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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다층|반연희·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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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다층|반연희·수상작
비둘기 사육법 외 1편
반연희
모자 속에서 비둘기를 꺼낼 수 있나요
광장의 뚱뚱한 비둘기들을 상자 속에 모아
오늘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요, 한 걸음씩
천천히 상자 앞으로 다가가
밖으로 삐져나온 부리와 발톱을 모두 자르시오
그림자도 상자와 닮아가는 완벽한 오늘
그저 눈속임의 하루를 즐기세요
사뿐사뿐, 소매 속으로 얌전히 들어가
오른발이 한 일을 왼발이 모르게 외우시오
질문은 발목에 매달아 놓고
상자 밖의 구름처럼 모습을 숨기시오
준비된 내일을 위해
소매 속 비둘기 날개를 약간 비트시오
즐거운 일들은 모두 고통 위에 껴입는 겉옷 같은 것
커다란 모자 속
파닥이는 날개를 더 꾹꾹 누르시오
새를 흉내 내지 마시오
좁아지는 나와 늘어나는 물건들
죄송합니다 나로 가득찬 방이 좁아 당신을 초대하지 못합니다 찻잔이 된 내가 오른쪽 손잡이로 흘러내리는 나를 따릅니다 뜨겁게 타오르다 눌어붙은 나를 지울 수 있을까요 나는 천장에 매달려 눈을 뜨고 잡니다 방 안 가득 내가 환해집니다 꺼졌다 켜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오시겠다면 당신도 켜드리겠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간을 밀어냅니다 당신을 끄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식지 않은 나는 따뜻하게 앉아 있습니다 구김 없이 빳빳한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나를 껴입을 또 다른 내가 줄지어 걸려있습니다 구겨진 어제를 털어서 펴두었습니다 당신이 정 오시겠다면 나였던 어제를 깔고 오늘의 나를 덮을 수 있겠죠 멈춰진 말의 두께가 두꺼워집니다 내 발들은 문을 닫고 이미 걸어온 길을 감췄습니다 버리고 싶은 나도 있지만 나를 버릴 수 있을까요 당신이 보지 않는 곳에 못난 나를 숨겨둡니다 나를 숨길 또 다른 내가 늘어나는군요 먼지 속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나에게도 빛나던 시절은 있었겠죠 우울해하지 마세요 곧 새로운 내가 배달될 테니까요
<신작시>
실내정원
나를 모두 모아 책상 위에 심어두었습니다
다가오는 눈들이 나를 하나씩 꺾어갑니다
나를 소리 죽여 불러봅니다
피어오르는 나는 입이 없어 대답하지 못합니다
의자 3이 옵니다
초록이 무성한 나는 귀가 없어 듣지 못합니다
의자 4가 옵니다
농익은 나는 입과 귀를 막습니다
의자들로 만들어진 울타리에서
의자 1이 사라집니다
말라가는 내가 말을 하면 빈 허공이 돌아옵니다
이끼 낀 하늘에 조약돌이 떠 있습니다
빗방울 같은 눈빛들이 쏟아집니다
의자 2가 사라집니다
물웅덩이로 변한 나에게 돌덩이를 던지며 갑니다
당신들의 눈 속에서 나를 꺼내야겠습니다
내가 모두 뽑혀 나옵니다
창가에 나를 모아 다시 심었습니다
쏟아지는 빛은 목소리가 없습니다
문이 열린 귀들이 반짝입니다
<선정평>
충돌하고 화해하는 이미지의 하모니
올해의 전국계간지작품상 후보로는 다층문학동인과 다층문학회 전 회원의 지난 1년간 발표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다. 선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회원들이 지난 한 해 왕성한 창작과 발표를 했음을 확인했다. 선정의 기준은 왕성한 활동과 작품의 수월성을 기준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반연희 시인의 「비둘기 사육법」(《다층》 2017 가을호)과 「좁아지는 나와 늘어나는 물건들」(《문학과 사람》 창간호)을 수상작품으로 선정하는 데 최종 합의를 하였다.
이미 지면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것이나 함께 활동하는 회원들의 작품과 견주어야 하는 측면에서 보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대상이 된 모든 회인들의 작품이 각각의 개성과 특장特長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대외적으로 우리들의 작품을 대표할 만하다는 대표성이라는 측면도 고려될 수밖에 없었다.
수상작으로 선정한 「비둘기 사육법」과 「좁아지는 나와 늘어나는 물건들」 외에도 반연희 시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나 작품성에 있어서 수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분방함으로 빚어낸 시적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면서 만들어내는 시의 구조는 감칠맛 나는 시를 만들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앞으로 반연희 시인이 걸어가는 문학 역정에 더욱 환한 기운이 감돌기를 기원하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계간지문학상 작품으로 선정한다. /《다층》 편집실
<수상소감>
구토하듯 써 온 시간時間 혹은 시간詩間
뭐라도 뱉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나왔다. 나는 나무로 둘러싸인 숲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풀벌레였고, 나무 잎사귀와 어울리지 않는 열매였다. 지나왔거나 지나갈 나를 모두 모아서 정원을 만들었다. 나는 그 정원에서 혼자 피어올랐다 지기를 반복했다. 뱉어내면 낼수록 아프지 않아 좋았다. 아프지 않으니 이젠 그만 써도 되겠다 싶었다. 쓰지 않으니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아팠다. 시를 끌고 가다 시에 끌려 다녔다.
시인이라고 불릴 때 마다 부끄럽다. 빌려 입은 옷처럼 마음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게다가 수상소감을 쓰라고 하니 덜 조여진 안경다리처럼 불안하고 어색한 마음이 든다.
서로 시인이라 부르지 않아도 넋두리처럼 쓴 글들을 같이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들이 있어 지금까지 왔다.
이상한 노래를 같이 불러 준 벗들이여, 앞으로도 지금과 같길./반연희
*반연희 2001년 《다층》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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