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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기행산문/유시연/수녀원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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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기행산문/유시연/수녀원과의 인연
수녀원과의 인연
유시연
긴 여정이다. 영하 50~60도, 11km 높은 하늘에서 보낸 시간 13여 시간. 다빈치 공항에 내리니 어질어질했다. 이층 기차를 타고 로마 시내로 가는 저물녘, 노을이 붉었다. 지난밤 늦은 시간에 수녀원 문을 열어준 노수녀님 두 분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숙소의 내부는 소박했다. 방에는 침대와 낡은 옷장이 하나 있고 침대 머리맡에 나무십자가가 걸려 있는 단출한 구조였다.
유럽의 수도원은 운영이 어려워 고난을 겪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귀족의 후원으로 수도원을 꾸려갔지만 현대에는 여행자숙소를 운영하거나 소규모 농장을 통해 치즈나 와인을 생산하여 내다팔기도 한다. 병원이나 교육 사업을 하기도 한다.
여행자숙소의 비용이 싼편은 아니다. 세금 포함하여 이틀간 20만 원 정도,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삐거덕거리는 옷장, 꾸물대는 형광등…… 단출한 아침식단… 요구르트, 빵, 에스푸레소커피, 잼, 우유…… 남편 아오스딩과 앉은 옆좌석으로 폴란드와 스페인의 단체여행자 좌석이 비치되어 있다. 아마도 부활절을 맞아 바티칸을 찾는 사람들이리라.
로마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나는 일생을 두고 꼭 한번은 가보아야 할 장소를 찾았다. 콜롯세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도원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FMM. 내 청춘의 열정이 집약된 공간이며 인생을 통틀어 잊을 수 없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로마 중심부, 오래된 건물들이 촘촘한 시내 한복판에서 수녀원 건물을 찾아 들어선 순간, 맞은 편 입구 벽에 걸려 있는 창립자 어머니의 초상화가 눈에 확 들어왔다. 비로소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돌린 것도 잠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성에게 한국인 수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디론가 인터폰을 한다. 그러고는 곧 한국인 수녀는 얼마 전 본국으로 돌아갔고, 한국 수녀는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다. 낙담한 얼굴로 서 있는데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다시 인터폰을 한다.
중년 여성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수녀가 내려 올 거라고 말해서 기대와 호기심에 가슴이 설렌다. 누굴까. 한국에 파견됐던 수녀일까. 느낌이란 참 묘한 법이다. 짧은 순간 나는 부산에서 함께 살았던 스페인의 이냐케 수녀를 떠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냐케 수녀가 내 눈앞에 그것도 33년이라는 시간이 장막을 걷어내고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단박 알아보고 다가서서 포옹을 했다.
“수녀님, 저 레아인데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레아를 왜 모르겠어요.”
“정말 반가워요.”
“레아, 잘 왔어요.”
이냐케 수녀가 옆에 서 있던 다른 수녀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 수녀가 환한 미소로 나를 안아주며 볼을 맞대고 소리가 쪽 나는 인사를 한다. 양쪽 볼을 맞대고 인사가 끝난 후 두 손을 맞잡았다. 뒤에 뻘쭘하니 서 있던 아오를 인사시켰다. 이냐케 수녀는 환한 미소로 아오를 맞아주었다. 인사가 끝나고 그녀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갔다. 조용한 복도 양켠에 문이 있고 그 중 빈 방으로 안내해서 들어가니 탁자와 의자 서너 개가 놓여 있다. 이냐케 수녀가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따라준다. 그녀는 다시 우리를 위해 수녀원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무성한 마로니에 나뭇가지가 밝은 햇살 가득한 정원에 서 있고 둥그런 분수대에서는 흰 물줄기가 치솟았다. 오렌지 나무가 빼곡하니 서 있는 정원 끝에 아치를 이룬 나무가 있고 성모상이 서 있다. 성모상 앞에서 짧은 기도를 한 후 대성당으로 갔다. 대성당은 전체적으로 흰색이 지배적이어서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이 났다.
