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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사람|서승현·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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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사람|서승현·수상작
춘화현상 외1편
서승현
바닥까지 말라붙었던
공원 수로에 물이 흐른다는 것은
노란 창포꽃이 피었다는 뜻
봄이 와도 꿋꿋하던 당신이
기어이 눅진한 이별의 강 건너갔다는 것
한 시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꽃빛깔
환하게 열어 줬다는 것과 같다
다가올 때 떠날 것 미리 알고 있었지만
영하의 시린 쓰라림 앞에서도
이별을 애써 망설이던 당신이
문득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바람결에 부드럽게 내비친 것은
어둡고 추운 시간 견실하게 지나야
슬픔의 수량 풍부해지고
젖은 꽃빛 더욱 곱다는 걸 확인하기 위한 것
비밀스레 꽁꽁 싸매두었던 함초롬한 치맛자락
봄볕 아래 흔연스레 펼쳐 보라는
당부의 어루만짐이었던 것
캄캄하게 얼어붙던 마음 외면하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았던 시간 비로소 떨치고
떠남이 오히려 진한 사랑이 되는
늦겨울과 늦봄의 변주곡
그 한가운데 노란 창포꽃 피고 또 진다
노크
감나무집 102세 시어머니가
안방 문 앞
맨땅에 앉아서 톡톡톡
콩을 터신다
딱딱 벌어지는 콩꼬투리
잘 익은 노란 콩알들
황금빛 햇살 속
천지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남편 잃고 올망졸망 남겨진 자식 여섯
시집장가 보내고 증손자까지 마흔여섯 명
102세 이력서인 백수 기념 가족사진 걸린 안방 문 앞
맨땅에 쪼그리고 앉아서
톡톡톡 콩타작 하신다
마당을 소리없이 가로질러
여윈 문살 두드리던 소리에
수줍게 가슴 열고 족두리 쓰던 날처럼
민들레 꽃씨 같은 흰 머리 수그리신 채
작달막한 작대기로 톡톡톡
콩들의 방문을 열어 주고 계신다
일찌감치 방문 걸어 잠그고
하늘 문 열어버린 눈치 없던 영감은
여태 방문 안 열어주고 뭘 하고 계시나
당신 곁에 갈 준비 끝낸 지 오래
오늘이라도 날 데려가라며
구시렁구시렁 톡톡톡
맨 땅바닥 두드리고 계신다
<신작시>
먼 길
어지럼증에 흔들리며 아지랑이 피던 길
고마리 꽃송이에 눈 맞추며 타박타박 걷다 보면
잠자리 떼처럼 정수리에 몰려들던 자욱한 볕의 통증
배 고프고 다리는 아픈데 혼자 걷던 멀고 먼 길
길가에 늘어선 전봇대 세다 보면
타박타박 솔모랭이 굽돌아 들고
신당 있던 솔숲 사이 불어오던 바람 자락
시퍼런 칼날처럼 목덜미 스쳐왔다
고단한 길 걷던 어른들은
용틀임 소나무 휘늘어진 잔가지 들추며
너럭바위 걸터앉아 다리 쉼 하던 길의 중간
주름진 얼굴들 샘물 한 바가지씩 들이키며
시원하고 그윽한 표정 짓곤 했지만
여린 뒷통수는 한사코 서늘 뜨끔하였다
기둥마저 삭아가던 신당에서는
처녀귀신과 산다는 늙은 박수무당이
훌쩍 호랑이 등을 타고 산 넘어
먼 길 다녀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억세게 뒷목덜미 잡아당기던 길
삭은 문살 너머 부엉이 우는 밤
찰기 많은 어둠 사르며
파란 불꽃 말긋말긋 떠돌던 산허리 굽은 길
오늘은 따가운 햇살 아래 회색빛 아스팔트
장딴지 쭉 뻗고 있다
처마 낮은 집 앞
길의 시작이자 끝인 황토빛 옛길 한 뼘
오도마니 남아 있다
아직도 꿈속에선
단발머리 계집애가 작은 주먹 꼭 쥔 채
따가운 햇살 아래 새카맣게 그을려서
검정고무신 삐각빼각 혼자 걷는
멀고 먼 길
<선정평>
2018년도 제5회 전국계간지작품상의 영예를 《시와사람》에서는 서승현 시인에게 주어졌다.
‘사랑’을 노래한 시편은 그 역사가 가장 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감정으로 삶의 본질을 향하는 것이다. 서승현 시인의 「춘화현상」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시인 자신만의 표현과 인식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참신하다. 이 참신함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상상력을 배격하고 “당신”이라는 시적 대상과 이를 은유한 사물인 “창포꽃”을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며, 시가 보다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데에서 연유한다.
마른 수로에 물이 흐름으로써 “노란 창포꽃이 피”는 것이고, 그럼으로 “봄”이 온 것을 말해준다. 당신은 “기어이 눅진한 이별의 강 건너 갔”지만, 그래서 “영하의 시린 쓰라림”과 “어둡고 추운 시간”을 견딘 후 “봄볕 아래” “꽁꽁 싸매 두었던 함초롬한 치맛자락”을 펼쳐 꽃을 피어낸다. 이로써 ‘이별’이라는 슬픔이 아름답고 “떠남이 오히려 진한 사랑이” 된다.
이 작품의 배경에는 ‘슬픔’이 흥건하지만 그 ‘슬픔’의 힘이 ‘사랑’으로 승화되며 마침내 “당신”과 “창포꽃”이 동일화되는 순간을 맞는다. 서정시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시적 구조가 튼실하고 그런 만큼 주제가 보다 선명해짐을 볼 수 있다.
「노크」는 102세의 시어머니가 작대기로 콩을 터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콩깍지가 터져 콩들이 사방천지로 터져나가는 모습에서 증손자까지 마흔여섯 명의 후손을 둔 다산多産적 삶을 오버랩시키는 대목이 기발하다. 더불어 작대기로 콩깍지를 두들겨 콩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은 “일찌감치 방문 걸어 잠”궈 눈치없이 안 열어 준다는 인식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도 시인의 재치가 느껴진다.
살펴보았듯이 서승현의 시가 높은 지경에 이르러 있음을 확인시켜주어 기쁘다. 더욱 빛나는 시인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한다./강경호(글)
<수상소감>
오랜 비움……
……에 대한 미안함과
……에 대한 송구함으로
두 손 모우고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서승현
*서승현 200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푸른현호색꽃 성채에 들다』. 《시와사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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