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0호/고전읽기/권순긍/세계의 횡포와 눈먼 아버지에 대한 사랑, 『심청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97회 작성일 19-06-25 18:17

본문

70호/고전읽기/권순긍/세계의 횡포와 눈먼 아버지에 대한 사랑, 『심청전


세계의 횡포와 눈먼 아버지에 대한 사랑, 『심청전


권순긍



효孝인가, 불효不孝인가
아마도 언론에 보도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은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거나 혹은 자식이 부모를 살해했다는 경우일 것이다.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고 하여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했다. 그러기에 옛날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경우를 ‘존속살인’이라고 하여 법정 최고형으로 구형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부모나 자식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은 흔히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하여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애틋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치사랑’은 부모의 그것보다 훨씬 못 미친다. 그래서 자식에게 하는 사랑의 1할만 부모에게 하면 효자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 부모가 나에게 해준 것의 과연 얼마만큼 부모에게 되돌려주는가를!


옛날 설화 중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의 얘기는 거의 없지만 ‘효행설화孝行說話’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으로는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효孝’에 대한 교육과 강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효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충忠’도 강조함으로써 봉건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도 했다. 효는 자신의 부모에게 하는 것이니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충은 그러지 못해 효와 짝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효경孝經』에서도 이를 “효로써 충을 만든다移孝作忠.”고 했다.


자, 그럼 『심청전』으로 돌아가 보자. 눈 먼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행위가 과연 효인가, 불효인가? 아버지를 위해 몸을 바쳤으니 지극한 ‘효’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내몰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막대한 ‘불효’이기도 하다.


효가 무엇인가를 설명한 『효경孝經』에 의하면 효의 기본은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가 물려준 것身體髮膚受之父母”이어서 부모가 물려준 몸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 한다. 즉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효의 근본인 셈이다. 그런데 심청이는 부모가 물려준 그 귀중한 몸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이야말로 불효막심한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가장 큰 불효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효의 공식에 의거해 심청의 행위를 불효로 규정짓다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아니, 심청의 행위가 불효막심하다니! 작품에서도 심청을 일러 “하늘이 낸 효녀”란 의미의 ‘출천효녀出天孝女’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심청의 행위가 어찌 불효인가?


육친肉親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기희생
그것은 심청의 행위를 효라는 봉건적 개념으로 규정하려고하기 때문이다. 심청의 행위는 봉건적 이데올로기ideology인 효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유교적 윤리규범의 잣대로 따지기 때문이리라. 부모가 물려준 몸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효의 입장과 부모를 위해 몸을 훼손하는 고귀한 자기희생은 개념상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유교적 윤리규범이 아닌 인간의 본성으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공양미 삼백 석을 몽운사로 보내기로 약속한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몽운사 화주승의 말에 앞뒤 헤아려 보지도 않고 부처님 앞에 덜컥 약속한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쏘아 버린 화살이다. 심청이로서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부처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심봉사 집안 꼴이 한 때 끼니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가난하여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 위해 심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일한 재산인 자신의 몸을 파는 것이다. 마침 남경장사 선인들이 제수로 쓸 처녀를 사려는 말을 듣고, “우리 아버지 앞을 못 보셔서 ‘공양미 삼백 석을 지성으로 불공하면 눈을 떠 보리라’ 하지만, 집안 형편이 지극히 어려워 공양미를 장만할 길이 전혀 없어 내 몸을 팔려고 하니 나를 사가는 것이 어떠하신지요?”(『완판본』) 라고 스스로 몸을 판 것이다.


심청이가 죽지 않고 공양미를 마련하는 방법이 없었을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승상댁 부인이 자신이 삼백 석을 내어줄테니 돌려주라 하지만 심청은 그 제의를 거절한다. 부모를 위해 정성을 드리는 것인데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받을 수 있으며, 뱃사람들에게 이미 약속을 했으니 그것을 어길 수 없다고 한다.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요즘에도 불구가 된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소년, 소녀가장이 있을 수 있다. 현대적 입장에서 심청을 다룬 단편영화를 보면 공사판에서 몸을 다쳐 불구가 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소녀가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돈을 벌어 온다는 말만 남기고 가출했고, 소녀가장은 생계는 물론 몸져누운 아버지의 치료비와 약값까지 대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공부를 계속 하기에는 이 어린 소녀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술집에 나가 몸을 팔아 아버지를 돌보아야만 했다.


이 소녀가장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심청전』에서 심청이 인당수의 제물로 팔리는 대목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심청전』의 현대적 개작인 최인훈의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와 황석영의 소설 『심청-연꽃의 길』은 인당수 깊은 바다 속에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아닌 중국의 색주가로 팔려가는 심청을 그리고 있다.


