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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고전읽기/권순긍/봉건체제에 대한 풍자 혹은 미화, 『토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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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79회 작성일 19-06-2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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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고전읽기/권순긍/봉건체제에 대한 풍자 혹은 미화, 『토끼전』


봉건체제에 대한 풍자 혹은 미화, 『토끼전』


권순긍



‘동물우화’를 활용한 풍자


『토끼전』은 『토생전』, 『별주부전』, 『퇴별가』, 『별토가』, 『수궁가』 등 자라의 꼬임에 빠져 용궁에 갔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간을 필요로 하는 용왕을 속이고 용궁을 빠져나온 판소리나 고전소설을 두루 일컫는 제목이다. 판소리나 판소리계 소설이면서 동물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동물우화fable’로도 볼 수 있다.


동물우화라 하면 『이솝우화』를 떠올리지만 우리 고전에도 우화소설은 제법 많다. 나이 자랑을 통해 향촌사회의 권력 변동을 다룬 『두껍전』, 조선시대에 다루기 불가능한 과부의 재가문제를 과감하게 거론한 『장끼전』, 남의 재산을 강탈하고도 무사히 풀려나는 (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요즘 특권층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서대주전』 같은 작품이 있다.


왜 동물우화가 필요했을까? 무언가 당시 사회의 잘못된 점을 꼬집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화는 이미 고정된 동물의 형상을 활용하기에 인간의 여러 유형을 정형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뿐더러, 동물에 빗대어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비판, 풍자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을 줄일 수 있다. 왜 나를 욕 하냐고 하면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의 얘기라고 둘러대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풍자가 힘들었던 중세시대에는 권력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동물우화가 많이 사용되곤 했다. 그래서 우화를 일러 ‘약자의 서사’ 혹은 권력자들을 풍자함으로서 권력구조를 뒤집는 ‘전복의 서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런 동물우화를 적절히 활용한 기막힌 현대 작품은 『사상계思想界』 1970년 5월호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일 것이다. (이 시 때문에 그 잡지가 폐간되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당시 나라를 망치는 5명의 도적, 즉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재벌 등을 동물로 빗대어 통렬한 풍자를 가함으로써 군사독재시절 당시 민중들의 삶을 농단하는 권력자들을 공격하는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토끼전』에서도 용왕은 무너져 내리는 봉건체제의 정점에 위치한 이기적인 왕을, 자라는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을 바치나 그 체제에 이용만 당하는 우직한 신하를, 토끼는 죽을 고비를 슬기롭게 벗어나는 지혜로운 민중을 각각 상징한다. 그밖에 용궁의 어전회의御前會議나 산중의 모족회의毛族會議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물들은 조선후기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비록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를 살았던 인물들의 행태를 보여준다. 그 결과 중세시대 어느 작품에서도 이룰 수 없었던, 봉건체제의 모순들을 날카롭게 풍자할 수 있었다.


실상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살고 있는 봉건체제나 이념을 풍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토끼전』이야말로 고전소설 중에서 정치적 비판의 수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작품에서도 다루기 껄끄러운 봉건체제나 이념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풍자가 이뤄지는 작품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토끼야 달려라!


봉건체제와 이념에 대한 신랄한 풍자
우선 봉건체제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용왕이 병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나라 일을 보살피느라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주색酒色에 빠져 “이삼일이 지나도록 실컷 놀아 주었더니” 병이 난 것이다. 게다가 누워서 신음하는 용왕의 모습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병든 용왕의 모습과 행실은 바로 무너져 내리는 봉건체제의 운명과 비슷하다. 봉건통치자가 이런 모습이니 그 체제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다. 우선 봉건이념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충忠’이 여지없이 우스갯거리가 된다.


충忠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데, 병든 용왕을 구하기 위해 토끼를 잡아올 신하를 뽑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공부상서 민어는 대장고래가 마땅하다고 추천하나 고래는 수군이 어찌 육전陸戰을 하겠냐고 반박하고, 간의대부 물치가 표기장군 벌덕게를 추천하나 그는 덕망이 없어 못한다고 하면서, 이부상서 농어, 예부상서 방어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난처해진 용왕은 백의재상白衣宰相 쏘가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스스로 합장군 조개, 적혼공 메기, 도미, 올챙이를 지명하나 모두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응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왕이 직접 지명하는 데도 발뺌을 하고 부당한 이유를 열거한다.


