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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책·크리틱/전영규/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이야기-김언과 김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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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책·크리틱/전영규/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이야기-김언과 김현의 시
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이야기-김언과 김현의 시
전영규
1. 다시 한 번,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누군가가 우릴 사랑한다는 생각은 우리는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건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러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돼.
아니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죽게 되면
고통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괴롭다는 건데…….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마누엘 푸익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두 남자가 감옥 안에 갇혀 있다. 한 남자는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검거된 정치범 발렌틴이고, 다른 남자는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수감된 동성애자 몰리나다. 무료한 감옥 생활을 잊기 위해 몰리나는 자신이 본 영화 이야기들을 발렌틴에게 들려준다. 삶이 내게 준 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투쟁뿐이라고 주장하는 발렌틴은,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몰리나를 무책임한 몽상가라고 비난한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그들은 감옥이라는 공간 안에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현재의 순간만을 즐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극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 발렌틴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 몰리나. 그들은 범법자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하는 질서나 관습에 순응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을 일삼는 발렌틴이나, 단지 성性이 같을 뿐 ‘그’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몰리나. 사는 동안 이유 없는 차별과 부당한 대가를 받아야 했던 그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의 가혹함과 삶의 무력감을 실감하며 그들은 알게 된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로가 닮아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결국엔 사랑이었다. 나로 인해 고통받을 누군가를 위해 내가 살고자 하는 일. 그렇다면, 그들의 만남과 사랑을 시詩에 대입해본다. 시야말로 범법의 언어다. 사회 질서의 규칙과 법률을 부정하거나, 상식에 연연해하지 않을 자유를 우선으로 하는 시인의 의지가 시를 이룬다.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직전의 말씀을 거느린 태초의 문장을 향해 모든 것을 건 자와, 혁명에 아니라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느 이반과의 사랑 이야기. 그들의 사랑이 이곳을 향해 보이지 않는 혁명을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당신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김언과 김현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신들 둘은 모두 선택된 사람들이야. 사랑은 바로 그런 거야.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
2. 당신이라는 언어를 대신 살고 있는 발렌틴: 김언, 『한 문장』(문 학과지성사, 2018)
그는 이미 나를 살고 있다. 나를 대신하여 너를 버리고
그를 버리고 나를 삼고 있는 그에게 내가 전해줄 말은 딱히 없다.
이미 나를 대신한 나이므로
―「고용」중에서
시인의 전위는 당신이라는 언어를 대신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당신이라는) 문장은 대상이 형상화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직전의 말씀을 거느린 태초의 문장(당신)을 향해 시인은 모든 것을 건다.
김언의 시를 사건 시학이라고 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시인의 생각은 언어는 단지 대상을 재현하는 도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언어는 대상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왔다. “이보다 명확한 사건을 본 적이 없다/사건 때문에 문장이 생기는 게 아니라/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이보다 명확한 사건을 본 적이 없다」, 「소설을 쓰자」, 민음사, 2009)처럼, 시인은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라는 명제를 전제로 일종의 언어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 『숨쉬는 무덤』(천년의시작, 2003)을 시작으로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4), 『소설을 쓰자』(민음사, 2009), 『모두가 움직인다』(문학과지성사, 2013)에 이르기까지. 대상보다 먼저 발생하는 언어의 사태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하는 시인의 실험은 오래도록 이어져 있다. 문장을 향한 시인의 길고 외로운 사투가, 어느덧 다작을 이루며 언어의 미학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자”라고 외치는 시인의 도발은 이전의 김수영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의 언어가 전위를 이룬다. 시인에게 전위란, 대상을 위해서라면 금기를 위반하거나 통념을 전복하는 상상력을 시작詩作으로 이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을 시로 이행하는 건, 현실에서는 일종의 범법 행위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시단은 자유의 이행을 바탕으로 한 낯선 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행과 요설 사이에서 김언의 언어는 순수한 전위의 사태를 이어나간다. 시인의 시가 근거 없는 장광설이나 무책임한 언어 유희로만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사랑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시는 태초의 문장으로 남아 이미 나를 살고 있는 당신에 대한 사랑의 헌사다. 당신에게 먹히는 “인육이 되는 일.”(「장래희망」) “당신 대신 투쟁하고/당신 대신 일체감을 느”(「등록」)끼는 일. “당신의 도착. 당신의 기척. 당신의 웃음. 당신의 있음과 없음. 있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없음.”(「시인의 말」)을 대신하는 언어. 이제 시인의 문장은 영원히 함께하는 당신이라는 말을 향한다.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지금」 전문
현재의 순간만을 즐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던 발렌틴은 깨닫는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투쟁하는 일. 사건보다 먼저 발생하는 문장을 향해 온 몸을 바치는 일. 당신이라는 언어를 대신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을 말하는 일이라는 것을. “지금이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말한다는 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는 일. 이것이 당신이라는 언어와 영원히 함께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짧게 짧게 순간을 바꿔간다.”(「중지하는 사람」)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순간을 바꿔가는 세상처럼, 시인이 구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내가 그것을 말하는 동안에도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대상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먼저 존재하거나 움직이는 언어에 대한 나의 한계를 실감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인은 시집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한 문장”이 되고자 한다. 언어와 대상 그 ‘사이’, 대상이 발생하는 그 ‘순간’을 아예 살아버리고자 하는 강력한 선언인 것이다. “문장 혹은 세계. 그 자체로 세계인 문장”(「詩도 아닌 것들이」)처럼 “한없이 자유로운 범사”가 되는 일. 또는 “범사의 일부를 이루는 고유한 익명”(「내가 없다면」)이 되는 일. 당신이라는 언어를 대신한다는 건,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점 있다는 것을 언어로 증명하는 일이다.
