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정신|구지혜·수상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35회 작성일 19-06-28 09:46

본문

72호/제5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시와정신|구지혜·수상작


따뜻한 민낯 외1편


구지혜



1.
핼쓱해진 새벽은 안개에 갇힌 까막눈 사내를 어루만지곤 했다


2.
사내는 진하게 익어 하얀 쌀밥이 되는 신앙을
칠흑 속 깊이 심어 두었다
고독과 몸을 바꾼 채 피부 호흡으로 견뎌내는 그 오랜 침묵 
아득히 지워지던 씨앗은
지상의 발소리에 귀를 연다
 
태생은 낮이 부신 어둠이다
근심스런 모양으로 조금씩 안개가 걷히면
가느다란 허리 긴 이랑에 몸을 잔뜩 웅크린 사내가 보인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옷은 이제 그의 피부
양서류의 몸처럼 반들거린다
무성한 계절을 온몸 내어 밀고 나간다
 
여름 내내 태양을 매달고 살았다
하늘 가장자리에서는 연기가 솟고
붉은 열매를 떨어트리며 허리를 펴는 가지처럼   

이랑 끝에 태양을 내려놓는 사내
피곤을 가라앉힌 눈동자엔 곱게 단풍든 가족의 풍경이 걸려있다
수런대던 들풀들 고개를 숙여
그의 발걸음에 앞서 길을 내려놓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수확은
수평을 읽지 못하고 기울어진 손저울에 팔려나간다
 
사내는 때때로 하얀 이익을 잃었더라도
그저 수수꽃이 되어 웃곤 하였다
잠깐 자본의 얼굴 우울한 인상으로 왔다가 사라지고
흰 막걸리 한 병 손에 든 
까막눈 하루가 쓸쓸히 저문다
 
3.
허연 찬바람이 보푸라기처럼 날리는 허공에
선명한 실핏줄이 드러나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검은 나무는 사내의 자화상을 닮았다
세상 어떤 타협에서든 한 번도 손해를 본 일이 없는 생이다





푸른 안개



각혈하듯 색을 뱉는 틈들
산통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날,
 
물소리 깊어지는 자리마다 거미줄에 걸린 물줄기가 쉴새 없이 파란 거품을 일으켰다 저 너머 적막을 맞대고 있는 능선들은 아득한 언덕을 만들고 허공의 지퍼를 열면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나는 미로 같이 얽혀있는 푸른 그늘 속으로 오래도록 갇혔다 그러는 동안 온몸에 열꽃이 돋았고 술잔 속에선 차가운 지문의 소용돌이가 여러 표정으로 출렁였다 점점이 피어나는 작은 그늘들 초대해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때가 되면 태양이 어둠 속으로 몸을 기울이듯 구름도 지쳐 힘들면 시름시름 땅바닥으로 내려와 눕는다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푸른 그늘 속에서 싱싱하게 위로 받고 싶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이 감정 없이 내 몸에서 풀려나오기를 바랐다 가장 뜨거울 때가 가장 푸르다 가장 슬프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방황이 잠시 내 곁에서 길을 잃는 시간, 몸의 앓은 자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이 이끼처럼 피어났다 나는 깊이 젖지 않을 것이다 일박이일 푸른 비는 그치지 않았다





<신작시>


차갑게 엎질러지는 우리



나는 생각을 앓는 환자
 
나를 휘휘 젓는 생각을 보고 싶었다
X-ray로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다고 했다
집도를 한 의사는 손 쓸 방법이 없다며
환부를 닫았다
 
모든 관념은 충분히 오진誤診될 수 있다
 
내 병명은 내 이름이다





<선정평>



제5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구지혜의 작품 속에는 현대라는 어두운 늪에서 신음하는 자아들에게 어떠한 구원이 있을까하는 고민과 그 방황의 흔적들이 역력히 담겨있다. 구지혜 시인은 이 시대가 부과한 압박과 우울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헤쳐 나가는 구원의 담론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도정에 이르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럼에도 시인에게 기억된, 혹은 아련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의 끈들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숙고한다. 그의 시에서 본성이나 사랑, 모성 등등이 그러한데, 그러한 모습들은 구지혜 시인의 「따뜻한 민낯」이나 「푸른 안개」 속에 유현하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심사위원 : 김완하, 송기한(글), 김홍진





<수상소감>



한 권의 책이 바다가 된 적이 있다. 파도 한 장 한 장 넘길 때면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의 행간을 읽을 수 있었다. 파랑이 이는 언어의 물결은 심장 박동을 타고 현기증을 앓기도 했다. 심해어에서 모든 존재가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이 하늘이 된 적이 있다. 파란 하늘 위를 모였다 흩어졌다 흘러가는 구름문장은 눈시울 적시는 나를 만나게 한다. 양떼구름, 매지구름, 샌비구름, 물방울의 여행은 우리의 길을 따라 추억처럼 흐르고 흐른다. 마침내 새털구름으로 피어오른다. 한 권의 책이 들꽃이 된 적이 있다. 제비꽃이 그렇고 민들레가 그렇고 꽃다지가 그랬다. 들꽃처럼 낮게 낮은 곳에 그러니까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존재하는 생생한 삶이 그랬다. 
 

장 그르니에를 읽으며 지중해의 쏟아지는 햇살을, 조지 오웰을 읽으며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를, 카프카를 읽으며 프라하의 성을,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슴에 품던 날들이 찾아가지 못한 땅이지만 그렇게 한 권의 책을 통해 다가왔다. 덮고 나면 새로운 나의 세상으로 뛰어들 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 삶이 되는 책이 있다. 한 권의 책이 열어준 낯선 세상을 상상하는 날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 막론하고 그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보다 귀하고 따뜻한 단 한 권의 양서가 있다. 나의 주검 속까지 함께 묻힐 책이 있다. 지금, 그곳에는 바람을 품던 담장도 담장을 지키던 터진 발자국도 없다. 그곳의 감꽃처럼 다시 피울 수 없는 멀리 피우는 꽃이 되어버린 책이 있다. 언제나 고요히 아껴 읽는 책이다. 바다와 바람과 햇살,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길 줄 알게 해 준, 도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책이다. 언제나 고요히 아껴 읽는다.


 잔가지 끝까지 다 들어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겨울나무를 가만히 바라만 본다. 내 눈 속에 갇힌 실핏줄 하나 번진다. 돌아설수록 선명한 가지를 닮을 까막눈 사내를 읽는다. 시는 그렇게 내게 왔다고 말하고 싶다. 시의 길을 열어준 우리에게 애틋한 마음 깊이 전한다./구지혜





*구지혜 2011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