이를테면 용왕이 올챙이는 배불러 경륜을 품었으니 보낼 만하다고 천거하자, 다른 신하들이 올챙이가 개구리 되면 “올챙이 개구리적 일은 알 수 없어”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충신의 덕목들이 현실의 이해관계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풍자의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평시에(땅이나 지위를) 봉封할 제는 모두 충신이나 환란을 당하면 충신 귀하외다.”는 말처럼 봉건시대 지고의 가치였던 충이 그 권위를 잃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용왕조차도 이렇게 한탄했겠는가?


남의 나라에는 충신이 있어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을 살린 개자추介子推, 초나라에 잡혀 왕을 대신해 죽은 기신紀信이도 죽을 인군人君 살렸으니 군신유의君臣有義 중할시고. 슬프다 우리 수국 수많은 고기 중에 충신이 없었으니 이 아니 원통한가.(가람본)


더욱 흥미로운 건 국가대사를 논하고 충성을 들먹이는 조정중신들이 모두가 다 비린내 나는 생선들 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나가면 밥반찬거리와 술안주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러워진다. 하잘 것 없는 생선들이 둘러 앉아 무슨 국가대사를 논하고, 충성을 들먹이는가? 중신들을 비린내 나는 생선들로 형상화 한 것은 조정중신들 모두를 싸잡아 풍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대목을 보자.


동편에 문관 서고 서편에 무관 서서 양반을 구별하여 일시에 들어올 때, 좌승상 거북이, 우승상 잉어, 이부상서 농어, 호부상서 방어, 예부상서 문어, 병부상서 숭어, 형부상서 준치, 공부상서 민어,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물치, 백의재상 쏘가리…… 배부른 올챙이 떼가 품계대로 차례대로 들어와서 주르르 엎드리니, 조관들이 들어오면 ‘의관을 정제한 몸이 어로향에 끌려’서 향내가 날 터인데, 속 뒤집는 비린내가 파시평[갯벌에서 열리는 임시 생선시장] 보다 더하도다.(신재효본)


조정 중신이랍시고 우르르 모여 있는 생선 떼들을 상상해보라. 이 자체가 얼마나 기막힌 풍자인가. 조정 중신들이 실상은 생선인 셈이고, 그러기에 생선 비린내는 바로 썩어빠진 조정에 대한 총체적인 풍자인 셈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시 지배층 내부의 모순이 자세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지배층 내부의 모순은 우선 문무文武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 정황은 공부상서 민어와 대장고래의 대립에서 발단되어 간의대부 물치와 표기장군 벌덕게의 대립으로 다시 반복된다. 용왕도 이 정황을 보고 “불쌍한 호반들이 문반에게 평생 눌려 절치부심切齒腐心하였다가 이런 때를 당하여 큰 싸움이 나겠다.”고 할 정도다.


다음은 세도가인 벌열閥閱들이 등장한다. 작품에서 한림학사 깔따구와 간의대부 물치가 바로 이들이다. 그래서 “한림학사 깔따구는 이부상서 농어의 자식이요, 간의대부 물치는 병부상서 숭어의 자식이라 저의 집 세력으로 구상유취口尙乳臭한 것들이 중요한 벼슬을 하여 일이 되가는 모양도 모르고 방안 장담 저리 한다.”고 공격을 받는다.


잘 알다시피 선조 때부터 시작된 당쟁은 18세기에 이르러 몇 개의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는 이른바 벌열층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이들에 의한 정치의 부패타락은 민중운동의 격화를 초래했고, 이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은 벌열 자체의 권력집약에 의한 세도정치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들이 중요한 지위를 독점함으로써 정권으로부터 많은 선비들을 소외시켜 지배층 내부의 모순을 격화시키기도 했다.


지방통치의 수탈 양상
봉건 이념이나 체제의 모순은 중앙정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지방통치 역시 이와 맞물려 있다. 유독 신재효본에만 나타나 있는 산중 모족회의 장면이 그 단적인 예다. 애초에 산중의 모족회의는 짐승들을 괴롭히는 사냥개를 처치할 방도를 의논하고자 소집된다. 자라는 토끼를 만나고자 그 자리에 참석했다. 사냥개는 중앙정부와 끈이 닿아 있는 지방의 실력자인데, 회의에선 별 뾰족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쥐와 다람쥐가 겨울 날 양식을 강탈당하고 멧돼지는 자식을 산채로 산군 [호랑이]에게 바치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곰의 입을 빌어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수탈의 참상을 이렇게 고발한다.


