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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소시집/여태천/어디 있을까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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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소시집/여태천/어디 있을까 외4편
어디 있을까 외4편
여태천
불을 켜자 가족이 생겼다.
아이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고
아내는 외국어로 된 소설을 읽고 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는 적는다.
한글날인 오늘의 기온은 평소보다 낮은 것 같고
어제와 달라 보이지 않지만 구름은 조금 많아 보이며
유리창 밖에는 비스듬히 비가 내리고
바람은 알 수 없다.
2008년 혹은 2018년
아이와 아내는 기록하지 않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한국어를 쓰고 소설도 읽지만
밖에서건 안에서건
바람을 모르는
한 사람
불을 끄자
그는 세 명의 가족이 있다.
감을 수 없는 두 눈으로
버스를 타자마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았다고는 했으나 눈이 감긴 것인지
어떤 움직임을 그만둔 것인지
어쩐지
감겼던 두 눈이 잠시 떠졌다
이내 다시 감기는 듯 했다고
뒤척이며
알 수 없었다.
뭔가를 보긴 했으나
그게 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건 아니라고
애를 써가며 눈을 감지는 않았다.
바깥의 풍경을 곁눈질하며
무겁게 짓눌린 눈을 생각했다.
한없이 가벼운 눈꺼풀이었다.
무너지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털실처럼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하품이
어두침침한 골방의 유혹처럼
불편한 자리를 잊게 했다.
그 사이에 눈물인지 아닌지 모를
액체가 번지듯 새어나왔다.
눈은 내리자마자
낯선 사물 위에서 변신하고 있었다.
촘촘히 갈라지는
몸의 상태와 마음의 움직임
창문 너머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희중은 마지못해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어제 늦게 편지를 받지 않았냐고
연락이 잘 안 된다고
정확하게 발음했다.
말을 했다기보다 소리를 적어내려 갔다.
연락이란 사회적 현상이니
여의치 않으면 끊을 수도 있다고
마음의 크기와 쓰임과는 무관하다고
부치지 않은 게 어떤 전략이었다고 해도
한참 뒤에야 알 수 있듯이
편지는 그냥 그대로
연락일 뿐이라 생각한다면
이 세계는 여기서 저기로 건너갈 수 없는
열락 불가능이다.
목을 보호하는 듯
언제나 조심스럽게 소리를 다뤘다.
황금빛을 띠고 발갛게 달아오르는 소리
듣는 이들의 표정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무대 위 나비부인이었을 때도
그를 위한 빈 무대였을 때도
소리에 예민했다.
전략과 절약은 분명해
전략이 정략이 되어도
소리 소문도 없이
열락이 될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인숙에게도
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밀가루 반죽처럼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소리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과거를 잘 기억하는 동물이라도 되려고 했던 걸까.
달이 질 때까지 꼿꼿이 서 있었다.
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피가 피부를 뚫고 나갈 것 같았다.
뿔이 돋는 것처럼 아팠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누군가 죄를 전부 고백한다면 그걸
다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아스팔트를
한 번이라도 걸어봤다면
시간이야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거리란 거리는 모두 가깝지 않다.
뜨거운 입과 차가운 이마
하나의 단어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온 것들
이곳이라면 괜찮다.
멀리 처음을 생각했다.
없는 것보다 못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작메모>
살아 있는 것들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말이 없지만 근엄하게
글이 아니지만 정교하게
신호를 보낸다.
들을 수 없는 말과 읽을 수 없는 글.
말과 글이 아닌 것들.
살아 있는 것들은 때로 웃으면서 찡그리고, 놀라 눈물을 흘린다.
어색하고 불편하다.
저 표정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무섭고 외롭다.
조용히 천천히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이 된다.
그래도 신호를 보낸다.
근엄하고 정교하게
신호를 보낸다.
두렵고 슬프다.
*여태천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 제2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재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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