잠시 묵상 후 이냐케 수녀를 따라 창립자 수도원장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초기 수도공동체로 사용하던 작은 성당이 있고 그 옆에 석관이 놓여 있다. 창립자, 마리 드라 빠시옹 어머니의 초상화와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묵념을 한다. 이냐케수녀가 저녁미사 시간을 알려주었다. 오후 6시. 미사는 느리고 고요한 강물이 흐르는 듯했다. 귀국전 이틀 숙박을 허락받고 다른 수녀회 숙소로 돌아왔다.
로마는 느리게 흐르는 도시다. 호텔이나 수녀원숙소나 묵직한 자물쇠키를 돌리고 돌려서 문을 연다. 디지털 키에 익숙해진 나는 로마식에 적응하는 중이다. 버스를 타거나 십 리씩 걷는 것은 예사다. 둘레길을 걷듯 하루종일 걷고 또 걸으며 오래된 도시의 냄새를 향유한다. 천 년 혹은 이천 년 된 유적 위에 현대건물이 들어서 있고 아직도 곳곳에 유적발굴이 진행 중이다. 오래된 벽이나 돌틈에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운다. 로마에는 대형마트가 없다. 도심지 골목이나 도로변에도 큰상가가 없다. 건물벽을 따라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가게는 평수가 작지만 식의주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 구비되어 있다. 주택가 골목마다 식당, 구두점, 빵집, 약국, 이불가게 등을 주민들이 이용한다. 골목의 바나 레스토랑에는 그 마을 주민들이 파스타나 피자, 혹은 커피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오래된 풍경처럼 친밀하다. 주택가 뒷골목을 걷다보면 피자 굽는 냄새, 빵굽는 냄새가 풍겨온다.
바티칸미술관
바티칸미술관에 입장하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에게 암표상이 접근한다. 대부분 흑인계인 암표상 청년들은 유독 아시아인에게 접근하여 끈질긴 설득을 한다. 예약을 안하고 온 탓에 무작정 기다렸다. 바티칸성당에 들어가려는 광장의 긴 줄을 목도하고 난터라 한 시간쯤은 기다릴 참이다. 몇 년 전에 왔던 바티칸은 그때와 다름없이 순례자와 여행자들로 붐볐다. 이날은 동유럽이나 남유럽 깃발부대 단체객에게 밀려 시간이 더디게 갔다.
문득 내 인생이 복기되는 느낌이다. 같은 장소에 다시 오다니… 외씨버선길을 걸을 때 영주에 다시 갔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같은 장소를 다시 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지중해의 밝은 봄볕은 화가들에게 색채의 영감을 불어넣었으리라. 시스티나 천장 벽화를 보며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화가들을 떠올린다. 천지창조와 낙원추방 그림은 촬영금지라서 담아오지 못해 아쉽다. 많은 비용을 들여 예술 작품을 구매한 교황들, 또 전임교황의 뒤를 이어 예술품을 사고 전시공간을 확보한 후임교황 이야기는 놀랍다.
아씨시
아씨시 수녀원에는 한국인 수녀가 있다. 갖고 간 누룽지를 좀 드릴까요, 했더니 아니 그 귀한 것을? 그러며 좋아한다. 안식년 여행중인 부산 신학대학교 교수 미카엘 신부가 앱을 깔아주고 몇 시간 동안 네 번에 걸쳐 열이틀치 호텔 예약을 마무리해주었다.
십 년 전 로마에서 유학한 미카엘 신부님의 유창한 이태리어에 동행하여 미네르바 신전이 있던 자리, 그 앞 광장에서 와인, 에스푸레소,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 중 감탄했다는 노천 바였다.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인 미네르바 신전은 현재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천 년이 넘는 신전 터에 세워진 1300년 된 성당 건물이 담백하고 밝은 색조로 이방인을 맞아준다. 유한한 삶, 짧은 생의 도정에서 바라보는 오래된 신전은 무심하고 편안하다.
이 천 년 전의 건물과 세계에 잠겨 있다가 주교좌 성당으로 향한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가 세례를 받은 성당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저녁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고백실마다 붉은 등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언제 고해를 했더라. 까마득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앞 사람의 뒤에 선다. 차례가 오자 잉글리쉬로 시작을 한다.
