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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집중조명/박수빈/신작시/西로 겹치는 울음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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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집중조명/박수빈/신작시/西로 겹치는 울음 외 4편
西로 겹치는 울음 외 4편
박수빈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담쟁이는 울그락불그락 건물을 핥고 비둘기는 건너편으로 종종걸음 전봇대가 제 목에 전선을 감고 있다 그 아래 구부정한 차림의 가방이 드르륵 연신 핸드폰에 조아리며 미안하다며 걷는 저이, 허리를 굽실 몇 걸음 떨어진 내 발치에 떨어지는 죄송이란 단어가 낙엽처럼 뒹군다 목소리 사이로 그림자 사이로 내 안을 빗금으로 횡단하는 가로등 불빛
말 건네지 않아도 저 이가 짐작된다 이룰 수 없는 꿈이거나 사랑이거나 던지는 서류에 이면지처럼 구겨졌을, 잊으려 술을 마시고 전봇대 붙잡고 고해성사를 할지도 모른다 끼니는 생을 건너는 자에게 놓인 한 덩이의 슬픔, 고봉으로 눌러 퍼 올리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저물녘 구름
울음은 해 지는 쪽으로 눕고 마감일을 넘긴 청구서가 쌓일 테지 옷깃에 얼굴을 파묻은 저 이나 나나 결국 순환선을 타고 제자리 맴도는 건 아닌지 진눈깨비는 눈썹에만 쌓이다가 눈물로 스민다 오토바이에 배달되어온 고독이 끼익 멈춘다 하염없이 미끌거리는 길목
무화과
주홍글,씨들을 먹는다
무슨 죄가 이리 둥글까
비가 오지 않는 생이 더 달달해졌나
죄의 씨앗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새를 어루만진 몸이 가려워
휘파람에 열매는 꽃을 품고
날 선 말들의 속죄양 주홍글, 씨
뱀의 혀들이 담을 넘는다
언어의 발기부전
끈적한 저 핏빛
오드아이*
맹인가수의 오래된 노래를 듣는다
두 눈을 왼편과 오른쪽으로 나눈다
옳다 그르다 빛과 그림자
불 같던 시절
어느새 희끗해진 머리카락
서로 다른 두 색이 아파왔다
옳은 것이 그르기도 하고
구별하는 순간 한쪽 눈은 빛을 잃고
경계는 어떻게 사라지고 미끄러지는가
편을 가르는 눈빛이나 말은 아침이 밝아도 나무
녹음이 울울창창해도 헐벗은 밤
잎이 흔들리고 이상한 바람이 가슴을 휘젓는다
산으로 가는 배처럼 당신과 나
스멀거리는 것은 차라리 축복일까
두물머리처럼 만나는
사랑을 끌고 다닌 날들
저스트 콜 투 세이 아이 러브 유
* 홍채 이색증.
우로보로스*
클레오파트라는 진주를 식초에 녹여 먹었다 양귀비의 피부는 어린아이의 맑은 오줌 덕분이다 태반주사를 맞고 곰쓸개를 먹고 사슴피를 마시는 사람들 모피코트에는 수백 마리의 붉은 피가 스며있다 반려견 재롱이는 목소리를 거세당하고 네팔산 카펫에는 미처 자라지 못한 시커먼 손톱들이 박혀있다 일류기업에서 별을 단 임원은 0.2%이며 60%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곳곳의 우로보로스Ouroboros
문명은 깨뜨리며 지탱하는 킬링필드
오늘도 알람을 맞춘다
시간 속으로 나를 돌려보내거나 나를 꺼내거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세상
나는 어릴 때 오종종 봉숭아 물들이고
지금은 지갑에 물들고
훗날에는 무엇에 물들까
눈을 뜨는 순간
굴레의 세계는 찢겨진다
*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공지능
둥지는 그늘이 낳은 배경
그림자를 더블 클릭한다
내 안에 자라는 나의 뻐꾸기와
뻐꾸기의 나
날마다 알람 뻐꾹, 혼자 밥 먹고 혼자 잠들 때 뻐꾹, 플라스틱을 만질 때 뻐꾹, 검정인가 하면 핑크, 깃털인가 하면 다시 보라, 포커페이스 뻐꾹, 날개를 펼치기 전에 뒤뚱이는 길에서 뻐꾹, 인파 속에서 얼굴이 지워질 때 뻐꾹, 시답지 않은 시에 뻐꾹, 애인을 공유하며 뻐꾹, 등 돌리고 자는 그대 돌아눕기를 뻐꾹, 집안에서도 길을 잃어 뻐꾹
비닐 창문 사이로 바람이 샌다 뻐꾹, 뻐뻐꾹
뻐꾸기의 나
내 안에 자라는 나의 뻐꾸기
<시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 살고 있을까.
