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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집중조명/황혜경/신작시/역력하다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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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집중조명/신작시/황혜경/역력하다 외4편
역력하다 외4편
황혜경
“꼬마의 기억 속에서 자라나며 살고 싶어”
노고에 대해서 보장되지 않는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면한 것에 대해 입 다물어야 하는 현상
“끊길 때라 끊긴 거야”
바라보는 곳마다 날마다 부재를 증명하는 눈도장이 찍히고
체념하는 캐릭터는 넘지 못하는 담장에서 시작되었다
역력한 심증
그 벌레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디서부터 기어온 걸까 그 벌레는 언제부터 나의 눈이 훤히 볼 수 있게
회피하는 캐릭터는 넘지 못하는 어둠에서 시작되었다
철천지원수도 제자리에서 북돋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버릴까 금지 이후에 허하노라 풀어주는 사계절 어느 계절에도 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해치는 시간 같이 가는 것들 모두 중요한 동반자가 된 것 같아 어엿이 반려라고 해야 하나 인정하면 외로움이 주춤 그리움도 기다림을 지워갈 수 있을까
“꼬마의 시간 속에서 나보다 오래 살고 싶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서 노래가 시작되고 소음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대낮에 죽은 아이들
발목에 사슬을 차고 끌려가는 저녁의 슬픈 기색
수긍하는 캐릭터는 순응하는 게 역력하다
호응하는 캐릭터는 기다리는 게 역력하다
멀리 떨어져서 말을 걸었는데
먼저 가있는 할머니가 마중 나와 부르신다
“아가, 오고 있냐?”
되레
나는 나를 나와 빠르게 나눌 수는 없는 사람이죠 택시는 빨리 갈 수 있지 그러니까 되레 버스를 타야지 되레 걷거나
같이 있는 게 좋다고 그냥 같이 있을 순 없잖아 되레 중요한 이유를 대봐야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너는 네가 아니지 않지? 방을 나누듯이 틀을 만들어 내가 나를 밀어 넣고 너를 놓는 소리
사랑한다면서 되레 볼 수 없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
죽은 것들을 붙잡고 우는 어른들의 맥을 짚어준다 유연한 아이의 눈치가 되레
아프다면서 사향소심장구이물범고기젤스프를 먹는 어른들
폐만 끼치는 날들 자멸하려 했죠? 모멸은 끝난 후인가 생각하느라 자멸은 되레 소멸하지 않는다죠
울다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웃다 잠들어
유린의 동의어를 찾는 너에게 되레 짓밟힌 너를 찾아 재워주고 싶었어
힘
그러면 발레슈즈를 신고 발끝에 모두 싣고 짓누르면서
하중을 견디라고만 하는 것 같지
거기까지 가면 뭐가 있어요?
비의 종착 구름의 안착에 대해 들려줘
불안정한 경로에 진입할 때마다 하강하는 것이 하강을 더 위로했지
불을 끄고 누웠는데 불이 켜져 있을 때 나를 제일 믿지 못하는데
나는 죄와 유사한 디자인
손톱이 자라 출생을 할퀼 때 유감의 외관 우뚝 서고
살을 찢어서 살이 부족한 내게 먹였지
말끔하게 피의 흔적을 지우는 개수대
주린 밤의 여자와 구린내
잘못 들어선 새는 부리가 깨져 먹지도 노래하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걸음을 신호등이 자꾸 쪼개고
얘야, 뛰지 말고 차는 미리 가서 기다렸다가 타거라
엄마가 옳았다 먼저 나타나야지 쫓기지 말아야지
나는 기둥 뒤에 숨어 기둥만 노래하고 자꾸 상심은 자꾸,의 반복에 기대는데 자꾸,가 고백하기 전에는 나를 몰랐는데
자꾸 당신이 불러주는 rain 치치쉬쉬츠츠우우우칙칙샤샤
작용하고 있었어 씻기네
자꾸 자꾸 당신이 불러주는 rainbow
방싯방싯 방실방실 알록달록
깜냥깜냥 작용하고 있어
모국母國
삭제될 아이가 반짝반짝 작은 별을 배우던 새 학기였다
제외될 집들 근처를 배회하는 걸음들
차라리 열손가락 깨물지 말아요 아홉 개만 깨물어요 광명을 위해 체념하겠어요 당신이 자수해요 서운한 채로 나갔다 돌아오는 마음에 통 병원은 없고
삐뚤빼뚤 뾰로통하다
기울어지거나 흔들리는 모양이거든요
청춘의 바퀴들 제 속도로 굴러가다가 급커브, 알면서 당신은 낭떠러지의 고비를 모른 척했다 알면서도 당신은 충혈된 눈을 못 본 척했다 불신의 요인이 되어가는 당신들은 항상 발등을 찍고 나는 지금 홀로 커브를 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전하고 싶은 겁니다
