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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동화/신진/공중에 남은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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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93회 작성일 19-06-2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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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동화/신진/공중에 남은 발자국


공중에 남은 발자국


신진



바로 그 노인이었다, 망원경이 달린 사냥총을 든 노인은.
지난여름 할아버지와 함께 간 읍내 이발소에서 만났지. 마른 체격에 키가 자그마하고, 수박 반쪽을 엎어놓은 듯 아랫배가 볼록한 노인, 눈은 흐리멍덩 초점이 분명치 않았고 ‘올해는 멧돼지를 열네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며 투덜거리던 노인. 노루는 재수가 없어서 안 잡고, 산토끼는 총알이 아까워서 안 잡는다면서 농작물을 해치는 멧돼지만 잡는다고 나긋나긋 점잖을 떨던 그 노인.


누군가가,
“아무데서나 허가 없이 사냥을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까,
“내 총은 소리가 나지 않아. 그러니 짐승 잡으러 다녀도 되지.”
혼잣말인 듯 되양되양하게 받아넘기던 노인.


‘그 멧돼지들 잡아서 다 어떻게 했느냐, 팔았느냐?’ 하니까, ‘팔긴 뭘 팔아, 좋은 말이나 듣고 살려고, 멧돼지 고기 먹어보고 싶다던 감물골 아무개한테 한 마리, 그 사돈이 몸 아프다 해서 또 한 마리 주고 했다’고 표정 없이 말하던 노인, ‘우리 읍내에는 멧돼지가 없어서 읍내에서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가던 노인.

그가 이발소에서 나가자 남아있던 사람들이,


“읍내에 멧돼지가 없긴 왜 없어? 지가 하도 죽여 대니 돼지들이 깊은 산으로 피난 간 거지.”
“멧돼지 잡아서 간 따로 쓸개 따로 팔아먹으면서 누구에게 그냥 주긴 뭘 그냥 줘?”
“귀신이야 귀신, 안 잡는 짐승이 없던 걸. 산토끼가 아니라 비둘기, 참새까지 잡던 걸.”
같잖다는 듯 뒷말을 해대던 노인, 바로 그 사냥꾼 노인을 아빠와 함께 걷던, 할아버지 집 뒷산에서 딱 마주쳤던 것이었다.
노인은 두 손에 장총을 들고, 등산 스틱을 든 건장한 아저씨 한 사람과 함께 산 속을 왔다갔다 헤집고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채.


내가 처음부터 그 노인을 알아본 건 아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아니, 총을 들고 여기 웬일입니까? 수렵 금지구역인데.”
아빠가 공손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며 막아서자, 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같이 온 아저씨와 눈 맞추기만 하고 있었다.
아빠는 한 번 더 나섰다.
“여기 고라니 사는 거, 그거 잡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고라니는 무슨? 멧돼지가 농작물을 해친다 해서…… 멧돼지를 잡으려고…….”


되양되양하게 말하는 음성,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아차, 바로 그 노인이다, 올해 멧돼지를 열네 마리나 잡았다 하던…….’ 하면서 노인의 봉긋 나온 배와 빨그레한 눈빛을 확인했어. 이발소에서 만난 바로 그 사냥꾼 노인이었던 거야.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겁이 났다. 별로 좋지 않게 생각되던 노인이 총을 든 채, 건장한 아저씨를 데리고 나타났으니까, 겁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대번에 아빠 편을 들고 대번에 나설 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빠를 말리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할까? 어쨌든 우리 아빠는 쉽게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멧돼지가 나타나긴 어디 나타났답니까? 이 산엔 요새 멧돼지 없어요. 지금은 멧돼지가 해칠 농작물도 없고요. 대체 누가 멧돼지가 작물을 해친다 했어요?”
“ …….”


노인은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총구를 앞세운 채 우리 둘 사이를 유유히 뚫고 나가면서 같이 온 아저씨더러 딴청을 부렸다.
“요게 어디로 갔을까? 위에 없었다? 저리 가보자.”


