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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문예연구|차현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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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98회 작성일 19-06-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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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문예연구|차현각·수상작


갈아엎다 외1편


차현각



낯익은 모습이다
김 씨의 마른 다리로는 어림없다는 듯
농수산시장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가파르다 짝짝이로 걷어 올려진 바지
낡은 짐자전거에 들쑥날쑥 묶여진 채소박스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오는 차들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듯
박스가 흔들리고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자
바람조차 사납게 기웃거린다
어딘가 또 갈아엎었다는 말 
정작 주인이 쳐다보지도 않는 밭 언저리로
새떼들처럼 기웃거리며
널부러진 호박이며 무며 양파들
그중 성한 것들 주워 박스에 담은 김 씨
다시 언덕을 오르다
애써 중심을 잡느라 머뭇거리자
놀란 차들이 거듭 경적을 울린다
짐자전거에 산처럼 쌓인 박스를
경적이 밀고 간다





곡우



산꿩 울음소리
예전에도 저렇듯 절박했나
집 근처 어느 풀숲에서 우는 듯
쫒기듯
때로는 조바심에 동동거리듯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져
꺽꺽대는 소리
길었던 시간들에 방점을 찍듯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서 있는 
적막한 산꿩 소리
이젠 가까이서 귀를 때린다
가슴 한 켠 서늘해진다
모를 심은 지 엊그제인데
늙은이의 잦은 기침처럼
산꿩 울음소리
가깝다





<신작시>


청명



저건 꽃이 아니다 
터져나오는 불을 놓듯 번지는
상처 아물어 딱지 내려앉은
새살에 가려움으로 움찔거리는


새끼 떠나고
밥맛도 잃어버린 어미개 밥그릇에
소복한 흰 쌀밥
마당가 마른 개똥 위에 얹혀 있는 손길


벚꽃 흐드러진 봄 밤
꽃도 피워내지 못한 살구나무에
목을 맨 사촌 언니의 쓸쓸한
웃음 다녀가고
흰 머릿수건 눈 밑까지 내려 쓴 고모가
풀 먹인 적삼 냄새와 함께
후두둑 눈물처럼 깊어지는 밤


동네 어귀 고목에 깃든 새 한 마리
혼자 잠깨어
부리로 땅을 갈아엎듯 콕콕
파란 새순을 잘도 쪼아 먹는다
펴지지 않는 손가락을 웅크린 채
울음인 듯 웃음인 듯





<선정평>


삶에 대한 통찰과 시적 상상력의 깊이



계간 《문예연구》에서 추천하는 올해의 전국계간지작품상으로 차현각 시인의 「갈아엎다」와 「곡우」(《시인정신》 2017년 가을호)를 선정한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삶에 대한 사유의 시작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유가 먼저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글쓰기를 먼저라고도 한다. 둘 다 의미가 있겠지만, 생각이 있어서 쓰는 것보다는 쓰는 동안 생각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 특별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 중에서 시쓰기는 특히 써야 생각하는 글쓰기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차현각 시인의 「갈아엎다」와 「곡우」는 이와 같이 쓰면서 생각을 키워나간 작품들로 읽을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갈아엎다」는 공들여 기른 농작물을 한순간에 갈아엎어버리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정작 시인의 시선은 그 일의 무망함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원래 갈아엎는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그저 ‘땅을 갈아서 흙을 뒤집어엎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네 세상에서 이 말은 그동안 공들여 기른 농작물의 수확을 일순간에 포기하는, 그래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농작물을 거두는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갈아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갈아엎는 행위의 기막힌 상황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냉정하게 비켜서 있다. 어떤 사람은 농작물을 갈아엎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 갈아엎은 밭에서 그중 성한 것들을 주워 담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행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는 화자의 태도라고 하겠다. 만약 어떤 판단을 결론으로 제시하려 했다면 그저 범박한 작품에 그쳤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판단에서 비켜서서 오히려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시쓰기는 다른 작품 「곡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곡식을 싱싱하게 하는 봄비 ‘곡우’에서 시인의 시선은 도리어 적막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 작품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시쓰기에는 삶에 대한 연륜의 깊이가 역력하다./《문예연구》 편집위원회





<수상소감>



아버지의 유품에서 찾아낸 낡은 時作노트가 나에게 부질없는 꿈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의무처럼 과제처럼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에서 이젠 가벼워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할 무렵 생각지 않은 영광스런 자리가 주어졌다.


지나온 시간들이 허전하지만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時作의 끈이었다고 자조해 본다.


기웃거리기만 하던 집의 열쇠를 받아들고 설레었던 순간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입속에 물집을 달고 살 듯 늘 까실거리며 아프기만 하던 시.


더 깊은 눈으로 더 따뜻한 가슴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들을 바라보고자 소망한다.


빛나는 자리에 부족한 시를 자리하게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차현각






*차현각 2005년 《문예연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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