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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정재훈/야생을 향해 그물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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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76회 작성일 19-06-2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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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책·크리틱/정재훈/야생을 향해 그물을 던지다


야생을 향해 그물을 던지다
―윤은한, 『야생의 시간을 사냥하다』


정재훈



시인은 끊임없이 영감에 복종하는 자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인의 영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을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라고 말이다. 이런 파스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결국 시인은 “지향”과 “나아감”, “앞으로의 움직임”에 끊임없이 복종을 해야 하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렇게 움직임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타자로부터 나오는 감정의 유동流動/遊動을 특유의 감각으로 포착하려는 자여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흐름은 순전히 시인의 의지만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의 유동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곳과는 다른 곳이기 때문에 시인은 그곳을 언제라도 지향해야 하고, 나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눈에 비춰진 이곳의 감정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며,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윤은한은 시인으로서, 그리고 시적 영감에 복종하는 자로서 감정의 유동을 포착하려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곳을 벗어나 그가 지향하는 곳은 바로 “야생의 시간”(「카메라」)이 지배하는 낯선 곳이다. 그곳에서 시인의 감각에 의해 붙잡히는 머리맡의 “추억”과 “순수한 애인”은 그저 힘없는 객체, 또는 난폭한 포획의 결과물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이 살고 있는 ‘야생’이라는 세계에서 시인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주체가 아니라, 위태로운 이방인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시인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야생의 세계’인 그곳은 낯선 침묵이 지배하고, 이곳의 모든 소리가 “헛도는” 불가사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갔다 오면 시인은 늘 “집이 좁아서 매일 구토를 하면서”, 야생의 세계에서 건진 그 “아픈 노동을 삭제”할 수밖에 없다. 그가 야생에서 건진 감정은 이곳으로 옮겨진 순간 그 생동감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야생은 시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은한에게 야생은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는 풍족한 곳이다. 그곳은 어디든지 펼쳐져 있는 세계 그 자체임과 동시에, 감정이 살아 숨 쉬는 타자와 끊임없이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곳을 세속의 말로 굳이 바꾸자면, ‘자연’쯤 될 것이다. 시인에게 자연은 ‘집’처럼 좁은 곳이 아니라, 탁 트인 넓은 ‘야생’이다. 그곳을 향하기 위해 “잠들고 있는 그물을 깨운다”는 것은 시인만의 고되고 “아픈 노동”의 일과 중 하나다. 마치 양식을 구하러 배를 타고 바다로 향하는 어부처럼, 시인도 감정에 주린 몸을 이끌고 그물을 깨워 야생으로 향한다. 윤은한의 손에 쥐어진 그물은 그에게 그만큼의 인내와 힘을 요구한다. 물론 “멀미를 시작”(「시가 쓰여지지 않는다」)하기도 하고, “촘촘히 엮어서 던져보지만/영혼 없는 것들만 걸려”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이번에도 그물을 던질 것이다. 시인은 그물을 손에 쥔 채 그곳에 서 있다. 그리고 숨을 죽여 자신의 몸을 미세하게 훑고 지나갈 “얕은 바람”(「낙엽」)을 가만히 기다린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지붕에 사글세 살면서
  행복했다

 

  노란 저고리
  붉은 치마 벗어주고
  빈 가슴으로 내려왔다

 

  님 발자국 소리에
  입술은 마르고
  얕은 바람에도 가슴은
  파도의 뗏목처럼 흔들거렸다

 

  겨울을 노래하면
  깊게 스며들겠지만
  불꽃에 재가 될 수 없어
  입술을 다문 채 봄을 기다린다
  ―「낙엽」 전문


기다리는 자, 가만히 침묵하려는 자가 몸으로 느끼는 흐름은 마치 절기의 운행과도 같은 거대한 질서 그 자체이다. 이 질서 내에 있는 감정의 유동은 자신의 사냥 실력을 과신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마른 입술’과 ‘뗏목처럼 흔들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흐름을 마주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감정(“행복했다”)이 저 멀리 상실 속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으며 그저 받아들인다. 이제는 다시 “빈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오로 “재가 될 수 없어/입술을 다문 채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상실의 무게를 견뎌야 할 혹독한 운명을 비장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거친 운명을 향한 은밀한 반역이자, 변심變心으로서 찬란한 봄을 모의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을 감싼 무겁고 음습한 상실의 습기는 그의 폐부 깊숙한 곳을 향해 “깊게 스며들”어 가면서 그 무게감을 더 배가시킨다. 어느덧 시인은 다시 이곳으로 쫓겨나 황량한 풍경 속에서 “축축한”(「밤비」) 가슴을 부여잡는다.
     
  축축한 몸이 가출을 시작한다
  콘크리트 다리 위로 발바닥이 걸어간다

 

  바바리코트와 안경테로 흘러내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숨은 달을 찾아 나선다

 

  빗물은 검은 그림자를 씻어내며
  새벽을 배달하고 땅속으로 스며든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지는 비가 쏟아지면
  방바닥으로 쓰러져 고독의 몸살을 앓는다

 

  지붕에서 쏟아지는 비애는
  검은 구두에 가득 차서 흘러넘친다

 

  동거부부가 금발의 나신을 걸어두고
  로망스 선율에 긴 포옹으로 눈을 감는다

 

  녹슨 곤로에서 라면이 끓고 있다
  비가 그친 가시나무숲으로 걸어간다
                                    ―「밤비」 전문


상실의 무게로 축축하게 젖은 몸은 다시 세계의 변두리를 배회한다. 이곳의 끝자락에서 이방인이 마주한 풍경은 결코 낯익은 것이 아니다. 주린 감정을 채워 줄 그 무엇도 건질 수 없는 황량한 풍경 속에서 시인의 상실감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결국 “방바닥으로 쓰러져/고독의 몸살을 앓”지만, 시인에게 ‘집’은 아직도 좁기만 하다. 물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가는 것처럼 상실의 습기가 곳곳에 스민 이 황량함 속에서 시인은 그렇게 “축축한 몸”을 이끌고 다시 ‘가출’을 빙자한 ‘고된 사냥’을 나설 것이다. 시인이 향할 야생(“가시나무숲”)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시적 영감의 ‘성소’이자, 감정의 ‘고향’과도 같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제고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숲으로 향할 것이다. 네온사인만 가득한 이곳의 황량한 어둠이 아니라, 무엇인가 몸을 숨긴 채 낮은 숨을 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어둠이 지배하는 곳으로 말이다. 어둠에 적응해 나가는 야생의 눈目처럼, 감정의 유동을 좇을 수 있는 감각은 그곳의 질서에 순응한 자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윤은한은 시인만의 진정한 ‘사냥’이란, 결코 이기심이나 탐욕이 뒤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 이제 다시 사냥할 시간이다.





*정재훈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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