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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특집│시의 확산, 시의 새로운 장소성/김정수/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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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0회 작성일 19-06-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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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특집│시의 확산, 시의 새로운 장소성/김정수/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곳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곳


김정수



가스통 바슐라르에 의하면, “공간은 그것의 수많은 벌집 같은 구멍들 속에 시간을 압축해 간직하고 있”으며, “공간은 행동을 부르고, 또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한다. 집이라는 공간은 몽상을 지켜주고,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고 했다.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 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것이다. 집을 비롯한 서랍·상자·장롱·새집·구석 등의 시적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시적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경험을 통해 창작물(시)을 만들어내게 한다.


요즘 이런 장소(성)에서 쓰인 창작물을 논하는 자리가 활성화되고 있다.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쓰인 작품들을 논하는 곳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것. 예전에는 대학 국문학과와 문창과의 범주에서, 재능 있는 사람들 몇이 모여 동아리를 결성해 합평을 하고, 시낭독을 하고 문집을 만들었다. 그 다음 생겨난 것이 중앙일간지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시창작 교실이다. 뒤이어 백화점과 도서관 그리고 문학잡지에서 시창작 강의가 이루어졌다. 대학이라는 공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던 시창작이 다변화되었으며, 시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여러 사이버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 만들어졌으며, 대학의 단과대학 기능을 고스란히 가지고 나와 사설 인문학 강의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대안연구공동체Community for Alternative Studies도 그 중의 한 곳이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교육과 체험 및 참여를 통해 개인의 인성 도야와 다른 세상을 꿈꾸는 학생, 시민들과 학자들의 공동체인 대안연구공동체는 철학과 외국어를 비롯한 각종 인문학 강좌 및 세미나와 건축, 드로잉, 영화, 글쓰기, 만화 창작, 목공, 명상 등의 문화예술 체험, 그리고 출판 교육 및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대안 대학원 과정인 파이데이아PAIDEIA 대학원에는 철학을 자신의 삶이나 전문 분야와 접속하려는 학생 및 각계의 전문인들이 고급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새로운 과목이 개설되기도 하고, 기존 과목이 폐강되기도 한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시창작 강의는 ‘문화예술’ 분야의 한 과목이다. 대학 문창과의 기능에 평생교육의 개념이 접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전공이 달라 기회를 놓쳤거나 뒤늦게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개설된 과목은 8주 단위로 신입생들을 모집하고, 입문에서 심화 과정까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번 시창작 강의는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시쓰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과목을 개설한 지 일 년이 조금 지났다. 효율적으로 창작시 합평을 해야 하므로 모집인원을 5명 내외로 한정했다.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 오기도 해서 현재 5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 3명은 처음부터 같이한 사람들이다.


주요 커리큘럼은 읽기와 쓰기. 조지훈 시인이 정지용 시인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하자 “그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라고 답했다. 시쓰기에 왕도가 없다는 것, 혼자 이루어가는 것을 에둘러 한 말이다. 따라서 시창작법을 가르친다기보다 선배의 입장에서의 경험을 들려주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탄탄한 기본기를 쌓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그 사람에게 맞는 시집을 선정, 한 달에 한 권 필사를 하고, 모방을 하고, 언어를 익힌다. 70~80년대 시집부터 최근 시집까지, 한 시인을 집중적으로 읽기도 하고, 한 시집을 중심으로 대표시를 읽기도 한다. 시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전체 느낌이지만, 기본적으로 시를 이해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이때 가장 먼저 파악할 것은 시적 화자, 그리고 시적 공간이 어디인가. 이 둘을 파악한 후 시를 다시 읽어 가면 그 시의 몽상이 보인다. 그 몽상을 따라가다보면 그 시의 시간과 추억에 숨어있는 사연과 사상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에는 시집뿐 아니라 문학잡지 읽기를 시작했다. 과거의 시집이나 시인을 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문학잡지에 게재된 시와 평론(서평)을 읽어야 최근의 시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시는 필사를 하며 되새기고, 평론을 꼼꼼하게 읽어 문학평론가나 시인들이 어떻게 시(집)를 읽고 분석하는지를 익힌다. 이는 한 사람의 방법론만을 접해 자칫 편협하고도 독선적인 시창작과 시읽기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고, 좀 더 폭넓은 세계를 열어주기 위함이다.