누구에게나 선입견과 주장은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대상에 대하여 선호도와 무의식적인 차별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기에 지배와 피지배가 생기고 약자는 사회 전역에 뿌리처럼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파생되는 불안과 우울은 일란성 쌍생아인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에는 새가 자라고 있다. 편견의 그림자가 깔린 세상, 그 혼돈 속에서 나는 둥지를 꿈꾼다. 그러나 침울은 콘크리트 거리에 어둠으로 내려앉고 공허가 이리저리 바람에 끌려다닌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시는 연민으로 태어나며 진눈깨비처럼 질척이는 이야기다. 빈 둥지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에 귀를 대고 눈물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저무는 저녁 같은 시를 꿈꾼다. 흩어졌던 이들이 모여 쉬는 둥지의 평온을 향한다.
*박수빈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활동 시작. 《열린 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상명대 강사.
<작품론>
현대, 라는 현장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초상
김나영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은 그가 처한 시대의 기류와 정신에 민감해야 한다. 시의 출발이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출발한다 할지라도 그 시대가 처한 사회적인 흐름과 맥락을 거느리지 않는다면 시라는 옷을 걸친 감정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라도 언어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글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쓰는 자의 사회적 참여와 사회성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박수빈 시인의 다섯 편의 시를 읽었다. 각각의 작품에는 이 시대 사람들이 문명과 문화에 반응하고 소비하는 다양한 현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고 사는 현대인들이 모습을 통해서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환기되는 주제의 동선을 넓히고 있다. 박수빈 시인의 시는 사회적 문맥과 밀접하게 물려 있다. 이런 태도에서 박수빈 시인이 이 시대 우리가 공유하거나 문제시 삼는 관심과 방향을 민감하게 읽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박수빈 시인이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은 대부분 불편하거나 불화한 상태의 소재를 우리 앞에 던져놓고 스스로 묻다가, 그 현상들과 갈등하거나, 대치하거나, 질문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시의 전개방식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질문이 확산되는 전개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그 감정의 파동을 따라가 보자.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담쟁이는 울그락불그락 건물을 핥고 비둘기는 건너편으로 종종걸음 전봇대가 제 목에 전선을 감고 있다 그 아래 구부정한 차림의 가방이 드르륵 연신 핸드폰에 조아리며 미안하다며 걷는 저이, 허리를 굽실 몇 걸음 떨어진 내 발치에 떨어지는 죄송이란 단어가 낙엽처럼 뒹군다 목소리 사이로 그림자 사이로 내 안을 빗금으로 횡단하는 가로등 불빛
말 건네지 않아도 저이가 짐작된다 이룰 수 없는 꿈이거나 사랑이거나 던지는 서류에 이면지처럼 구겨졌을, 잊으려 술을 마시고 전봇대 붙잡고 고해성사를 할지도 모른다 끼니는 생을 건너는 자에게 놓인 한 덩이의 슬픔, 고봉으로 눌러 퍼 올리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저물녘 구름
울음은 해 지는 쪽으로 눕고 마감일을 넘긴 청구서가 쌓일 테지 옷깃에 얼굴을 파묻은 저이나 나나 결국 순환선을 타고 제자리 맴도는 건 아닌지 진눈깨비는 눈썹에만 쌓이다가 눈물로 스민다 오토바이에 배달되어온 고독이 끼익 멈춘다 하염없이 미끌거리는 길목
―「西로 겹치는 울음」 전문
우리는 누구나 삶의 용병들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야 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과 실적을 평가받아야 한다. 이에 반해 인간성은 외면당하거나 소외당하는 환경 속에 살아간다. 그래도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밥벌이를 위해서, 이 대열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기계처럼 견딘다.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삶이라는 직업’이 “끼니”를 앞세우고우리 목을 죄고 흔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극심한 피로감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앓는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병철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노동의 시간과 소비의 시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는 말로 진단 내린 바 있다.