오늘 우리 모이기는 산 속의 폐단을 없애자 하자더니, 사냥개는 없애려 하되 포수 무서워 할 수 없고, 애잔한 쥐와 다람쥐가 겨울나기로 마련한 양식을 다 빼앗겨 부모처자 굶길 터요, 집안 세력이 부족한 멧돼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보았으니, 지금에 비하면 산군은 수령같고 여우는 간사한 출패사령, 사냥개는 세도아전, 너구리·멧돼지며 쥐와 다람쥐는 굶지 않는 백성이라. 오늘 저녁 또 지내면 여우 눈에 못 보인 놈 무슨 환란을 또 당할 지 그놈의 웃음소리 뼈저려 못 듣겠네.(신재효본 <퇴별가>)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수령이나 아전들의 수탈이 얼마나 극심했나를 『토끼전』은 분명히 증거한다. 조선 후기 이른바 ‘중층적 수탈구조’라 하여 백성들이 수령과 아전들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를테면 나라에 내야할 조세가 10석이라면 수령이 3석을 더하여 13석으로 거둬들이게 했고, 여기에 아전들이 다시 2석을 추가해 모두 15석을 거둬들였던 것이니 민중들은 수령과 아전들에게 이중의 수탈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 실상을 산중모족회의를 통해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대목을 강조했던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전북 고창지방의 대표적인 아전이었다. 그 스스로도 일종의 가해자였을 텐데 자신이 속한 계급조차 냉혹하게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인식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알 수 있다.


『토끼전』의 다양한 결말, 봉건체제에 대한 입장
『토끼전』은 이처럼 봉건체제와 이념을 전면적으로 문제 삼았다고 하겠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누구나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다양한 편차를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토끼전』의 결말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기에 여느 작품과 달리 『토끼전』은 이본에 따라 다양한 결말이 존재한다.


우선 봉건체제를 지지하거나 미화하는 입장이다. 경판본 『토생전』은 토끼를 놓친 자라가 “간특한 토끼에게 속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왕을 보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유서를 써 바위에 붙이고 장렬하게 자결하며, 용왕도 “인명은 재천이라”하여 “망령되게 도사의 말을 듣고 저렇듯 하였다가 토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하늘의 뜻을 모르고 조그만 토끼를 원함이 어찌 어리석음이 아니리오.”라며 의연하게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는다. 충성스러운 자라의 희생으로 인하여 봉건체제의 명분과 이념이 그대로 유지되는 입장이다. 더욱이 공적 출판의 성격을 갖는, 목판으로 인쇄된 ‘방각본坊刻本’이기 때문에 당시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에 출간된 이해조의 『토의간』(<매일신보> 1912. 6. 9.~7. 11. 연재/박문서관, 1916년)이나 『별주부전』(신구서림, 1913년)에 오면 오히려 봉건체제나 이념을 미화하고 자라의 충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해조의 『토의간』은 일단 토끼는 도망가지만 자라는 할 일 없어 빈손으로 수궁으로 돌아간다. 수궁에 돌아가 토끼에게 속은 일을 낱낱이 아뢰니 마침 선관이 내려와 “별주부가 충성이 특별하기로 그 충성을 널리 알리고자 토끼간을 말”했다 하며 선약을 주어 용왕을 살린다. 그렇다면 진작 선약을 주어 용왕을 살릴 것이지 왜 그렇게 고생시켰는가? 자라의 충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별주부전』은 그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완전히 자라의 독무대다. 토끼는 포획의 대상일 뿐이고 자라의 충성심과 활약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작품의 60% 이상이 토끼를 찾으러 가는 내용이며, 결말 부분에서도 경판본처럼 토끼를 놓친 자라가 자결하려는 순간 화타華陀가 나타나 선약을 주어 사태를 해결한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그 장면은 이렇다.