우리에게 공연한 간섭일랑 말고 가버리라는 말투였다.
아빠와 나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산길을 빠져나왔다.
산길 끝에는 낡은 지프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사냥꾼 일행이 타고 온 차임에 분명했다. 범퍼가 우글쭈글 찌그러져 있었고, 몸채에는 군데군데 패이고 긁힌 데가 있었다, 산길에서 짐승들을 들이받기라도 한 듯이.


“처음 보는 차지? 저 사냥꾼이 타고 온 차인가 봐.”

아빠는 휴대폰으로 지프차 앞뒤의 사진을 찍어두었다.
아무래도 아빠의 예감이 맞을 것 같았다. 요즘 여기에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 사냥꾼 노인이 멧돼지를 잡으러 왔다는 건 둘러댄 말임에 분명했다. 그들이 노린 건 우리 고라니가 분명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정신이 아찔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고라니라면 그건 십중팔구 우리 고라니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집 주변에는 우리 식구처럼 돌아다니는 암 고라니가 한 마리 있었다. 삼 년 전 이른 봄, 부모를 잃은 듯한 아기 고라니 한 마리가 기진맥진해서 뒤란에서 맴도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놓아두고 잠잘 곳을 보아주며 키우다시피 한 녀석이다. 녀석이 건강을 찾았을 땐 우리 하얀 진도개 금강이도 어릴 때여서 둘이는 술래잡기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속을 뛰어다니곤 했어.


그 고라니가 뻐드렁니가 예쁜 숙녀로 자랐고, 작년 겨울에는 긴 송곳니에 털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할아버지 집 마당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마을에서 할아버지 집으로 오르는 언덕이나 건너편 골짜기 풀덤불 옆을 지날 때면 고라니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날씬한 허리선을 벋치며 몸매를 뽐내었다. 겅중겅중 뛰다가는 중간 중간 멈추어 서서 우리에게 예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쫓아가는 시늉을 하면 체조선수처럼 한껏 높이 뛰었다. 쩌엉! 긴 다리를 공중에 펼칠 때의 모습은 올림픽 선수가 도약할 때나 종다리가 공중으로 쫑긋 솟구칠 때와 같이 감탄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아침이면 가끔 할아버지 채소 밭섶에 선명하게 남겨진 고라니 발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 모양은 포스트잇 중에 제일 작은 책갈피용 두 개 씩을 가지런히 눌러놓은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 두 개를 나란히 내려놓은 것 같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아무도 고라니 발자국을 지우진 않았다. 그건 아주 먼 데서 누군가가 보낸 뜻밖의 선물처럼 정답고 반가운 것이었기 때문일 거다. 바람이 지우는지 별빛이 지우는지 고라니 발자국은 저절로 지워지곤 했다.


사냥꾼들은 이 골짜기에 고라니가 붙어산다는 말을 듣고, 잡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고라니 걱정에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다음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아빠와 함께 집 주변 산길을 둘러보았다.


근데 고라니에겐 자기가 다니던 길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다. 녀석이 다니는 길이며 쉬는 장소를 우리 가족은 대강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다니던 밭두렁에서도 개울가 흙바닥에서도 녀석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쉬는 풀덤불, 몸을 말릴만한 작은 언덕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가자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오후가 되고 할아버지 집에서 주말을 보낸 우리 식구가 시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꾸이이-, 꾸이이-.”
고라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고라니 소리가 나요! ”


아빠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마당 끝으로 뛰어나가 집 옆 언덕을 바라보았다. 직감한 대로 우리 고라니는 아니었다. 아마 남자친구, 숫고라니인 모양이었다. 저만치 떨어진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부르짖고 있었다. 꾸이잇 꾸이잇, 암고라니를 찾는 소리 같았다.


다음주 토요일 오전, 할아버지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고라니 발자국을 찾아다녔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죽기야 하려고. 작년에도 한동안 안 보이다가 나타난 적이 있었으니 기다려 보렴. 기다리고 있으면 나타날 거야.”
어른들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답답해서 진도개 금강이한테로 갔다.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어주다가 오랜만에 목줄을 끌러주었다. 줄을 끌러줄 때면 그렇듯 금강이는 흰 털을 날리며 산기슭을 힘껏 가로질러 달린다.
“더 달려, 더 달려!”