이를 시사하듯이 박수빈 시인의 「西로 겹치는 울음」에 등장하는 “저 이”의 행색이 처연하다. “구부정한 차림의 가방이 드르륵 연신 핸드폰에 조아리며 미안하다며 걷는”모습은 불안한 도시인의 초상을 대변하고 있다. “허리를 굽실 몇 걸음 떨어진 내 발치에 떨어지는 죄송이란 단어가 낙엽처럼 뒹군다”라는 대목에서 그의 처지와 입지를 짐작하게 된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보아 퇴근시간이지만 그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상을 향한 시적 화자의 접근 태도다. 퇴근 시간 지척에서 자연스레 엿듣게 된 “저 이”의 통화 내용과 태도를 관찰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 이나 나나 결국 순환선을 타고 제자리 맴도는 건 아닌지”라고 쉽게 감정이입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西로 겹치는 울음」이라는 제목에서처럼 “저 이”와 “나”가 ‘서로’ 같은 종류의 울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임을 동음이의어의 중의적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은“저 이”와 “나”이지만 결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환기하고 있다.
주홍글,씨들을 먹는다
무슨 죄가 이리 둥글까
비가 오지 않는 생이 더 달달해졌나
죄의 씨앗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새를 어루만진 몸이 가려워
휘파람에 열매는 꽃을 품고
날 선 말들의 속죄양 주홍글,씨
뱀의 혀들이 담을 넘는다
언어의 발기부전
끈적한 저 핏빛
―「무화과」 전문
무화과無花果는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과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과일로 알고 먹는 부분은 꽃턱, 꽃줄기, 꽃받침 따위에 해당하는 가과假果부분이다. 『구약성서』에는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 쓰인 나뭇잎이 바로 무화과이며 지혜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금단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바로 무화과라는 설이 있다.
박수빈 시인도 무화과에서 ‘금단’과 ‘지혜’를 동시에 읽어내고 있는 중일까. 무화과에서 과육으로 보이는 부분이 발화하지 못한 꽃이라는 점에서 ‘금단’을 파기한 죄의 결과라는 상상이 “새를 어루만진 몸이 가려워//휘파람에 열매는 꽃을 품”게 되었다고 본다. 밖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는 꽃의 모양새가 금기를 어긴 결과라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이 시는 출발한다. 그런데 이 무화과의 비유를 통하여 정작 글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주홍글,씨들을 먹는다”라는 문장에 쉼표를 삽입해서 글씨를 읽고 곱씹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출발이 죄를 맞본 “주홍글, 씨”인 까닭에 충분히 문장은 충분히 발화하지 못하고 마침내 문장들은“언어의 발기부전”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낯선 상상력이 돋보인다.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말처럼 우리는 글로써 도에 이르려고 한다. 지혜를 얻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언어는 글 쓰는 이의 의도대로 잘 포획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언어라는 물질성, 그 자체의 한계와 그 언어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의 한계, 그 지점에서 언어는 “발기부전”에 머물 때가 많다. 그렇지만 그 불안한 언어로써 지혜의 강을 건너갈 수밖에 없는 글과 글 쓰는 사람의 운명, 이 시는 그 간극을 그려보고 싶었던 걸까. 아쉬운 점은 이 시의 전개과정과 배치 순서다. 도입을 “새를 어루만진 몸이 가려워” 부분에서 시작하고, “비가 오지 않는 생이 더 달달해졌나/죄의 씨앗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부분을 삭제했더라면 정황의 순서가 훨씬 설득력을 확보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화과를 글쓰기에 빗댄 낯설고도 참신한 발견이 이 시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맹인가수의 오래된 노래를 듣는다
두 눈을 왼편과 오른쪽으로 나눈다
옳다 그르다 빛과 그림자
불같던 시절
어느새 희끗해진 머리카락
서로 다른 두 색이 아파왔다
옳은 것이 그르기도 하고
구별하는 순간 한쪽 눈은 빛을 잃고
경계는 어떻게 사라지고 미끄러지는가
편을 가르는 눈빛이나 말은 아침이 밝아도 나무
녹음이 울울창창해도 헐벗은 밤
잎이 흔들리고 이상한 바람이 가슴을 휘젓는다
산으로 가는 배처럼 당신과 나
―「오드아이」 부분