시인은 모든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황순원 선생님은 시와 소설 이외의 글은 ‘잡문’이라 하여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의 신념이다. 쓸 줄 알면서 안 쓰는 것과 쓸 줄 몰라서 안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합평은 단순히 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안과 밖의 공간을 두루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줄 뿐 아니라 산문(서평)을 쓰는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대안연구공동체 시창작 시간에는 매주 시적 공간이나 사물에 대한 시제를 제시하고 1, 2편씩 써와 합평을 한다. 창작시는 미리 보여주지 않고 당일 사람 수만큼 프린트를 해와 바로 읽고 합평을 한다. 합평 시간에는,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 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바슐라르의 말처럼 자신의 시에 사상과 추억과 꿈을 담으라 조언한다. 문장이 문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시적 공간과 상황이 문장을 이끌어 나간다고. 쓰고 싶은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문장은 따라 나온다고.


제가 당신의 점을 봐 드릴게요
밤이 없는 사람, 곤하지 못한 사람
속눈썹에게 다정하지 못한 사람
그래서 깜깜한 사람

자지 않고 자는 불면이라는 병
스위치가 없는 도시의 불빛은 
불행 중 불행이죠

오후엔 커피향 원두를 갈지 마세요
외로움으로 각성되어 버린 밤은
빈 어깨로 달의 뒷면을 뒤척이게 하니까요

저녁엔 초콜릿 향을 맡지 마세요
유년에 지나쳐 버린 골목길을 또 서성이며 
공연한 꿈을 세고 싶지 않다면요
―「불면 낭만처방」 부분


위의 시 「불면 낭만처방」은 개강 후 함께하고 있는 이림영옥 씨가 쓴 작품의 도입부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점’을 통해 낭만적으로 처방하는 내용이다. 아직 등단 전인지라, 아끼는 작품 중에서 여기에 발표해도 좋을 적당한 작품을 골랐다. “당신의 점을 봐 드”린다고 했지만 결국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은 자신이다. 날밤을 새워 시를 쓴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도반의 자의적 해석이자 욕망이다. “외로움”은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고, “빈 어깨로 달의 뒷면을 뒤척이게 하”는 것은 시적 이미지다. 유년의 “골목길을 또 서성”대는 것은 결국 “행동에 앞서 상상력이 활동”하는 것이다.


강의는 술 한 잔 마시며 할 만큼 자유롭지만 합평만큼은 “오늘도 가루가 됐다”고 할 만큼 진지하고 치열하다. 이때는 동료들의 합평이 더 소중할 수 있다. 같은 높이로 시를 보고, 격의 없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시적 전개부터 시어나 표현 하나하나까지 짚어내며 합평을 한다. 써온 시의 수준이나 성격에 따라 처음부터 개입을 하기도 하지만 거의 합평이 끝난 뒤 총평을 한다.   


오후 7시에 시작한 강의는 오후 9시 30분에서 10시쯤 끝나는데, 보통 뒤풀이로 이어진다. 사실 본격적인 강의는 뒤풀이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는 좀 더 사실적으로, “가루가 되는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부족한 것에 대한 조언 아닌 조언. 위무의 시간이기도 하다. 강의실에서 하지 못한 인간적인 이야기가 술과 자유로운 분위기에 더해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야기에는 애정이 묻어난다. 강의실이라는 틀에 박힌 공간에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좀 더 직설적으로, 과감하게 오고 가기도 한다. 형식을 벗어던진-집으로 따지면 욕실-허위의 옷을 벗고, 거울을 보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창작 강의는 팀워크가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시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야 하고, 등단 후에도 막역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팀워크를 해치는 사람은 한 번의 경고 후에도 개선되지 않으면 바로 퇴출시키고, 그 사람은 다시는 들어올 수 없다. 8주 중 한 번은 주요 시인을 초청해 그의 대표시 몇 편과 문학세계를 듣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까지 정한용, 권대웅, 김상미, 박완호 시인 등이 다녀갔다.