결국 심청의 행위는 봉건적 윤리규범인 ‘효’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 대문인 것이다. 즉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젖동냥을 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키워 준 눈 먼 아비에 대한 인간적 보답, 아니 그러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부분을 「심청가」는 ‘인당수 대목’을 통해 이렇게 증거한다.



심청이 거동봐라. 바람 맞은 사람같이 이리비틀 저리비틀, 뱃전으로 나가더니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이리 진퇴함은 부친의 정情 부족함이라!’
치마폭 무릅쓰고 두 눈을 딱 감고 뱃전으로 우루루루루루루, 손 한 번 헤치더니 강상으로 몸을 던져, 배 이마에 거꾸러져 물에 가 풍 (한애순 창본)



심청이가 죽기를 주저하다가 ‘부친의 정’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이 대목은 「심청가」의 ‘눈’이라 일컬어진다. 그 만큼 슬프고도 처절하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 감동은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지극히 나약하고 인간적인 심청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고귀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된다. 아버지를 부르며 물에 뛰어드는 「완판 심청가」를 보자.



안색을 변치 않고 뱃전에 나서보니 티 없이 푸른 물은 월러렁 퀄넝 뒤둥구리 구비쳐서 물거품 북적찌데한데,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라.
심청이 다시 정신 차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온 몸을 잔뜩 끼고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바다 속에 몸을 던지며,
“애고 애고, 아부지 나는 죽소.”
뱃전에 한 발이 지칫하며 거꾸로 풍덩(완판본)



이런 정황을 어찌 봉건적 윤리규범인 효, 불효로 따질 수 있겠는가? 죽을 고생을 하며 자신을 키워준 눈 먼 아비를 위한 고귀한 자기희생인 것이다. 그래서 무수한 작품에서 ‘하늘이 낸 효녀’란 뜻의 ‘출천효녀出天孝女’란 표현을 쓰고 있다. 단순히 자기 몸을 보존해서 부모가 물려준 것을 지킨다는 봉건적 윤리규범인 효를 초월한 극찬極讚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심청이 자신의 몸을 바쳐야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세계의 횡포에 맞선 처절한 운명

『심청전』이 여느 판소리계 소설과 구별되는 특징을 찾는다면 주인공인 심청에 맞서는 적대자Anti-Hero가 구체적인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춘향/변학도, 흥부/놀부, 토끼/용왕 등 인물들이 대립구조를 보이는 데 비해 『심청전』은 심청에 맞설만한 적대자가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세계의 횡포’가 존재한다. 곧 눈 먼 아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레 만에 모친과 사별하고 저 냉혹한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심청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하고 가혹한 운명이 바로 적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양반의 후예인 심학규는 운수가 불행하여 이십에 눈이 멀고 가세가 점점 기울어 갔으며 결국 곽씨 부인은 평생을 고생하다 딸 낳은 지 이레 만에 ‘산후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에 곽씨 부인 산후 손데 없어 찬물로 빨래허기 왼갖 일로 과로를 허여 놓으니 산후별증이 일어나 아무리 생각허여도 살 길이 없는 지라『정권진 창본』”고 한다. 삼칠일(21일)을 쉬어야 하는데 7일 만에 일어나 먹고 살기위해 일을 하느라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쳐 사망한 것이다. 극도의 가난과 살아가기 위한 힘겨운 노동이 곽씨 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 기막힌 장면을 보자.



한숨 짓고 돌아누워 어린아이를 잡아 당겨 낯을 한 데 문지르며 혀를 끌끌 차며

“천지도 무심하고 귀신도 야속하다. 네가 진작 생기거나 내가 좀 더 살거나, 너 낳자 나 죽으니 가 없는 이 설움을 너로 하여 품게 하니, 죽는 어미 사는 자식 생사간에 무슨 죄냐? 뉘 젖 먹고 살아나며 뉘 품에서 잠을 자리. 애고, 아가, 내 젖 마지막 먹고 어서 어서 자라거라.“
두 줄기 눈물에 낯이 젖는다. 한숨지어 부는 바람 소슬바람이 되어 있고, 눈물 맺어 오는 비는 보슬비가 되어있다. 하늘은 나직하고 검은 구름 자욱한데 수풀에 우는 새는 둥지에 잠이 들어 고요히 머무르고, 시내에 도는 물은 돌돌돌 소리내며 흐느끼듯 흘러가니 하물며 사람이야 어찌 아니 설워하리. 딸꾹질 두세 번에 숨이 덜컥 지니(완판본)



하지만 이것으로 세상의 모든 고난이 끝난 게 아니다. 눈 먼 아비와 어린 딸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운명은 더 가혹했다. 어린 딸을 안고 동네 아낙네들을 찾아 이집 저집 젖동냥을 다녀야 했던 심봉사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보라. 어린 애기를 안고 지팡이로 더듬거려 김매는 데도 가고, 빨래터에도 가고, 우물가에도 찾아가 젖동냥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 모녀에게 닥친 모진 운명과의 사투死鬪 그 자체다.