다친 새의 커다란 날개
거친 퍼덕거림의
끝에서 끝까지
안개가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흰 강낭콩이라 부르면
왜 나는 쥐도 새도 아닌 것이 떠올라 나는
새도 아니면서 날아다니는 게
복蝠의 복福일까
손가락은 늘어났고
날개가 되었다지
휙,
휙,
휙,
박쥐의 비행은
네가 그린 구름과 관련이 없고
박쥐의 밤은 식사의 시간
열어주는 날개
펼쳐지는 밤
낮의 너는 너를 의심하지 않아서 밤의 나는 너를 의심해 네가 너를 의심하지 못해서 밤에 나는 너를 어두운 내가 대신 의심해 너의 두 마음에 끈기 있게 거꾸로 매달려 피가 쏠려 질려
왜 나는 검은 것에서 흰 것을 보고 흰 것에 왜 나는 검을 것을 적용할까 나는
동굴박쥐와 집박쥐는 사는 곳이 다르지
동굴박쥐를 따라서 동굴에 가보고 집박쥐의 집을 살피듯이
떠돌다 돌아온 밤에도
흰 강낭콩 흰 강낭콩
흰 강낭콩이라 부르면
왜 나는 쥐도 새도 아닌 검은 것이 떠올라 나는
껍질들은 까지고
불순물은 걸러지고
인색한 우울
하얗다
*황혜경 201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작품론>
더해지는 밑그림으로
―황혜경의 시 읽기*
소유경
1. 기억 수집가의 유랑기
닿을 수 없는 성을 눈앞에 둔 측량기사의 기분이라 해야 할까. 지금 내 앞에 놓인 황혜경의 시가 본 적 없는 그 성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쉽지 않았던 독해는 또 다르게 말해볼 수도 있다. 한 편의 시를 블라인드 커튼이라고 생각해보자. 이때 시의 문장은 커튼의 날개와 같을 것이다. 황혜경의 시는 그 사이를 들여다보려고 할 때마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려는 듯 금세 틈새를 메워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황혜경 시의 행간을 단번에 읽어내기란 거의 실패로 돌아가는데, 시인이 읽는 이에게 분명한 의미나 이해의 카드를 쉽게 넘겨주지 않는 건, 아마도 “연상聯想은 형통하다”(「도트Dot」)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가 주로 개인적 기억의 연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봄이면 반복되는 “으뜸딸기 작목회”(「도트Dot」) 생각이랄지, 내내 맴도는 “하드보일드 섹시 메탈 알몸으로 하드보일드”(「맴돈다」)와 같은 말은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단번에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황혜경의 시는 일종의 단상처럼 느껴지거나, 더러 미완의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시를 읽으며 스스로 독법의 한계를 거듭 의심해보았음을 인정한다). 어쩌면 시에서 어떤 순서와 형식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전후좌우/순차적인 방향/구별 없이//이해하기로 하면 이해가 된다”(「지워지는 인칭」), “형식에 위배되거나 방식을 벗어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시간에 내가 적응하면 되는 거지 네 시간에 네가 적응하면 되고”(「이후의 서술」))이 황혜경의 시를 읽는 정확한 독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름의 갈래를 따라 이해의 끝자락에 닿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편적인 시로는 즉각 이해하기 힘든, 이 기억의 편린과 같은 시를 한데 모아두고 가만히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깝게 출간된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는 황혜경의 두 번째 시집인 동시에 두 번째 기억 모음집이기도 하므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신작시를 마저 읽어낼 수 있는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안엔 이미 우리보다 먼저 기억 속을 유랑하는 자가 있다. 무엇을 찾아, 무언가를 향해 가는 황혜경의 시적 주체. 또 한 번 성을 향해 다가가는 측량기사의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선다. 그러니까 이 글은 황혜경의 시를, 그의 시적 주체를 따르는 나의 유랑기이기도 하다.
