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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소시집/김승기/하심下心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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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소시집/김승기/하심下心 외4편
하심下心 외4편
김승기
호미곶으로 가자
바람 많은 날은
누운 소나무들을 보러
호미곶으로 가자
애써 맞서지 않고
바람 부는 방향대로 비스듬히
딱 그만큼의 각도로
우리도 등을 구부리고
그 나무들처럼
순하게 서있어 보자
희한하게 몸을 낮출수록
바다는 넓게 보인다
이곳은 집들도
소나무를 닮아
지붕들이 나지막하다
하심下心을 말하면
빙긋이 웃는 성자여
낮추는 게 아니라
원래 고심高心은
없는 거라고
호미곶으로 가자
등 구부린 소나무를 보러
아니, 우리도 등을 구부리러
호미곶으로 가자
두 번째 화살에 맞지 마라
얼마나 더 아파야
죽음에 이를 수 있나
축 늘어진 채
잠깐 졸다가 신음하다가…
어렴풋이 잠결에 드는 물음
차라리 저 고통에서
풀어주면 안 될까
16년의 인연을 껴안고
끝내 놓지 않는 여자.
새벽, 어렴풋이 잠결에
반야심경 소리가 들린다
언제 준비했는지
작게 염이 된 ‘故 초롱’
붉은 눈시울에
떨고 있는 작은 어깨
차라리 여자가 부럽다.
어쩌다 희주가 되었고
두 사람의 주인의 손을 거쳐
어찌 우리 집에 왔고
긴 세월 한 가족이 되어
하루하루 이야기가 되었고
일상이 되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
양지 바르고 붉은 꽃이 오래 피는
나무 옆을 택했다
잘 묻어주라는 당부를 받으며
새로 짠 작은 관 위에
젖은 흙을 덮는다.
같이한 무수한 순간들
이제 그것을, 추억으로
바꾸어야 할 시간이다.
지치고 흙투성이가 된 나는
뒤 곁에다 삽을 세게 던진다
남자는 이렇게 운다.
며칠 무거운 정적 속에
앞마루에 내놓인 보따리 하나!
여심이 조심스러울 뿐인데
입혔던 옷이니 밥그릇이니
태우지 않기로 한 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재생함에 그것을 넣고
너무나 빨리 돌아서는 발길
이제야 작별 인사를 한 거다.
그래, 그래,
죽음이라는 검은 천으로
한 삶을 몽땅 덮지는 말자.
촉觸
돗밤나무를 지나야 한다
가까이 갈수록 오싹해진다
굵은 나무 밑동에는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왕벌이 진액을 빨고 있다
눈을 떨구고, 어떻게 되겠지
발길을 옮긴다
하지만 내 귀는 또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데
벌과,
귀와,
언젠가 내가 쏘였을 때 할아버지 아버지가 쏘였을 때
그 순간들이,
다시금 만나고 있는 거다
벗어버리지 못하는 등짐 같은 유전遺傳
방생放生
답답하다
파도들은 내 가슴이 좁다고 야단들이다
아무래도 울진 죽변을 다녀와야겠다
단번에 찢어 놓는 시야
출렁거림이 빠져나간 자리
수평선을 향해
긴 의자 하나 앉힌다
내 속에 살지 못하고
저기 달려가는 하얀 짐승들
답답하다는 것은
자신이 너무 크다는 얘기다
한번 내달릴 때마다
한 줌씩 비우기
내생來生 즈음
다시 내게 온다면
텅~ 비어
큰 바다가 되어서 오라
동백처럼
나도 딱
조 때 즈음 가자
가지마다 만조滿潮
그 붉음
똑 꺾어서
그래도 이내
돌아봐지면
까짓것,
향일암 계단 위에서
아직은
피었다가
동박새 우는 그늘 밑에
흐드러지게
온몸으로
피었다가
거기서도 딱
조 때 즈음 가자
*김승기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역驛』,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문집 『어른들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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