나는 예전처럼 금강이의 달리기를 응원하면서도 우리 고라니에 대한 기대를 버리진 않았다.
한 10분 쯤 지났을까? 묶을 때가 되어 금강이를 불렀지만 어디로 갔는지 녀석이 보이질 않았다. 아빠까지 밖으로 나와 이름을 불러대니 비로소 언덕 아래쪽에서,
“옹! 옹!”


금강이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냉큼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뭐해? 인마.”
하며 아빠와 함께 가보았다.


금강이는 긴 고깃덩이 같은 걸 입에 물고 있었다. 고깃덩이 한쪽이 땅에 질질 끌릴 지경이었다.
“고라니 다리다!”


아빠의 나직한 외침과 함께 부서지고 구겨진 채 땅바닥에 버려진 고라니의 반쯤 남은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안아주거나 쓰다듬어줄 수도 없었다. 배속의 똥이 흘러서인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반쪽만 남은 우리 고라니는 이미 상한 고기 덩어리 한 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날, 그 사냥꾼은 우리 고라니에게 치명적인 총상을 입히긴 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갔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총상 입은 고라니를 찾는 중에 아빠와 나를 만났고, 그 뒤 고라니 찾기를 포기하고 가버린 거였다.


“다리는 총에 맞아 부러지고 내장은 다른 짐승이 물어간 모양이구나.”


숨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고양이나 족제비 같은 것들이 고라니의 내장을 파먹은 것 같다는 아빠의 설명에 내 눈과 귀가 까맣게 멀어버리는 듯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어떤 해결책도 없는 것일까?


“아빠, 휴대폰에 지프차 사진 있잖아, 그 사람들 벌 받게 할 수 없어?”
“차 사진 찍었다고 어디 고발이 되겠니? 그땐 어쩔 바를 몰라서 사진이라도 찍어두었다만…….”
“아빠,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라니를 신성하게 여겨서 잡아먹지 않는다며?”
“ …….”
“고라니를 죽이면 불행해진다고 아빠가 그랬잖아?”
“ …….”


나는 괜히 죄 없는 아빠를 들볶았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고라니의 시체를 들고 감나무 밭 한 귀퉁이에 내려놓았다. 죽은 고라니의 퀭한 눈과 내 눈이 마주치자  고라니의 마지막 몸부림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했다. 죄를 지은 듯 머리가 숙여졌다.
아빠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한참동안 구덩이를 팠고, 고라니를 묻었다. 아빠가 삽질을 마친 후엔 내가 삽을 받아들고, 흙을 더 얹어서 골라주었다,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길고 가녀린 다리로 껑충껑충 뛰다가는 갑자기 돌아서서 호기심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물끄러미 되돌아보던 모습, 금강이와 함께 하양 노랑 털빛 반짝거리며 산속을 뛰어다니던 고라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애초에 녀석의 어미도 그 사냥꾼에게 죽었고, 녀석만 살아남아서 생명을 건진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를 믿고 가족처럼 살던 녀석 역시 그 사냥꾼에게 당하고 만 것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꾸이잇 꾸이잇, 숫고라니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후로 우리 고라니의 발자국은 공중에 박힌 문신처럼 내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테트리스 게임을 할 때, 눈을 감고 누워도 블록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경험, 고라니가 남긴 발자국은 그렇게 삼삼했지만 그것과는 비할 수 없으리만치 우아한 모습이었다. 공중에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은 그 발이 다니던 숲이며 바위, 오솔길이며 골짜기, 실개천을 함께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움이란 이런 것일까? 산마을의 아침 공기나 숲 냄새와 같이, 언제나 맑은 기운을 공중에 띄워 보내주는 편지 같기도 했다. 그렁그렁 눈물 맺히게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했고.





*신 진 1976년 《시문학》 추천완료. 1984년 《세계의 문학》으로 2차 등단. 시집 『멀리뛰기』 등 8권, 논저로『한국시의 이론』등 9권. 창작동화 『낙타가시꽃의 탈출』, 에세이집 『촌놈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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