유랑의 길은 ‘나’에게도 쉽지 않은 것만 같다. “오로지 확정되지 않은 것은 떠도는 자의 방향”(「궤도軌道」)이듯 다음의 향방을 할 수 없으며, “돌아오는 길이 가고 있는 길 같고 가야할 길이 끝도 아닌 것 같”(「혐의」)은 기분은 왜일까. 그런데 잃어버린 방향만큼으로 문제적인 건 이 길에서 ‘나’를 지체시키고 발을 묶어놓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멀리 갔다가 허리에 묶인 고무줄의 탄성으로 되돌아오”게 하듯, ‘나’를 “원상 복귀”(「핵심」)시키고야 마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핵심도 고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놓여 있던 처음의 자리에서 이미를 넓혀가기 시작해 조금씩 옮겨 가면 1년 후와 10년 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멀리 갔다가 허리에 묶인 고무줄의 탄성으로 되돌아오는 나는 핵심의 바깥을 기웃거리다 원상 복귀를 하곤 하는데
벽에 못을 박을 때 너는 액자의 중심을 시선의 중심에 맞추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렸고
너는 못을 박아놓고 어디로 갔는가 없는 건 그런 건가 봐
무無의 핵심을 가르쳐주는 것이 그날의 핵심이었고
곧 십자가들이 불을 켜는 저녁이다 죄를 짓고 서성이다가
흔들리는 중심을 붙잡아주던 것은 그때마다 무엇이었을까
핵심은 쉽게 변하지 않아도 중심을 잡게 해주는 게 있다는 것을 이만큼 와서는 말해도 괜찮을까
―「핵심」 부분
그것은 ‘나’의 중심. 끊임없이 ‘나’를 “나에게 반복적으로 귀속”(「두루두루」)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건 “흔들리는 중심을 붙잡아주던 것은 그때마다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처럼 ‘나’의 중심을 이루는 축, 중심의 핵심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너’로 지칭되는 누군가가 박아놓고 간 못처럼 ‘나’를 단단히 잡아두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일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이 시만으로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가령 “나의 몇 겹은 누구의 것이었나”(「나의 철제 책상에 앉은 것은 누구인가」)와 같은 말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앞서 황혜경의 시가 기억의 연상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듯, 이 질문은 그러한 연상 작용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철제 책상은 나의 것인데/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철제 책상의 범위를 갖고 만다”(「나의 철제 책상에 앉은 것은 누구인가」)는 말은 계속되는 연상의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생각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물음은 “연상의 끝에는 내가 있다/나로 돌아온다”(「도트Dot」)는 말에서 해답을 찾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황혜경의 시에서 연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어 무수히 많은 생각을 지나 마침내 ‘나’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은 데카르트적 존재 증명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나’의 연상은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반복적으로 귀속시키고 지체시키며 또 붙잡아주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해석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나’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 보자. “나의 몇 겹은 누구의 것이었나”. 이 말에 전제되는 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는 시적 주체가 자신의 겹을 이루는 것이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깃든 너”(「베란다B」)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듯, 타인에 의해, 타인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나’의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어 이어지는 얼굴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얼굴은 망각의 세계에서 이제 막 떠오른 상想이라는 점에서 연상으로써의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억한다는 말은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린다는 말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기억은 일정의 생명력을 갖는다. 반대로 망각은 기억으로써 생명을 다한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시적 주체의 연상은 지나가버린 어떤 시간을, 존재를 기억한다는 점에서 생명력 있는 운동이자, 다시 생을 도모하는 시도와 같다.
이제 우리는 “어떤 시간이 완전한 과거가 되는 때는 언제인가”(「갱생更生」) 하는 물음에 닿을 수 있다. 어떤 시간이 망각 아닌 기억으로 소생될 때, 자꾸만 꺼내보는 기억으로 남게 될 때, 그 시간은 비로소 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연상만큼이나 쌓이는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나’를 붙잡아주고 돌아보게 하는 중심의 축이다. 이러한 기억이 말로, 또 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기록되는 건 ‘너’가 ‘나’의 손에 쥐어준 “definitely 단어 하나”(「끼리끼리」)처럼 분명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되레 중요한 것은 시인이 지워버린, 또는 고의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쌓여가는 의미들이다. “부분을 버리다보면 (스스로) 되어가는 바탕”(「다음의 바탕」)이 있다. 예를 들어 “왕관 아래 가난하고 멋진 모자”(「그 나무의 형용사」)라는 문장에서 ‘가난하고 멋진’을 지워보자. “왕관 아래 모자”는 시가 진행될수록 점점 수식의 부피를 늘려간다. 다만 읽는 이의 눈에는 여백으로 보일 뿐이다. 시의 말미에 이르러 기록된 부분보다 지워진 부분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이나 바탕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워지는 부분은 황혜경의 시에서 주어로, 인칭으로, 시공으로 확대되며 점점 시의 바탕을 넓혀간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는 것들, 과거이고 기억이자 시로 남은 것들, 마침내 여백으로 남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바탕은 황혜경의 시(세계)에서 유화의 밑그림처럼, 페이스트리의 결처럼 남는다. 여러 겹을 입었을 때야 진한 색을 가지고 짙은 풍미를 가지는 것들처럼 그의 시는 차분히 쌓여 점점 더 견고해지는 축을 만들어간다.