심청은 또 어떤가? 나이 예닐곱 살(요즘 같으면 유치원 정도 다닐 나이에)부터 눈 먼 아비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세상 버리시고 우리 아버지 눈 어두워 앞 못 보시는 줄 뉘 모르겠어요? 십시일반十匙一飯이오니 밥 한 술 덜 잡수시고 주시면 눈 어두운 저의 아버지 시장을 면하겠습니다.”하며 이집 저집 구걸을 하였으니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한가! 오죽했으면 심봉사 조차도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 자식 고생만 시킨다.”고 한탄할 정도다.


눈 먼 아비와 어린 딸이 벌이는 광포한 세계와의 대결은 정말 처절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여느 작품보다도 비극미가 두드러진다. 「심청가」 판소리 공연장이나 창극공연을 가보면 이 부분에서 눈물바다를 이룬다. 판소리 명창 송만갑(宋萬甲, 18965~1939)은 아내가 죽고 나서 <심청가>를 일체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눈 먼 아비가 어린 딸을 안고 젖동냥을 다니는 이 대목에 이르면 자신의 처량한 신세가 생각나서 소리를 차마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정황이 얼마나 처절했으면 신소설의 작가 이해조(李海朝;1869~1927)가 『심청전』을 일러 ‘처량 교과서’라고 불렀겠는가?


오래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산실인 스튜디오 지브리Studio Ghibli에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의 절친한 동료였던 다까하다 이사오高畑 勳가 만든 「반딧불의 묘」라는 작품을 보며 어린 아들과 같이 펑펑 운 적이 있다. 태평양 전쟁의 포연 속에서 부모는 죽고,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 어린 남매의 삶이 너무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남매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두 남매가 벌이는 사투는 『심청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하지만 리얼리스트 다까하다 이사오가 그린 비참한 패배와는 달리 우리의 『심청전』은 세계의 횡포에 맞서 마침내 승리한 이야기로 매듭지어진다. 그 영광의 장면을 보자.


환상적 요소의 개입
그러기 위해서 『심청전』은 여느 판소리계 소설과는 달리 많은 환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선 영웅소설에서나 보이는 천상계 개입과 ‘적강 모티프Lost Paradise Motif’를 지니고 있다. 심청은 원래 서왕모西王母의 딸로 하늘의 선녀인데 죄를 지어 인간세계에 유배 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벌로 인간세상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실상 그 죄라는 것도 천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를 진상하러 가다가 친구를 만나 노닥거리느라 늦은 것에 불과하니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죄랄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심청전』의 서두를 보면서 심청이 앞으로 겪을 고난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을 준다. 흔히 액션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영웅적 주인공이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주인공이 죽으면 영화가 끝나기 때문이다. 절대 죽지 않는 이른바 ‘다이 하드’인 셈이다. 그럼에도 사건이 전개될 때마다 손에 땀을 쥐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용궁환생이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되는 얘기다. 『심청전』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을 중심으로 모진 고난이 계속되는 전반부와 다시 환생하여 영화롭게 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 바, 그 영광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은 용궁환생으로 그 서막을 연다.



이때 심낭자는 너른 바다에 몸이 들어 죽은 줄로 알았는데, 무지개 영롱하고 향내가 코를 찌르더니, 맑은 피리 소리 은근히 들리기에……수정궁 들어가니 인간세계와는 다른 별천지라. 남해 광리왕이 통천관을 쓰고 백옥홀을 손에 들고 호기 찬란하게 들어가니, 삼천팔백 수궁부 내외의 대신들은 왕을 위하여 영덕전 큰 문 밖에 차례로 늘어서서 환호성을 울리더라. 심낭자 뒤로 백로 탄 여동빈, 고래 탄 이적선과 청학 탄 장녀가 공중을 날아다니는구나.(완판본)



완연한 용궁축제의 한 마당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하여 심청은 저 깊은 물 속 죽음의 세계에서 화려한 삶의 세계로 환생하는 것이다. 이제 그 동안 겪었던 모진 고난은 끝나고 광명의 세계만이 그 앞에 펼쳐진다. 깊은 물에 들어감으로써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다시 태어난 것이리라. ‘심청沈淸’이란 이름 역시 ‘물에 잠겨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많은 종교 의식에서 기독교의 세례처럼 물에 잠겨 죄를 씻어내고 깨끗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갠지스 강에서 더러운 육신을 씻어내는 힌두 신자들도 마찬가지리라. 생명의 근원인 물은 곧 환생이나 부활과 같은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청의 자기희생과 환생은 묘하게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에 찬 예수의 삶과 부활을 닮았다. 예수의 삶과 부활이 그러한 것처럼 심청은 지극히 고귀한 천상의 세계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모진 고난을 겪으며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는 순간 용궁에서 환생하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영광의 꽃길만이 펼쳐진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고 드디어 눈을 떠서 밝은 세상을 보게 되는데 중요한 것이 아버지만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맹인들의 개안開眼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용궁환생이 앞으로 펼쳐질 영광된 삶의 서막이라면 심봉사를 비롯한 맹인들의 개안은 그 절정에 해당된다. 그 장면을 보자.



