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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박윤영/어른이 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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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박윤영/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장이지, 『레몬옐로』(문학동네, 2018)
박윤영
‘자라다’라는 말은 흐르는 강물이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하나의 고정된 방향성을 지닌다. 그것은 결코 역류하지 않는 강물이나 후진하지 않는 기차처럼, “하늘”의 푸른빛을 향해 그저 올곧게 나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라는 동안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장이지의 시집 『레몬옐로』는 성장을 테마로 한 시편들을 담고 있지만, ‘돌아봄’으로써 가능한 어른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작 『라플란드 우체국』에서도 “편지”를 매개로 유년의 자신과 마주했던 장이지는 신작 시집 『레몬옐로』에서도 흘러가 버린 강물의 자리를 더듬고, 스쳐지나온 풍경을 떠올리는 일에 골몰한다. 시인이 이토록 돌이켜 붙잡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정규직 선생으로 꽤나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는 스스로를 “정규직 미아”(「전전轉轉」)로, 또 “서툰 어른”(「중경삼림重慶森林」)으로 규정하며 “하잘것없는” 중년의 나날들에 대해 “어머니,/인생이 원래 이런 거예요?”라고 자조적인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미인」) 이 내면의 불가해한 혼란은 “몸은 사라지려 하”고(「자해-유령」), “뱀 같은 것이 턱관절을 열고/죽어버린 마음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자아 상실의 공포로까지 이어지는데,(「대니 보이」) “도대체 나는 어느 뒷골목에서 비명횡사했는가.”(「인형은 웃는다-놀이공원」)라는 구절에 이르면 시인은 그만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에 수록된 「유령」과 「플랫」 연작은 시인이 느끼는 왜소감과 무력감을 강박적이리만큼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시인은 시집 말미의 ‘LINK(링크)’에서 「플랫」 연작에 대해 “웹 공간을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이런저런 사회문제로 화제의 폭이 넓어졌”다며 그 창작 과정을 소상히 밝힌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암시」나 「유리벽」처럼, ‘오대양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을 시화한 작품도 있지만, 사실, 이 연작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이를 테면, ‘웹 공간’과 같은 하나의 거대한 ‘차원’인 플랫이 우리의 사고를 간섭하고 그 자신의 꿈으로 우리를 구성해 내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불안과 거부에 있다. “모르는 사이에/인간은/플랫에 봉사한다.”(「군대이야기-플랫」)라거나 “열두 명의 장로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면 간섭을 한다.”(「암시-플랫」), 또, “나는 모든 것이 내 내면을 침범한다고, 나는 관통당한 사람이라고 읍소한다.”(「관통당한 사람-플랫」) 등의 구절이 암시하듯, 플랫은 곳곳에 흩어져 존재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에 개입하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소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 자체를 은유한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어쩌면 시나브로 이러한 플랫에 최적화 되어 가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장과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래의 ‘나’를 잃고 “꼭두각시”나 “구체 관절 인형”으로 전락하여 결국은 플랫의 요구에 철저하게 순응하게 되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플랫」 연작에 나타난 시인의 절망과 비관적 현실 인식은 예술가의 섬세한 자의식과 관련하여 한층 심화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 시 「관통당한 사람-플랫」에서 시인은 자신의 사유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가는 사이에 원래의 개성을 잃고 “범용”해져 버렸다며 “중화”에의 압박감을 토로하기도 하고, 표절 시인이 되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심지어, 시인은 「유령」 연작에서 자기를 ‘무화無化’해 스스로를 “유령”이나 “좀비” 같은 흐릿한 존재로 형상화한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기억에 의해 호명된다. 시인은 “내 안에 교대로 어떤 아이들이 출몰”(「십이면상十二面相-유령」)하고 있다고 말한다. “출몰”이라는 시어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불쑥 떠올랐다가 곧 흐릿해지는 ‘기억’과 닮아 있다. 가령, ‘나’는 수유리 모텔에서 하룻밤 사랑을 나눴던 여자애를 떠올리기도 하고(「수유리 흰 달」), 샤워를 하다 말고 스스로 삶을 등진 친구의 쓸쓸한 생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어느 날 치모」) 아니면, 더 거슬러 올라가 “얻어터지고 돈을 뜯기기 일쑤”였던 “좀비”(「카스트」) 같은 어떤 아이를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은 불량하기도 하고, 이따금 따뜻하기도 하며, 때때로 측은하기도 한 그 아이는 누구인가. 기억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과 맞붙어 있으므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 그 아이들은 시인이 관통해 낸 시간의 조각들이자, 시인 그 자체일 것이다.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들은 저마다의 색色으로 형형熒熒하다. 이와 달리, “아직 일을 갖고 있는” 우리는 “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인생들”(「밤의 세계관」)일 뿐이다. 어른의 삶이란, 그저 “바랜 꿈의 조각”(「수유리 흰 달」)이나 붙들고 점점 흐릿해 지는 일이리라. 시인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서 선연하면서도 아스라한 무엇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은 시 속에서 “산딸나무 흰 이마”, “초하初夏의 하늘”, “흰 별”, “양털 옷”, “면사포”(「시칠리아노-유월」), “코발트블루”(「벽공무한碧空無限」), “라이터의 자그마한 불빛”(「일회용 라이터」), “하얀 옷”, “하늘”,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노란빛”(「레몬옐로」) 등의 표현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시집 『레몬옐로』에서 시인이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푸른색과 흰색, 노란색의 색채이미지는 순수하고 정한 유년의 꿈이자, 결코 무뎌질 수 없는 시인의 예민한 자의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시 「밤의 세계관」에 영감을 주었던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노래 It's not the spotlight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만약 나에게 빛이 비치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그것이 어떤 기꺼움이 될지 당신에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나는 빛을 느낀 적이 있지만, 그것을 사라지게 했지요. 그러나 나는 언젠가 그 빛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나’를 이끌었던 빛은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흩어져 버렸고, 삶에 동력을 불어 넣었던 꿈은 이미 이룬 지 오래이니 이제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고이 간직한 빛의 기억을 따라 부절히 걸어야 한다. 아마도 그가 지켜 내고 싶었던 것은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일상인으로서의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의 소중한 꿈을 지켜내는 일은 퍽 고단하다. 시인은 과거의 빛을 찾아 방랑하며, 연민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눈길은 늙은 어머니를 비롯하여 무명배우인 동생, 무료한 반려견, 문우文友와 그녀의 아이, 찬비를 맞으며 전도를 하는 노인, 불우한 삶을 살다간 예술가, 4·3사건의 희생자에게까지 두루두루 향한다. 시 「암내」에서 “H형”은 그의 시를 두고 “송곳니는 없고/둥근 어깨가 있다고 알 듯 말 듯한 말을” 건네는데, 이는 장이지의 시가 전력질주로는 쓸 수 없는 돌아봄과 살펴봄의 시학을 동반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의 “둥근 어깨”가 품어낼 시의 빛깔은 더해진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분명 한층 더 따스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1)가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If I ever feel the light again shining down on me, I don't have to tell you what a welcome it will be. I felt the light before but I let it slip away, but I still keep on believing that it'll come back someday.”
*박윤영 201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실천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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