이 들어왔다. 준이 뒤 벽면에 부착된 브로마이드 보이그룹 멤버들이 양팔을 치켜들고 팔짝 뛰어올랐다. 나도 양팔을 벌리고 허리를 구부렸다. 준이 방긋 웃으며 선뜻 내 품에 안겼다. 달콤한 살내음에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눈꺼풀이 여전히 묵지근하고 온몸이 나른하다. 아직도 비비 꼬인 밀림의 나뭇가지들이 잔상으로 남아 흔들거린다. 거실의 블라인드를 열어젖힌다. 초여름 아침 햇살이 베란다에 넘쳐난다. 요즘 일조량이 부쩍 늘었다. 식물들에겐 최상의 계절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화원에 들러 각자 좋아하는 식물을 골랐다. 나는 선뜻 다육이 제라늄 장미허브 애플허브를 끌어안고, 무정은 무늬낑깡나무 소철 아로니아 백양금을 선택했다. 한번 잘 키워보자. 취향의 문제겠지만, 바닥에 딱 달라붙은 꼬맹이들보다는 열매 맺는 나무들이 좋아질 거야. 열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나친 비약일는지 몰라도 아이를 부정하는, 무정답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말이었다. 어쨌든 키 큰 나무들과 작은 화초들은 제법 조화를 이루며 물과 햇빛만으로도 잘 자랐다. 그런데 무정이 떠난 언젠가부터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 무늬낑깡나무의 잎이 시들시들 늘어지고, 백양금 잎이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제라늄은 뿌리가 썩어 뽑혔다. 나는 가만히 쭈그려 앉아 애플허브를 쓸어본다. 허브향이 손을 타고 슬며시 올라온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허브향에 묻혀 스러진다면……. 나는 허브향이 밴 손으로 조심스레 요가가방을 들어올린다.
생각을 버리세요. 생각을 다 지워야만 몸이 릴렉스됩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개울물 소리에 강사의 목소리가 스며든다. 이제 물구나무서기로 오늘 시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요가동작의 아버지인 물구나무서기. 나는 무릎을 꿇고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며 정수리를 바닥에 댄다. 코어힘을 잡고 한 발씩 걸어온다. 한 발만 살짝 떼어 중심을 잡은 뒤에 한쪽 다리를 접고 반대쪽 다리를 올린다. 정수리, 골반, 다리가 일직선상에 놓인다. 숨을 들이쉰다. 서서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머리 위로 보이는 바닥,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돌연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뒷목이 조인다. 너무 버겁다. 고통 없는 삶을 원해요? 그런 밍밍한 삶이 좋아요? 고통 없는 삶이 행복할까요? 이혼한 뒤, 방송국에서 ‘행복한 인생’이라는 강의를 들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소리였다. 미래의 삶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처럼 힘든 때였다. 아차, 거꾸로 들린 내 몸이 요가매트로 풀썩 떨어져 버린다. 나는 천천히 아기 자세로 들어가 숨을 고른다. 시나브로 호흡이 편안해진다. 언제쯤이나 능수능란하게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을까.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도 즐기고 싶다. 난데없이 무정이 아른거린다. 내가 왜 당신 아이를 맡아야 하는데? 잠꼬대 좀 그만 해! 나는 여자에게 차마 못한 말을 무정에게 퍼부었다. 그때처럼 무정이 멍하니 서 있다. 빛바랜 티셔츠를 입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어 있다. 다시 끽연을 하는 무정이 낯설기만 하다.
현관에 들어선다. 신발이 꽤 많이 널려 있어 좁은 현관이 더 비좁아 보인다. 일단 요가가방을 거실에 내려놓고 신발장을 열어젖힌다. 맨 위 칸에서 운동화 상자를 꺼낸다. 목이 올라오고 벨크로가 부착된 운동화를 넣어두면 될 성싶다. 상자 뚜껑을 연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색 핏플랍 슬리퍼다. 나도 모르게 슬리퍼를 신고서 제자리걸음을 해 본다.
모든 기억이 다 새롭다. 기억의 시·공간이 가까운 듯 멀기도 하고, 먼 듯 가깝게도 느껴진다. 아니 아리송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찌 된 것이지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조율해야만 하는가. 무정이 선물한 슬리퍼가 왜 영은에게까지 가 닿았을까. 슬리퍼를 신고 가지런히 두 발을 모은 그녀가 새삼 그립다.
*김경 1997년 단편소설 「자유공원」을 《신세대문학》에 이문구 선생이 추천. 2000년 단편소설 「얼음벌레」로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중편소설 「게임, 그림자 사랑』으로 제 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소설집 『다시 그 자리』로 제 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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