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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신작시/허림/백년 애인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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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신작시/허림/백년 애인 외1편
백년 애인
허림
애인은 늘 넓은 치마를 입었다
많지도 않았지만 늘 단정했다
입을 것이 없던 시절은 다 벗어놓고 춥게 살았다
애인이 분홍꽃 치마를 입고 나들이 나서면
화사한 분향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누군가 푹 빠져 정분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애인은 그때마다 정분일 뿐이라고 했다
소문 잠잠해질 쯤
애인은 푸른 바탕에 땡땡이 무늬 치마를 입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치마 속에는
동글동글한 비린내의 무늬가 자라고
치마를 치켜 올릴 때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둥글고 반들거리는 땡땡이 무늬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한번뿐인 생 다 소진하고 싶었다
애인은 그런 줄 모르고
그늘 깊은 치마를 입고 온 갓 것들은 다 끌어들였다
내가 끌고 온 저녁은 캄캄하여
겨우 북두칠성이나 붙잡아 불 밝히는 것이어서
애인은 희미한 그늘을 펴고 앉아 내 얘기를 들었다.
빈정거리거나 비난하거나 헐뜯다가 점점 말 수가 적어지고
끝내 울다가 그 품에 잠들곤 했다
잠은 오래지 않았고 아침은 환했다
애인은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멀리 있었다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애인은 개의치 말라고 했다
속이 뒤집히더라도 참으라했다
그때마다 애인의 몸매는 곱고 황홀했다
치맛단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 무렵 떠돌던 소문도
나뭇잎처럼 날리고 바스라졌다
애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애인은 떠나지 않는 존자다
떠나는 것은 떠난 자의 몫이다
그 말을 내가 내게 했다
오늘은 치마를 다 벗은 애인을 본다
북어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단단해지는 생이 있다
오래 묵을수록 장작개비처럼 썩지 않는 말이 있다
광 바람벽에 걸어둔 북어
할 말 많아 아직도 다물지 못하는
당신, 그 속에 걸어둔 말들 그렇겠다
말도 쌓이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인데
얹힌 듯 답답하다는 말이 그럴 것이고
죽이라느니 지긋지긋하다느니
부대끼며 살아온 마음 바람벽을 바라보다가
비쩍 마른 북어를 꺼내
퍽퍽 두들겨 팼다
날은 자주 흐렸지만 눈이 오지 않는 섣달 겨울이였다
*허림 1988년<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심상으로 등단. 시집 『말주머니』, 『울퉁불퉁한 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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