우리의 인식과 사고 안에는 고정관념에 가려져 고착화되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다. 이 고정관념은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분법적 사고이다. 이분법적 사고의 대표적 사례로 종교, 인종, 이념, 성격, 성별 등이 있다. 이 사례의 속성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서 시작된다. 즉 나 중심적인 사고나 인식이 ‘내 생각은 맞고, 너의 생각은 틀렸다’라는 편파적인 사고를 기르게 된다.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할 때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은 다르다’라는 인식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세상의 여러 가지 현상들은 ‘맞다’↔ ‘틀리다’의 이항대립구조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은 차별로 분류할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니듯이 사물의 차이와 고유성을 인정해야 편파적이거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박수빈 시인은 ‘오드아이’라는 제목으로 양가적 시선과 감정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분법적 사고의 고착화된 면모가, “왼편/오른쪽”, “옳다/그르다”, “빛과 그림자”, “당신과 나”라는 대치적 상황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현상들 중 특히 “당신과 나”의 문제에 집중하며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당신과 나”로 짐작되는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삶을 공유하기에 서로 ‘허물’이 없어야 바람직하다. 서로 경계가 허물어져야 이상적인 관계다. 그러나 “불같던 시절/어느새 희끗해진 머리카락”에 이른 그들의 모습은 “녹음이 울울창창해도 헐벗은 밤”이고 “산으로 가는 배처럼 당신과 나”는 시간이 쌓여도 경계를 허물지 못한다. 한 몸에 두 개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 경계가 “사라지고 미끄러지”지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흘러도 어긋나는 시선의 차이는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어도 남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당신과 나”는 영원히 섞일 수 없는 타인, ‘부부’라는 울타리는 얼마나 견고하고 오래된 추상인가. 우리는 언어의 감옥, 관습의 감옥, 제도의 감옥에 갇힌 경계인들이다. 그 갈등의 폭이 제시하는 문제의 중심에 이 시는 서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주를 식초에 녹여 먹었다 양귀비의 피부는 어린아이의 맑은 오줌 덕분이다 태반주사를 맞고 곰쓸개를 먹고 사슴피를 마시는 사람들 모피코트에는 수백 마리의 붉은 피가 스며있다 반려견 재롱이는 목소리를 거세당하고 네팔산 카펫에는 미처 자라지 못한 시커먼 손톱들이 박혀있다 일류기업에서 별을 단 임원은 0.2%이며 60%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곳곳의 우로보로스Ouroboros*
문명은 깨뜨리며 지탱하는 킬링필드
(…중략…)
나는 어릴 때 오종종 봉숭아 물들이고
지금은 지갑에 물들고
훗날에는 무엇에 물들까
―「우로보로스」 부분
신의 버림을 받은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던 것처럼, 현대인들은 욕망이라는 덩어리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존재들이다. 문명의 수레바퀴 위에서 욕망의 단맛을 알아버린 현대인들은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혀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려가는 존재들이다.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는 구멍 뚫린 아가리와 같아서 욕망이라는 감각은 늘 허기지다. 그래서 욕망은 욕망을 부른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속성, 그 이면에는 허무와 초조와 죽음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하지만 한번 올라탄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내리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초상. 지젝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신체의 의지가 아니라 더 큰 타자大他者에 종속한다. 즉 우리의 욕망은 개인적인 의지의 발로가 아니라 사회의 무의식이 주입된 결과이다. 그래서 사회가 존속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알면서도 욕망의 빨간 구두를 벗을 수가 없다.
「우로보로스」는 도입부터 과잉된 욕망의 다양한 실태를 고스란히 나열하고 있다. 마치 장면들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의 수위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실험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현상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문명과 과학, 의술의 발달로 욕망이 부추기는 행복추구권의 속도는 마침내 윤리적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문명의 발달은 발전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제동장치가 없는 욕망의 속도를 타고 인간은 욕망은 어디까지 달려갈까. “나는 어릴 때 오종종 봉숭아 물들이고/지금은 지갑에 물들고/훗날에는 무엇에 물들까”라는 대목에서 욕망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사회적 현상과 분위기에서 자신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견한다. 끊임없이 욕망을 펌프질하고,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이 우로보로스Ouroboros 와 겹친다. 박수빈 시인은 이 시로 염려 섞인 묵직한 숙제 하나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과 욕망의 방향은 이 방향이 맞을까?’라고.