시인은 어떤 단어를 동원해도 말 할 수 없는 그 지점이 “무심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한다. 최초의 무심과 최후의 무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말은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면서 말한다.”(「너로 인해」) 이미 나를 살고 있는 (당신이라는) 언어를 향해, 시인은 ‘지금 이 순간’인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말한다. “모두 한 문장이다.”(「한 문장」)
3. 투쟁하는 몰리나: 김현, 『입술을 열면』(창작과비평, 2018)
이반
나는 혁명이 아니라 사랑을 들려주마
―「박물」 중에서
감옥에서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자신이 봤던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키스를 하면 표범이 되어버리는 저주에 걸린 표범여인 이야기.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진 레지스탕스 여가수 이야기. 아픈 연인의 수술비를 위해 몰래 몸을 파는 여인의 이야기…….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자신의 태도를 위험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대답한다. “내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 내가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한 필요는 없잖아. 내가 미치기를 원해? 하긴 난 이미 미친년이니까.”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하기에는 이미 너무 미쳐버린 몰리나처럼, 시인은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도 미칠 만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말이다.
상영 시간 내내 블로우잡을 받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짧은 단편영화처럼, 자신도 미소년 다섯 명에게 자지를 빨리는 한 남자의 얼굴을 찍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블로우잡Blow Job」) 내가 없다면 더욱 온화하고 행복해질 연인 세브린느의 인생을 위해 권총자살을 하는 블레이크의 이야기.(「소설을 써라, 소설을, 소설 마지막 날들에서 블레이크는 푸른 장갑을」) 세계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아 연인을 기억하는 기계인간 이야기.(「최후의 얼룩얼룩」) 자줏빛 비가 내리는 여름의 텅 빈 교실에서 처음으로 동성연인의 성기를 빨던 나의 첫 경험 이야기.(「늙은 베이비 호모」)
김현의 첫 시집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은 위와 같이 영화를 소재로 한 시편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 그림이나 사진 같은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기도 하고, 가독이 힘들만큼 무수한 각주가 나온다. 노골적인 포르노의 한 장면이 등장하거나, 멸망 직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기계인간들의 모습까지. 이처럼 그의 시는 시와 소설, 그림과 사진, SF와 포르노를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형식이나 내용을 파괴한 이전의 시들 중에서도 유독 김현의 시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남들과는 다른 시인의 성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게이들의 은어로 쓰이는 ‘글로리홀’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이미 시인의 시는 강력한 성적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공중화장실 칸막이마다 뚫린 작은 구멍(글로리홀)처럼 몰래 이루어져야 하고, 금기시된 것들로 취급받는다. 시인의 언어는 “도망치듯 사라진 글로리홀의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늙은 베이비 호모」)에서부터 시작한다. 죄인처럼 쫓기듯 사랑하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그들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는 시인은 다짐한다.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이다. 나를 포함한 그들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
“남자와 남자로서 사랑한다고/미래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인권」) 이제 시인의 언어는 우리의 미래를 향한다. “여자는 생생하던 가슴을 자른다/가슴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다.”(「가슴에 손을 얹고」)처럼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통념을 벗어나야지만이 인간이란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가 되고 싶은 사람과 여자가 되어서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열여섯 번째 날」)들처럼 선천적인 성性을 부정해야지만이 살 수 있는 ‘그들’이 있다. 그들을 향해 시인은 연대를 이루고자 한다. 인권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과 연대를 이루고자 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어느덧 “저 크고 무거운 시대의 정신”(「마르가리따」)을 외치는 것으로 나아간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픈
시를 쓴다
모르긴 몰라도
빛이 묻는다
네 시의 정권은
나를 만나면서도
왜 영원히 어둡니?