“~내 토기의 간을 얻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우리 임금과 조정의 동료들을 대하리오. 차라리 이 땅에서 죽음만 같지 못하도다.”
하고 머리를 들어 바윗돌을 향하여 부딪치려 하는데, 홀연 누가 크게 불러 말하기를,
“별주부는 늙은이의 말을 들어라!”
한다. 자라가 놀라서 머리를 돌려 보니, 한 도인道人이 머리에 절각건折角巾을 쓰고, 몸에 자하의紫霞衣를 입고 표연히 자라 앞에 와서 미소 지으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 정성이 지극하기로 내가 천명을 받아 선단仙丹 한 알을 주니, 너는 빨리 돌아가 용왕의 병을 고치게 하라.”
말을 마치고 소매 안에서 약을 내어 주거늘, 자라 매우 기뻐 두 번 절하고 받아보니, 크기가 산사山査열매만하고 광채가 휘황하며 향취가 진동한다. 다시 절하고 사례하며,
“선생의 큰 은혜는 우리나라의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감격할 것입니다. 감히 선생의 높으신 이름을 알고자 합니다.”
“나는 패沛 나라 사람 화타華陀로다.”
하고 표연히 사라졌다.(신구서림본 <별주부전>)
 
경판 『토생전』처럼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으려는 순간 화타가 나타나 용왕을 살릴 선약을 줌으로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다. 왜 근대 이후에 출판된 작품에서는 하나같이 외부의 도움과 선약으로 문제를 해결할까? 근대가 도래하였으니 이제 봉건체제나 봉건국가의 운명과 같은 첨예한 문제는 관심이 없고 재미있게 이야기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토끼와 자라의 재주다툼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토끼도 살리고 자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 외부의 도움인 선약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더욱이 자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다 보니 봉건체제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고 자라의 충성이 부각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 결과 봉건체제를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이야기로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그 뒤 근대에 이어진 대부분의 『토끼전』은 모두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어 본의 아니게 봉건체제를 미화하는 입장을 취한다.


예전에 어린 아들이 유치원에서 『토끼전』을 가지고 동극을 한다고 해서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못 마땅한 듯이 토끼라고 대답해서,
“네가 주인공이네?” 했더니,
“아니요, 자라가 주인공예요.”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런지 물어 보았더니, 바로 자라의 충성이 강조된 후대본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용왕, 자라, 토끼 등 모두를 살리는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간이 아닌 다른 선약이 등장해야하고 그 때문에 그걸 구해와 용왕을 살리는 자라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부각된 것이다.


다음은 봉건체제를 비판, 풍자하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것이 필사본인 가람본 『별토가』다. 토끼를 놓친 자라가 수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소상강으로 망명(일종의 정치적 망명!)하고, 용왕은 토끼간을 기다리다 병이 깊어져 죽게 된다는 결말이다. 그 과정에서 토끼를 기다리던 자라부인이 상사병으로 죽게 되자 남편인 자라를 기다리다 그리 되었다고 하고 열녀문을 내린다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라부인이 어떻게 해서 토끼를 좋아하게 되었던가? 이야기는 이렇다. 토끼가 간을 두고 왔다고 기지를 발휘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자, 자신을 꼬여 데려온 자라에 대해 분풀이를 하고자 했다. 해서 토끼 간을 먹기 전에 오래 묵은 자라탕을 들면 효험이 좋다고 하니, 용왕은 자신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토끼를 잡아 온 자라의 공은 생각지 않고 당장 솥을 걸고 자라탕을 끓일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한 좌의정 거북이 나서서 “별주부는 멀리 인간 세상에 나가 정성을 다하여 공을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높은 벼슬을 제수하기는 고사하고 죽인다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옵니다. 형편을 따라 특별히 암자라로 대신하게 해 주시옵소서.”라 간청하여 자라부인이 삶아지게 되었다.


다급해진 자라는 토끼를 집으로 모셔와 극진히 대접하며 살기를 빌었는데 뜻밖에 토끼가 자라부인과의 동침을 제의했다. 자라부인은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고 외치며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거부했지만, 자라가 살길을 외면하고 정절만 지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하여 결국 토끼와 동침을 하게 되었는데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별주부와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하룻밤 사이에 토끼에 대한 사랑의 정이 깊어졌다. 그래서 육지로 가는 토끼에게 이렇게 애틋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소첩 별부인은 두 번 절하고 피로 쓴 편지 한 장을 토선생께 올리나이다. 첩의 팔자 기박하여 열 살이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옵고, 열다섯에 별주