둥지는 그늘이 낳은 배경
그림자를 더블 클릭한다
내 안에 자라는 나의 뻐꾸기와
뻐꾸기의 나
날마다 알람 뻐꾹, 혼자 밥 먹고 혼자 잠들 때 뻐꾹, 플라스틱을 만질 때 뻐꾹, 검정인가 하면 핑크, 깃털인가 하면 다시 보라, 포커페이스 뻐꾹, 날개를 펼치기 전에 뒤뚱이는 길에서 뻐꾹, 인파 속에서 얼굴이 지워질 때 뻐꾹, 시답지 않은 시에 뻐꾹, 애인을 공유하며 뻐꾹, 등 돌리고 자는 그대 돌아눕기를 뻐꾹, 집안에서도 길을 잃어 뻐꾹
비닐 창문 사이로 바람이 샌다 뻐꾹, 뻐뻐꾹
뻐꾸기의 나
내 안에 자라는 나의 뻐꾸기
―「인공지능」 전문
20세기 3차 산업혁명 시대가 일으킨 정보통신기술IT의 발달에 이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로봇공학과 인공지능AI의 혁신적 기술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진입한 세계는 사이보그cyborg의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인류의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서 2016년 ‘이세돌 대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대전’은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본 세기의 격돌로 기억하고 있다. 인간과 로봇이 지능으로 대결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놀라움과 우려를 동시에 경험했다. 그전까지는 인간이 로봇을 이용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로봇이 인간과 대등한 입장에서 지능을 겨누는 단계까지 왔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인공로봇은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분석력으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이 일을 하던 자리를 밀어내고 로봇이 꿰차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인류의 운명은 일자리와 존엄성을 위협받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이 정도라면 인공로봇에게 인간이 지시를 받고 지배당할 미래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주객이 전도될 이런 예견이 섣부른 기우에 그쳐야 하겠지만 말이다.
「인공지능」에서는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용하고 편리를 제공받는 것 같지만 동시에 지배를 받는다. 시적 화자는 “뻐꾹”소리로서 신호를 보내는 인공지능에 의해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뻐꾸기의 나”로 살아간다. 내 의지보다는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를 받거나 조종당하고 사는 모습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적 화자는 인공지능에게 잠식되어 가고 있다. “내 안에 자라는 나의 뻐꾸기”라는 부분에서 인공지능에 길들어져 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지를 억압하고 삶의 주체가 되어 인간을 조종한다. 이 시는 암묵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소외되고 배제되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앞서가는 이 공간에는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사람의 온기가 제거되어 있다. 마침내 인공지능에게 자리를 내어준 공간에서는 “집안에서도 길을 잃어”버린다. 한편 이 시에서 주목이 가는 형식이 명사형 어미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입지가 소멸되어 가는 드라이한 풍경과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 선택이며 장치다. 이 형식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단절되어 가는 인간의 입지와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박수빈 시인이 선사한 다섯 편의 작품을 읽었다. 우리는 마치 작품들을 관람(?)하는 듯했다. 이 시대의 민감한 현상들을 현장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이 이 시대 보편의 장場 안에서 우리가 앞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데 의미가 있다. 박수빈 시인은 사회적 연대와 책임, 그리고 역할을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박수빈 시인은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고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불편한 징후들을 주로 읽어냈다. 그것은 도시인의 초상, 사물화 된 언어의 속성, 편견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 물질만능주의와 욕망의 수위, 문명과 발달과 이에 따른 인간성의 소외와 상실 등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시의 전개방식을 통해서 박수빈 시인이 구사하는 감정의 추이와 감정의 파동을 살필 수 있었고, 양가적 감정의 상태, 혹은 경계에 서서 시를 견인하는 과정도 살필 수 있었다. 박수빈 시인은 이 도시의 징후들을 검색한다. 현대인들의 초상을 내면화하고 위무하기 위해서 마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김나영 1998년 《예술세계》로 등단.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 『홍난파 수필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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