프롬 사우스꼬레아, 인천 시티…… 파더, 아임소리, 에에에, 코리언 스피치…… 하고 싶었던 말들, 표현하지 못했던 언어들, 가슴 속 맺힌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이태리 노신부 앞에서 고해를 한다. 울고 싶었던 순간에 울지 못하고 안으로 삼키며 살아온 날들, 사랑, 이별, 아픔, 상처, 고통의 시간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우리 말 한국어로 이야기 하는 동안 노신부는 인내를 갖고 들어준다. 노신부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신부가 사죄경을 읊어야하는데 무슨 언어로 들을지 물었다.
“프랑스, 이딸리, 잉글리쉬…….”
“잉글리쉬 스피치.”
노신부가 천천히 또박또박 잉글리쉬로 말을 하고 사죄경을 읊고 잘가라는 평화의 인사를 한다. 고백성사를 보고 골목을 돌고 돌아 숙소로 돌아
왔다.
부활절 밤미사와 낮미사에 동참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위에 세워진 대성당 입구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군용차를 세워놓고 일일이 검색을 한다. 로마시내 곳곳에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씨시도 성당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검문 검색했다. 테러 위협으로 이태리도 불안정하다. 특히 대중이 모이는 장소는 경계가 삼엄하다. 국내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심란한데 지구촌 어디나 안심할 곳이 없나보다. 터키에서는 얼마전 IS 테러로 미사중이던 콥트 교회 신자 50여 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부활 대축일 미사는 꼰벤뚜알 수도회 총장이 중심이 되어 집전하고 한국인 신부 두어 분이 보였다. 두어 분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아시아계는 맞는데 일본인 신부인지 중국인 신부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미카엘 신부도 제의를 갖춰 입고 미사집전에 동참했다. 아프리카와 그 외 여러나라 신부들이 있었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높은 천장 돔을 휘돌아 울려퍼진다. 성가대를 지휘하는 수사신부의 희끗희끗한 뒷머리가 보이는 가운데 그의 열정 가득한 지휘가 눈에 띈다. 1독서, 2독서를 수녀가 한다. 신의 제단은 봉헌된 자들의 몫이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평신도의 참여가 활발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오직 축성된 신분만이 신의 제단을 밟을 수 있었다.
불안정한 국내정세에 개인의 안위를 위한 기원은 이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기업가의 아들이지만 부유한 삶을 버리고 평생 가난을 실천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부활대축일이 지나고 평온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낯 선 거리에서 걷고 또 걸었다. 오래된 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삶의 유한성에 대해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이 고여 있는 공간, 느리게 흘러가는 고도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내 생의 어디쯤에서 스쳐 지나갔을 풍경과 낯 선 이름과 보편적인 정서를 느끼기도 하면서 강물로 흐르는 생을 고요히 응시한다. 오르막을 숨이 차서 헐떡이며 오르기도 하고 계단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오늘도 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삶이 진행되는 한 모퉁이에 서 있다. 씨앗이 돌벽 틈새에서 자라나고 봄이 대지를 감싸안는 이 눈부신 빛의 향연속에서 아찔한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뜬다. 천 년, 이 천 년…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도시에서 인간은 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페루자에서의 하룻밤
멀리 구름과 맞닿아 있는 고원도시 페루자. 무슨 인연인지 페루자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아씨시에서 기차로 30분, 페루자 기차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끝없이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한다. 무인시스템 티켓박스에서 표를 끊어 장난감 같이 생긴 공간에 올라타니 10여 명이 타기에도 빡빡하다. 도시와 도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산위에 성을 쌓고 그렇게 높은 지대에 요새를 쌓아 살아남은 흔적이 가는 곳마다 보인다. 도서관, 관공서, 광장이 해발 칠팔백 높이에 있어 바람이 많이 불고 몹시 춥다. 얇은 옷을 몇 겹씩 껴입어도 콧물, 눈물, 기침에 정신이 몽롱하다. 약국에서 주는 약은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다.