황후께서 버선발로 뛰어내려와서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 제가 정녕 인당수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어요.”
심봉사가 깜짝 놀라,
“이게, 웬 말이냐?”
하더니, 어찌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에서 딱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딱 밝았다. 그 자리에 가득 모여 있던 맹인들이 심봉사 눈뜨는 소리에 일시에 눈들이 뜨이는데, ‘희번덕, 짝짝’ 까치새끼 밥 먹이는 소리 같더니, 뭇소경이 밝은 세상을 보게 되고, 집 안에 있는 소경, 계집 소경도 눈이 다 밝고, 배 안의 소경 배 밖의 맹인, 반소경, 청맹과니까지 모조리 다 눈이 밝았으니, 맹인에게는 천지개벽 하였더라.(완판본)



말 그대로 광명을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다. 더욱이 심봉사 한 개인만 눈을 뜬 게 아니라 같은 순간 모든 맹인들이 눈을 떴다는 것은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민중들의 염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명나는 축제의 절정인 것이다. 모든 민중들의 고통이 한 순간 해소되는 새로운 광명의 세상, 곧 ‘천지개벽’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심청의 자기희생을 통해 맹인들 모두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와 오페라로 확산된 뮌헨 올림픽의 『심청전』
1972년 뮌헨올림픽 초청작으로 만든 신상옥 감독의 『효녀 심청』에서도 『심청전』을 육친애와 희생을 통한 구원의 문제로 확대시켰다. 앞 장면에서 심청과 심봉사의 끈끈한 유대를 통한 육친애를 부각시켰으며 이 연장선상에서 아버지를 위한 희생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심청이 자신을 데려가려는 도사공과 이를 저지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남다른 아버지의 은덕”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육친애,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시켰기에 이는 구원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봉사 심지어는 불구자들까지 모두 정상으로 돌아온다. 말하자면 심청의 희생으로 불구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리라.


그런데 신상옥 감독은 여기에 지독한 가뭄으로 온 나라가 고통 받는 상황을 추가하였다. 무려 5장면에 걸쳐 이글거리는 태양과 갈라진 논밭, 백성들의 흉흉한 민심을 보여준다. 가뭄은 흔히 정치적 부패나 실정失政으로 비유되곤 한다. 영화에서도 가뭄의 이유를 “천륜을 배반하고 원혐怨嫌을 품은 자 그 수가 많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왕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웃옷을 벗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엄혹한 유신시대, 대중문화의 코드에서 ‘가뭄’은 당시의 억압적 상황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였다. 1971년 발표된 김민기의 「아침이슬」에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라고 했으며, 1974년 나온 한 대수의 「물 좀 주소」에서는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라고 당대의 절망적인 상황을 노래했다. 비가 온다면 모든 게 해결되지만 당시 유신시대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천륜을 배반하고 원혐을 품은 자가 많아 그렇게 된다고 발언했다.


영화에서는 심청이 고귀한 희생을 통해 속죄를 했기에 천륜이 이어지고 원혐이 풀려 모두가 구원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모든 봉사가 눈을 뜨고, 불구자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기다리던 단비가 내려 고통에서 해방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된 것이다. 완판본 『심청전』에서도 이 해방과 환희의 한바탕을 ‘천지개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심청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했던 것이다. 아마도 신상옥 감독은 그런 세상이 오길 원했던 것이고, 뮌헨 올림픽을 맞아 세계에 그런 화해와 해방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같이 공연됐던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의 오페라 『심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윤이상은 공연을 마치고 왜 특별히 <심청>을 택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심청전』 속에 숨어있는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을 구제하는 정신이 오늘날 퇴폐해 가는 서양세계에 경종을 울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동백림사건’의 조작으로 간첩으로 몰려 고통을 당한 윤이상으로서는 『심청전』에 들어있는 희생과 구원의 메시지가 절실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남북화해와 통일의 열망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봉사들이 개안하여 광명의 세상을 맞이해 화해와 축제의 한바탕을 벌이는 것을,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모든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상처받은 용’ 윤이상은 결국 『심청전』처럼 광명과 화해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고국 땅을 밟지도 못한 채 먼 이국 독일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흐린 뒤, 마침 문재인 정부에 의해 2018년 2월 25일 윤이상의 유해는 베를린의 가토우 공원묘지에서 고향인 통영으로 귀환했다. 3월말 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식에 맞춰 이장할 계획이라 한다. 23년 만의 귀향인 셈이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