부를 만났사옵니다. 하오나 별주부의 성품이 모질고 부부 금실이 부족하여 마음에 있는 설움 풀길이 전혀 없었사옵니다. 남모르게 옥황상제께 피눈물로 소원을 빌었는데, 옥황이 소첩의 정성을 받아들여 준수하신 그대를 보내어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하시니 깊고도 귀한 정이 비할 곳 전혀 없었사옵니다. 풍채 좋은 우리 낭군, 늦게 만난 것이 안타깝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별 말고 한평생 함께 살고 싶사옵니다.(가람본 <별토가>)


자라 부인은 완전히 토끼에게 빠져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래서 심지어는 평생을 같이 산 별주부를 일러 “멋도 없고 인물도 없는 별주부는 나는 싫사옵니다.”고 단언한다. 이제 토끼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 토끼는 자라 부인에게 별 마음이 없었으니 자라 부인이 상사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별주부는 토끼를 놓쳐 다시 수국에 돌아갈 수가 없어 결국 소상강으로 망명(!)의 길을 택한다.


그 길로 소상강 돌아가서 대수풀에 의지하여 망명하여 사는 고로 그 자손 세상에 두루 퍼지고, 자라부인 암자라는 토선생 이별 후에 그리워하는 병이 되어 몇 개월 신음하다 속절없이 죽었으니 수궁에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서 별주부를 생각하여 그러하다하고 용왕에게 글을 올려 열녀문을 내렸고, 용왕도 토끼 기다리다 병이 점점 더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피하였다가……별세하고 세자 즉위하여 (가람본 <별토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가람본 『별토가』는 공식화 될 필요가 없는 필사본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설의 부연이 가능하며, 수많은 목소리들이 뒤섞여있고, 봉건권력에 대한 희화와 비속화가 두드러진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만 읽는 일기는 어떤 내용을 써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고전소설에서 유일 텍스트라는 필사본이 그런 경우다.


마지막은 봉건체제에 대한 미화와 비판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신재효본 『퇴별가』이다. 물론 토끼도 살리고 용왕도 살리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선관이 내려와 품위를 갖추어 선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토끼똥(똥이라니!)을 주어 용왕을 살린다.


작은 총알 같은 똥을 많이 누워 칡잎에 단단히 싸 자라 등에 올려놓고 칡으로 감아 주니, 주부가 짊어지고 수궁에 간 연후에 구덩이 안에서 달리는 짐승이라니, 토끼 오직 좋겠느냐. 깡장깡장 뛰어가며 방자하게 뽐내 자랑하는 기색이 무섭구나 (신재효본 <퇴별가>)


사실 신재효는 용궁어전회의 대목과 산중모족회의 대목을 통해 봉건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를 가했던 바,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결말 부분에서 똥을 누워 주는 장면도 풍자로 읽힌다.(하찮은 미물인 토끼의 똥을 먹는 지존인 용왕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봉건체제의 정점에 위치한 왕은 그 권위를 훼손당하지 않는다. 형편없는 조정중신들의 역할을 자라 혼자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봉건체제와 조정중신들은 풍자되지만 자라의 충성 또한 강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라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자라가 용왕의 하수인으로 형편없는 인물인가? 『토끼전』을 꼼꼼히 보다 보면 자라가 비록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나 변학도나 놀부처럼 공격당하지 않고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게 한다. 왜 그럴까? 자라는 용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지만 자신이나 처를 탕감으로 제공해야만 하는 등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패한 봉건체제에 의해 이용과 희생을 당하는 처지가 독자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토끼와 자라는 모두 부패한 봉건체제로부터 소외와 희생을 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토끼전>의 제목도 <별주부전>, <별토가>, 혹은 <퇴별가>라 하여 토끼와 자라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토끼와 자라, 이 두 인물이 맞서고 어울리는 양상은 바로 현실의 모순과 질곡 속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당대 민중들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토끼도 사지에서 벗어났다고 모든 게 해결됐던 것은 아니다. 사냥꾼의 그물에 잡히는 ‘그물 위기’를 당하거나, 독수리에게 잡혀 먹잇감이 되는 ‘독수리 위기’ 맞는 것처럼 그 앞에는 숱한 위험과 고난이 가로놓여 있다. 자라도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부패한 봉건체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소상강으로 도망하지 않았던가. 토끼와 자라가 부대끼면서 살아나가는 모습 속에 전망을 불투명 하지만 대부분 토끼의 무사 귀환으로 작품이 마무리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역사가 힘없는 민중들의 승리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미약하게나마 보여준 셈이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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