호텔에 배낭을 맡기고 시티투어 버스에 오른다. 15인승 정도 되는 붉은 색 버스 안, 티켓박스에서 나누어준 이어폰을 끼고 선택한 언어, 잉글리쉬를 듣는다. 1인 14유로, 아오와 나, 두 사람을 싣고 미니버스는 느리게 고원도시를 한 바퀴 돈다. 좁은 골목을 돌아 나갈 때마다 푸른 하늘이 담황색 오래된 건물 사이로 투명하게 다가온다. 엷은 분홍톤의 대리석 건물들이 오래 시간이 덧칠해져 밝고 따뜻한 느낌이다.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베드로 같은 성인 이름을 딴 수도원과 성당이 있고 종탑에서는 잊지 않을만큼 종이 울린다. 한 시간 가량 돌아본 고원도시의 광장에서 배회하다가 골목 안에 갇혀 있기도 하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한다. 여성들이 늘씬하고 아름답다. 대부분 화장하지 않은 그녀들의 깊은 눈과 여유 있는 태도에서 어머니라는 존재, 인류 공통의 문제를 생각한다. 어머니의 존재, 생명, 연민, 휴머니즘 같은 어휘를 떠올린다. 피자의 원조 이태리에는 골목마다 피자가게가 성업이다. 화덕에 구운 빵냄새가 골목 어디에나 떠다닌다. 춥고 그늘진 골목에서 기타소리에 맞춰 노래부르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친다. 한참 서서 노래를 듣다가 2유로 동전을 기타 케이스에 넣고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흔쾌히 수락한다. 그의 노랫소리는 울림이 있고 깊다. 이곳 사람들에게 1유로의 가치는 의미가 있다. 피자 한 조각, 커피 한두 잔을 사먹을 수 있다. 아오와 함께 일찍 호텔로 돌아오는데 하루가 쓰윽 지나가는 느낌이다. 아득히 먼 푸른 하늘과 맞닿은 산능선에 흰 눈이 덮여 있다. 설산에 둘러싸인 페루자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간다.
올리브나무 사이로
완행기차에서 내다보는 이태리 중부지역의 하늘이 투명하게 맑다. 밀밭과 올리브나무 사이로 지중해의 봄볕이 쏟아진다. 겉으로 보이는 전원풍경 뒤로 어디서나 마주하는 민낯을 본다.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대성당 정문과 후문을 지키는 군인들, 중부지역 지진의 여진을 조심하라는 외교부 문자. 기차역 주변을 서성이는 남루한 행색의 거지, 가난한 이민자의 노동,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제3세계 시민의 불안정한 삶이 도사리고 있는 이땅에서 스쳐 지나가는 짧은 시간의 단상을 기록한다. 50센트나 1유로를 준비하지 못해 화장실 문앞에서 서성이며 5유로짜리 지폐를 들고 동전을 바꾸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 삶의 조건에 대해 인간의 부자유함에 대해 묵상한다. 예약한 호텔 여기저기에서 이 메일이 계속 날라온다. 체크인 예측시간을 알려 달라거나 전화 달라거나…… 확인 메일 답장을 보내고 다음 일정을 체크한다. 아시시에서 만난 두 한국 아가씨는 각각 혼자 여행 중이라고, 개인여행이 처음인데 할 만하다고, 혼자서도 살 수 있겠다고 말해서 서로 웃는다. 한 사람은 피렌체, 또 한사람은 베로나로 간다는 두 아가씨에게 커피를 사준다.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영화로 알려진 후 관광지가 되었다.
꽃의 도시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예술가를 길러낸 피렌체는 관광객들로 혼잡하다. 말을 탄 토스카나 주 대공 코시모 1세의 청동기마상이 서 있는 광장은 세계 각국 단체 손님으로 뒤덮여서 오래 전 설렘의 기억을 안고 있는 나에게는 좋은 추억마저 퇴색될 위기다.