햇빛도 없는 포도농사
비닐하우스도 아닌 동굴 안에서
그것도 넝쿨조차 보이지 않는다.


탐스러운 포도송이 설익은 송이들이
주렁주렁 익어간다
밝은 대낮에도 송이마다
별들이 초롱초롱 박혀 있다.


낮에는
울퉁불퉁한 하늘포도원
포도밭에 포도는
황금포도 알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밤에는
어둠이 내려 포도밭을 덮는다.
포도는 다 시장으로 나가고
포도송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거꾸로 짓는 농사
가뭄도 태풍도 없다
다만 거꾸로 잠잘 뿐이다.


―「거꾸로 사는 삶 -황금박쥐」 전문


이 시는 서울의 한 노인복지센터 시창작 강의를 듣고 있는 이만길 씨의 「거꾸로 사는 삶―황금박쥐」 전문이다. ‘씨’라고 했지만 올해 78세의 어르신 시인 지망생이다. 13주 강의 중간에 ‘박쥐’라는 시제를 주자 일주일 만에 써온 시다. 포도송이와 박쥐, 거꾸로 사는 모습에서 포착한 이 시는 동굴을 포도밭으로 치환하고 있다. 박쥐가 자라는 것을 포도송이가 익어가는 것으로, 박쥐가 눈을 뜨는 것을 “별들이 초롱초롱 박혀 있다”고 표현했다. 밤에 박쥐가 동굴을 나가는 것을 다 익은 포도를 시장에 출하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이와 이공계 직장을 다니다가 은퇴한 것을 감안하면 수작秀作이라 할 만하다. 


노인복지센터 시창작 강의도 시가 확산되고 있는 공간이다. 복지나 평생학습 차원의 접근이긴 하지만 열기만큼은 대안연구공동체 시창작 공간 못지않다. 시제를 내주면 다들 1, 2편의 시를 써온다. 대안연구공동체 시창작 강의에서는 인원이 적어 합평이 가능한데, 노인복지센터는 적게는 9명, 많게는 13명이 오기 때문에 합평보다는 강평을 할 수밖에 없다. 각자 써온 시를 사람 수만큼 프린트를 해오고, 1시간 동안 읽고 바로 평을 해준다. 짧은 시간에 시를 파악하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한 눈에 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수준의 편차가 심하고, 노인인 점을 감안해 질책하기보다 칭찬을 많이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성의가 보이지 않으면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노인복지센터 강의 초반에는 시창작의 기본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남들과 다른 관찰법, 발상의 새로움, 문장의 새로움, 꼬리를 무는 생각과 사유로 이어지는 단계별 시창작 과정을 사진과 그림을 활용해 쉽게 설명했다. 시가 되는 조건, 자유연상법에 의한 문장 만들기, 제목 달기, 행과 연 구분법, 사물과 경험의 접목, 일관성 있게 시를 전개하는 방법 등 시창작에서 꼭 필요한 것들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다. 강의 중후반에는 꼭 읽어야 할 시인의 대표시를 한 시간씩 읽고 써온 시를 강평한다.


시는 개성의 산물이다. 가장 개성적인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삶이다. 내가 겪은 공간과 사건은 한꺼번에 풀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들이다. 과거의 공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부활하고, 불멸의 공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 공간은 현재의 공간적 경험과 접목되고 상상력이 더해져 한 편의 시로 탄생한다. 그 순간 마음 깊이 내재되어 있던 삶의 가치들이 포용성과 확장성을 갖는다. 시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공간과 시의 새로운 장소성이 갖고 있는 순기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공간이 좀 더 많아져야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김정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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