나는 동성애자의 손목을 본다
사랑이 연약한 뼈라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빛에게 새끼처럼 매달린다
머리 쓰다듬어줘
끼 부리지 마
빛은 머리카락을 골고루 만져주고
밤이 되고 새들도
벌써 확정이라고 뜨는구나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으로 날아가 이름 없는 국가를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진실의 열쇠는 둘만이 아는 어둠에 있다
(중략)
잠 속에서도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고
역사의 힘일 수 있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민족해방과 조국통일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모든 거짓은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빛은 사실이다」 일부
김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입술을 열면』은 연인 발렌틴을 대신해 혁명에 가담하는 몰리나의 버전으로 읽힌다.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가 만약 죽지 않고 연인 발렌틴을 대신해 그의 혁명에 가담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몽상가 몰리나는, 언제부턴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 “입술은 행동할 수 있다.”(「열여섯 번째 날」) “맞서라/전위여//죽고 싶다고 말하지 말고/죽어라.”(「빛의 교회」) “투쟁은 사회적인 동물이다.”(「가슴에 손을 얹고」) 같은 구절처럼, 이전과는 다른 날카로워진 전언을 외칠 수 있는 시인의 용기는 그들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입술을 찾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같다.”(「생명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사랑을 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행복한 죽음이었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몰리나는 아마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여주인공들의 죽음처럼, 후회없기에 행복한 죽음을 자신도 맞이하리라는 것을.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몰리나에게서 시인 김현이 보인다. 첫 시집의 첫머리에서 “이 세계는 죽음에 가까이 있다. 나에게 사랑은 가까운 것이다”라고 시인이 쓴 구절을 기억한다. 이제 시인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사건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 된다. 끝까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남는다. 이름 것들로 남겨질 당신과 그들, 그리고 이곳을 향해 시인의 언어는 혁명이 되어 버린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4. 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 이야기
발렌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아직 한 번도 못해본 말이예요.
몰리나: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한 꿈이니까요.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369쪽) 중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만이 삶이라고 주장하던 발렌틴은 몰리나 덕분에 사랑을 믿게 된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죽게 되면 고통받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문득 죽음이 두려워진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걱정하는 그에게 몰리나는 대답한다. “걱정말아요. 우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까요. 내가 당신 마음 속에 살아 있고, 그리고 당신과 항상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절대로 혼자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죠.” 여기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나로 인해 고통받을 누군가가 내가 가장 사랑하 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감옥에서 고문을 받던 중 정신을 잃고 꾼 짧은 꿈 속에서 나타난 연인의 대답에 발렌틴은, 짧지만 영원한 사랑의 순간을 간직하며 평온을 얻는다.
몰리나는 생애 처음으로 발렌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자신을 “쓰레기 호모 새끼”가 아닌 유일한 인간으로 대해줬던 발렌틴이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몰리나는 그를 대신해 그의 혁명 동지들과 접선을 시도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직전의 말씀을 거느린 태초의 문장을 향해 모든 것을 걸고 전진하기만 했던 시인은 알게 된다. 당신이라는 문장을 위한 길은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일이라는 것을. 짧지만 영원한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는 일. 그것이 당신이라는 불가능한 언어를 살기 위한 방법이다. 혁명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두 번째 시인은 깨닫는다. 입술이야말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언어야말로 행동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가 외치는 구호가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 사랑은 전혀 다른 서로의 삶을 근사하게, 천천히, 무한히 변화시킬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닮아 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 이미 그들은 서로에게 당신(나)을 대신 살고 있는 나(당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나를 살고 있”(김언,「고용」)으며, “당신의 얼굴은 어쩜 내가 되”(김현, 「죽음과 시간」)어가고 있다. 그들의 사랑이 이곳의 혁명과 낯선 전위의 시를 이루어내며 불가능한 삶을 시의 언어로 증명한다.
발렌틴과 몰리나처럼, 김언과 김현의 시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지점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에게 구원은 무력함을 인식하면서도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없이 무력한 존재이지만 서로에게 삶을 사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일. 시인들이 바라는 건 하나다. 나의 언어로 인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평화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일.”(「시인의 말」) 시간이 지나도 사랑의 순간은 언제나 유효하다. 이제 우리도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들의 시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 이야기. 삶이 계속되는 한,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1)마누엘 푸익, 송병선 옮김, 『거미여인의 키스』(민음사, 2001), 184쪽.
2)지금부터 다룰 김언과 김현의 시는 2018년 《시인수첩》 여름호에 게재될 좌담 「유동하는 근원, 그리고 불가능한 시: 이장욱, 김언, 김현, 배수연의 시」 중 일부와 맥을 같이 한다.
3)마누엘 푸익, 앞의 책, 151쪽.
4)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전집2·산문』, 민음사, 2013년, 400쪽.
5)마누엘 푸익, 앞의 책, 109쪽.
6)김현 산문집, 「질문 있습니다」(서랍의날씨, 2018년), 191쪽의 한 구절 ‘문학의 언어는 가장 늦게 쓰이는 거구나. 문학을 한다는 사람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사건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끝까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구나.’에서 변용.
7)마누엘 푸익, 앞의 책, 369쪽.
8)마누엘 푸익, 위의 책, 344쪽.
9)김현 산문집, 앞의 책, “(…) 남성인 저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산물인 제 삶을 얼마나 근사하게, 천천히, 무한히, 변화시켰는지 언제 어디서나 간증할 수 있습니다.”(17쪽)라는 구절에서 빌려옴.
*전영규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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