이 지역에서 나는 녹색 대리석으로 지은 두오모 성당의 웅장함은 시간의 흐름에도 변함없이 유장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메디치가 이야기를 ‘로마인 이야기’에서 다룬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남편과 이곳에서 30여 년을 살면서 왕성한 집필을 했다. 그녀의 책은 한국에서 많이 팔렸다. 우피치미술관 앞에서 서성이다가 서둘러 인파를 피해 광장 외곽을 걷는다. 우연히 들어간 성당은 저녁미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신자가 십여 명, 귀에 익은 알렐루야 멜로디를 따라 부르고 성체를 모시고 미사 후 한인식당으로 갔다. 여행 가이드 일을 은퇴하고 한인식당 궁을 차린 남자가 방금 미사에 참여한 성당에 보티첼리가 묻혔다고 말한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고 시스티나 성당 벽화에도 손을 댄 그 보티첼리의 흔적을 만나다니…… 한인식당 주인 남자에게서 여행정보를 듣고 계획하지 않았던 지미그냐를 머릿속에 입력한다. 여드레만에 맛 본 한국음식이다. 제육, 된장찌개, 잡채를 시켜 깨끗이 그릇을 비우고 골목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호텔로 돌아왔다.
유럽의 에어 비앤비 호텔은 끓여먹을 수 있는 도구가 갖춰져 있지 않다. 아침식사를 제공해주는데 완전히 호텔식이다. 에어비앤비 호텔을 찾느라 시간을 좀 끌었다. 간판이 없어서 주소를 들고 건물벽을 따라 번지를 찾아 가는데 레드, 블랙 글씨로 쓰인 번지 숫자 의미를 몰라 두 바퀴를 헤맨 끝에 레드는 상가 번지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 년 전, 중국 서안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 숙소는 아파트 한 층을 빌린 가정집 형태로 세탁기, 냉장고, 끓여먹는 도구가 비치된, 그야말로 가정집이었는데 유럽은 좀 다른 것 같다.
방에 도착하기까지 묵직한 3개의 열쇠 키가 필요하다. 바깥대문, 프런트 쯤 되는 사무실, 그리고 방…… 로마에서부터 아씨시, 페루자, 피렌체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키를 볼 수 없었다. 묵직한 열쇠로 방문을 여느라 몇 초간 낑낑댄다. 왼쪽으로 여러 번 오른쪽으로 여러 번 360도 회전을 몇 번 한 뒤 어느 지점에선가 덜컥 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면 성공했다는 신호다.
지도를 잘 보는 지도박사 아오 덕을 톡톡히 본다. 장교 교육 받아서 잘 보느냐고 물었더니 생도시절 독도법을 공부했다고 간략하게 대답한다.
르네상스 화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나름 자부심을 느꼈을 터다. 그 시대에도 수많은 무명 예술가가 가난과 싸우며 평생 고독한 작업을 했다. 사후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대다수 예술가는 생전이나 사후에나 외로움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뛰어난 예술가는 귀족의 후원이나 주교나 교황의 후원에 힘입어 마음놓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고 죽어서는 성당이나 수도원에 묻혔다. 많은 일반 시민들이 가족묘나 공동묘지에 묻혔고 성당에 묻히는 사람은 특별히 예외에 속한다.
신의 영역에 가까운 장소에 묻히려면 특별히 그림을 통해 재능을 봉헌하거나 성인들만이 혜택을 입는다. 매일 신의 제단에서 신에게 바쳐지는 찬미가를 들으며 안식에 들어간 영혼은 어쩌면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서 부활을 꿈꾸지 않았을까. 동양의 죽음에 대한 관념과 서구인은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죽은 고인을 집에서 되도록 멀리 보낸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 냉정하게 차단되고 막이 둘러쳐진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서구 유렵인은 삶속에서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유럽인의 죽음 인식은 부활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은 백지 한 장 차이이고 나는 늘 그 경계에 서 있다.
*유시연 2003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소설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오후 4시의 기억』, 『달의 호수』.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바우덕이전』, 『공녀 난아』. 에세이 공저 『꽃 진 자리에 어버이 사랑』 등. 정선아리랑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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