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2호/소시집/박찬선/당간지주幢竿支柱 외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75회 작성일 19-06-28 11:18

본문

72호/소시집/박찬선/당간지주幢竿支柱 외4편


당간지주幢竿支柱 외4편


박찬선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는 것이


마음의 성전이 사라졌다. 이름과 함께 깡그리 사라졌다. 화려했던 단청도, 불이문의 계단도, 두툼한 방석 자리도 신생대의 뜨거운 화석이 되었다. 속 불은 꺼지지 않고 길을 열어 간다는데 무無로 돌리는 만용이 무섭다.


불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짚신이나 보따리 행낭은 삭아서 흙이 되었다. 야단법석의 진언은 깊은 잠에 빠져 진공을 이루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의 적막. 폐허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바람에 일어서는 풀 뿐이다.


심폐소생술도 응급처방도 쓸 경황이 없었다니 무심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빈자리가 한때 가득 찬 역사라는 것을, 개발 제한 지역이 정밀의 문화라는 것을, 귀가 어두웠다.


혁명의 깃발도 올리고, 여기가 큰 도량이라고 소리보다 큰 몸짓도 하고, 흐르는 강물 같이 심경도 읊지만 듣는 이가 없다. 보아주고 새겨주는 이가 없다. 시간의 뿔이 항변하듯 견고하게 솟았는데 흑백 사진의 슬픔이 넘친다.


여러 천 년 받들고 있는 것이, 하늘 향해 받들고 있는 것이 





다래끼



가끔 다래끼를 매고 들길을 걷는 꿈을 꾼다.
콧노래가 메꽃으로 피는


그런 날은 즐거운 일이 많다.
주고받는 말에도 풀냄새가 가득하고 들꽃 향기가 넘친다.


꾹꾹 눌러 쇠풀을 채우듯 담기에 급급해온 날들이
기억해야할 일기와 만남도 동공이 된 날들이
어깨에 매인 다래끼 입 큰 말씀으로 넘친다.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모두가 소중하다.
주워 담은 마른 쇠똥,  허리 굽은 엄마의 닳은 호미, 구멍 난 검정고무신,
밭고랑에서 나온 옥빛 사금파리, 연기를 남기고 사라진 아련한 기적소리…
꿈같은 꿈 같지 않은


벽에 걸린 다래끼에는 유년의 동화가 가득하다.
참매미 울다 날아간 하늘
다 비워준 이야기들





갈퀴



한때 갈퀴소리가 산을 울린 적이 있었어
가려운 데를 긁어준 거야.
덕지덕지 옷을 많이 껴입어서 숨구멍이 막힌 거야
벼룩이나 빈대 이 같은 미물에 시달린 적이 있었지
벅벅 사정없이 긁어 줘
빈대 잡으려다가 절 태운 이야기야 곳곳마다 있어
철학이 힘에 겨운 젊음을 짓누르고 있을 때
붉은 게릴라들의 야행성 전법이 통했던 자취방
기습당한 낮게 앉은 책상의 불꽃
지금은 높은 집들이 아슬아슬해
시원스럽게 손톱 줄이 나도록 긁어 줘
한겨울 소달구지에 높다랗게 실려 왔던 나무들은
겨울을 따뜻하게 했어
머리가 가려워 병원에라도 가봐야겠어
언어를 박박 긁어모으면 시원해질까
고열을 잠재운 겨울 산의 눈처럼 시원해질까
가려움은 목마름이야
고전은 목마름의 산물
굳은 밤의 관절은 갈퀴질을 함으로써 치유될 거야
대나무갈퀴가 사해辭海를 훑고 있어
천의 손이 이마를 짚고 있어





홍두깨



나무처럼 서서 생각에 잠긴다.


변신을 거듭해온 뜨거운 날
반질반질하게 닳으면서 살찌우는
빼곡하게 가득 차게 하는


안반에 내리는 저녁 어스름 함께 밀어
썰물 나간 벌처럼 시원하게 밀어
허기진 소반을 꾸려온 생애


긴 밤 잠들지 않는
호미 같은 엄마의 손이 바쁘다.


지붕 위 박꽃 하얗게 피는 여름밤
멍석에 누워 듣던 국수발 긴 이야기
은하수를 건너고


단단해야 버텨냈던
뭉쳐야 살아났던


옛집으로 가는 길을 연다.





거랑 주머니*



하늘弓과 땅乙의 이치가 담긴
아亞자가 수놓아진 거랑 주머니 메고 떠나고 싶네.
이른 아침, 늦은 저녁
이 마을 저 마을 낯익은 얼굴 만나 손 덥석 잡고
인간이 하늘이라는 통문 전하며 떠돌아다니고 싶네.
동수나무를 보면 손 모아 경배하고
큰 바위를 만나도 묵념을 올리며
길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가 모두 다 사랑스럽네.
셈이 닿지 않는 영겁의 시간 속에
지금 이곳에서 두루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와 내가 다름없이 하나 된 기쁨이려니
풋풋하고 변치 않는 생명으로 살아있음은
해 뜨는 빛의 공부를 할 수 있음은
길을 내듯 모시는 일, 맥을 잇는 일이려니
냇물을 만나면 검어져야 밝아지는 이치를 익히고
바람을 만나면 열 석자 주문*을 실어 보내고
풀꽃을 만나면 풀꽃 속으로 들어 향기로운 잠을 청하며
꿈속의 우복동*을 품고 살아야겠네.
목마른 새벽 덜렁 거랑주머니 매고 떠나고 싶네.
아름다운 산하 오르고 내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한울님의 얼굴이라고
거룩한 길상이라고 극구 칭찬하며 경배해야겠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상생의 둥근 원이 그려진 거랑주머니에
물과 구름, 바다와 달, 푸른 숲*을 가득 담아
물과 구름의 시, 바다와 달의 시, 새들이 사는 푸른 숲의 시
이런 자연의 시, 동녘의 시, 빛의 시를
한 편 한 편 꼭꼭 심어주고 싶네.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에 전해오는 70×32cm 크기의 휴대용 대垈로 신호 및 당호, 공문이나 편지, 통문 등을 수발하는데 사용했다. 바탕은 청색, 대 중앙에 적색, 황색, 백색의 원 안에 아亞자가 새겨져 있다.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상주에 전해오는 이상향, 유토피아.
  *水雲 최제우, 海月 최시형, 靑林 김주희의 호에서 따옴.    





<시작메모>


작금 다시 불붙는 인간의 소외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현장에서 밀려난 사물들이 참 많습니다.
우수에 젖어 있는 검은 얼굴들….


이들을 시로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습니다.
시는 경건하게 모시侍는 일이기에.





*박찬선 1976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돌담 쌓기』, 『상주』,『도남 가는 길』, 『우리도 사람입니다』. 시극 『때가 되면 다 된다』. 평론집 『환상의 현실적』. 탐구설화집 『상주 이야기』1,2 등. 흙의 문학상, 향토문학상, 이은상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장, 펜클럽한국본부 경북지역위원회장 역임. 현 한국시인협회 회원. 문협 부이사장.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