2. ‘되레’의 존재와 기억해야 하는 것
그러므로 신작시 또한 황혜경의 시(세계)에 더해지는 밑그림일 것이다. 다만 다섯 편의 흐름에서 시적 주체가 천착하고 있는 기억은 죽은 이에 대한 것으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역력하다」에서 ‘나’는 “꼬마의 기억 속에서 자라나며 살고 싶어”, “꼬마의 시간 속에서 나보다 오래 살고 싶어”라고 말하지만, 이윽고 “영문도 모른 채 대낮에 죽은 아이들”의 등장과 “먼저 가있는 할머니”가 마중을 나왔다는 점에서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기억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되레」에서도 “죽은 것들”로 호명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죽은 것들”을 붙잡고 울면서 ‘되레’ 죽음을 소비하는 어른들의 태도다.
같이 있는 게 좋다고 그냥 같이 있을 순 없잖아 되레 중요한 이유를 대봐야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너는 네가 아니지 않지? 방을 나누듯이 틀을 만들어 내가 나를 밀어 넣고 너를 놓는 소리
사랑한다면서 되레 볼 수 없을 때에만 사랑이 가능하다
죽은 것들을 붙잡고 우는 어른들의 맥을 짚어준다 유연한 아이의 눈치가 되레
아프다면서 사향소심장구이물범고기젤스프를 먹는 어른들
(…)
울다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웃다 잠들어
유린의 동의어를 찾는 너에게 되레 짓밟힌 너를 찾아 재워주고 싶었어
―「되레」 부분
시에서 ‘되레’의 변주는 경쾌한 리듬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마침내 “죽은 것들을 붙잡고 우는 어른들”에 와서는 “아프다면서 사향소심장구이물범구이젤스프를 먹는 어른들”이라는 아이러니에 닿는다. 아프다면서 더 많은 것들을 아프게 하는 어른들, 죽은 것들을 붙잡고 울면서도 또 죽음을 소비하는 어른들의 아이러니. 이 부분에서 ‘되레’는 생략되었지만, 바탕으로 남아있는 ‘되레’의 의미가 쌓여 보이지 않음에도 되레 두드러지는 효과를 낳는다. 「되레」에서의 ‘어른들’과 같은 ‘되레’의 존재는 「모국母國」에서도 발견된다. “제 속도로 굴러가다가 급커브”를 맞이한 “청춘의 바퀴들”을 목도했음에도, “당신은 낭떠러지의 고비를 모른 척”하고, “충혈된 눈을 못 본 척”한다. “불신의 요인이 되어가는 당신들”은 “아프다면서 사향소심장구이물범구이젤스프를 먹는 어른들”과 유사한 존재들일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을 짚어내면서도, 시인이 끝내 바라는 건 「되레」에서 마지막 ‘되레’의 쓰임이 그러했듯, 유린의 대상이었던 ‘너’가 “웃다 잠들”기를, “되레 짓밟힌 너를 찾아 재워주고 싶었”던 것이며, 고비의 순간에서 “지금 홀로 커브를 돌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과 기억들이야말로 “자꾸,의 반복”(「힘」) 속에서 황혜경 시의 지탱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 증명을 우리는 앞서 살펴오지 않았는가. 그의 기억을 신뢰하며 앞으로 더해질 밑그림이 황혜경의 시 세계를 더욱 단단히 할 것이라 말해본다. 지금 내 마음을 대신하는 시의 일부로 이 유랑기를 마치고 싶다. “내가 아는 기억 수집가는 윤기 나는 목소리로 되새기는 사람”(「말 못 할 겹겹의 흉부에 대해 말을 하려 할 때」).
*이 글은 황혜경의 신작시와 함께 그의 두 번째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문학과지성사, 2018)를 함께 살핀다. 이후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시의 제목만을 적기로 한다.
*소유경 2018년 <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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