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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특집│시의 확산, 시의 새로운 장소성/문희정/독자의 책무―‘문학의 공간’의 한 축으로 스스로를 구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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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특집│시의 확산, 시의 새로운 장소성/문희정/독자의 책무―‘문학의 공간’의 한 축으로 스스로를 구성하기
독자의 책무
―‘문학의 공간’의 한 축으로 스스로를 구성하기
문희정
모리스 블랑쇼의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창조자’는 결코 본질적 무위로부터 작품을 표현할 수 없다. 근원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의 순수한 말을 결코 자신에게만 솟아나게 할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작품은 작품을 쓰는 자의, 작품을 읽는 자의 열려진 내밀성이 될 때에만,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 서로간의 이의제기를 통해 격정적으로 펼쳐진 공간이 될 때에만 작품이 된다.”
이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이 갖는 본질이란 작품을 쓰는 자와 작품을 읽는 자의 열린 내밀성에 다름아니다. 그 양자 간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열림은 또한 작품의 구성 요건이기도 하다. 하나의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고 쓰여진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불확실한 공중을 떠돌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품’이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문학의 공간은 미지의 독자를 향해 열려 있다는 말일 뿐 아니라, 독자라는 존재 자체가 그 공간을 성립시키는 조건이라는 이야기다. 독자가 없으면 문학의 공간도, 나아가 작품 혹은 문학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여기의 우리는 어떠한가. 또 어떠했는가. 과연 그 공간의 독립적인 구성 요건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그곳에 배치했는가. 아주 멀리까지 거슬러 오를 필요도 없겠다. 출판 산업이 본격화되고 그것이 온전한 시장으로 구축되면서 문학이 대중화된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1970년대 이후로만 놓고 보아도 좋다.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강력한 분투들로 문학의 공간을 열어냈는가.
그 공간의 한 축으로 스스로를 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을 향유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향유를 두고, 그것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져 내리는 열매를 받아먹는 일이라 할 수 있다면, 문학의 공간을 여는 자로서의 독자의 책무란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무 표면의 거칠거나 매끈한,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그 질감을 체험하고 그 위에 내 날것의 호흡과 땀을 보태면서 열매를 응시하고 열매 쪽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오랜 응시와 나아감의 그 지난한 시간, 열매에 닿기 직전의 그 시간이 문학의 공간을 열어내는 진짜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일 것이다.
우리의 그 시간은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우리의 것이어야만 했을 그 시간을 꾸준히, 그리고 한결같이 누군가에게 양보해 오지는 않았는가. 이를 테면 문학을 대신 읽어 주는 그 누군가에게 말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떠넘긴 그 자리에는 늘 문학의 전문가격인 그들, 문학평론가와 문학연구자, 인문대학 교수와 문단 내의 명망 있는 OB와 YB들이 눌러앉아 있었다.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그들의 자리였다는 듯이, 언제나 이미 그래왔다는 듯이.
물론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몫을 넘기라 말한 적이 없으며 우리 역시 그런 식의 양도와 양보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우리를 움직여 왔다. 우리가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몸을 맡겨 놓는다면 그 흐름은 머잖아 그 자체로 초역사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될 게 뻔하다.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의 공간’에 관한 진실은 영구히 은폐되고 말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위기이다. 독자가 그 고유의 능력과 권리를 상실한 이류 독자로, 문학의 공간 바깥으로 밀려나 그 주위를 행성처럼 빙빙 돌기만 하는 주변인으로 영원히 전락할 위기 말이다.
그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그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어보자 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 크고 작은 돌들을 던져 넣어 매듭 하나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물결은 돌들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거대한 몸 안에 돌들이 던져졌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돌들을 안다. 돌들이 그린 포물선과 돌들이 뛰어든 그 자리를. 그렇게 우리가 약속한 것과 행한 것과 또 우리가 열어젖히는 것이 그 물결 내부의 알아차림보다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2016년 여름, 서울 해방촌의 한 연구공동체에 시 세미나가 꾸려졌다. 문학의 공간을 되찾아오기 위한 작은 시도였다. 문학의 공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독자’라는 이름 안에 든 진의를 되찾겠다는 말과 같다. 그것을 보다 잘 되찾고 보다 잘 열어내기 위해서는 수련과 훈련이 필요하다. 수련과 훈련은 함께 읽고 말하고 나누는 시간의 축적에 다름아니다. 공통된 텍스트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말과 마음의 치열함 속에서, 오래도록 눌려만 있던 우리의 능력은 신속히 길어 올려질 것이니까.
하나의 말이 다른 말을 불러낼 것이고,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이의 말을 이끌 것이다. 발화된 말은 다시 숨지 않을 것이며, 줄곧 숨어 있으려 했던 다른 말들을 바깥으로 불러낼 것이다. 함께 읽기를 통해 세상 빛을 본 말들은 이제 옛날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후로 다시금 침묵 속에서 텍스트와 맞닥뜨린다 해도 그것이 이전의 침묵의 시간과는 같을 수는 없으리라. 침묵 속의 중얼거림, 침묵 속에서 벌이는 작품과의 경합이 그 시간을 촘촘히 메울 것이다.
첫 모임 날로부터 한 달 가량의 여유를 두고 세미나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모임이 꾸려지게 될 연구공동체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모집 공고를 띄웠고 다양한 영역의 각 사이트 게시판을 돌며 시 세미나에 대한 소개 글을 올렸다. 세미나 시작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에야 비어 있던 공고의 댓글 창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휴학 중인 대학생, 주부, 개척교회 목사, 독서논술 강사, 신생 연구공동체 활동가, 작사가와 소설가 등이 모였다.
세미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한 시즌을 12주로 잡고 세미나 기획자가 그에 해당하는 12권의 시집을 정하되, 한국 근대시인, 한국의 젊은 시인, 국외 시인의 시집을 고루 배정한다. 각 주마다 정해진 당번이 그 시집을 사전 통독한 후 5~10편의 시를 고른다. 당번이 골라온 시를 한 편씩 낭송한 다음 각 한 편, 한 편에 대해 차례차례 의견들을 교환한다. 이때 대화 참여 빈도에 대한 균형을 최대한 맞추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당번은 다음 세미나가 열리기 전까지 세미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최대한 복기하여 기록하는 형식으로 그날의 후기를 쓰고 공유한다.
이런 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한 지 1년쯤 지나자 우리는 이제 시를 읽고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그 시가 촉발하고 이끌어낸 것이 분명한, 저마다의 서사를 풀어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서사는 시인의 것일 수도, 그에 대해 말하는 당사자의 것일 수도, 우리 모두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시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시 자체의 형식과 시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호흡 혹은 입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어붙이는 그 서사가 다시금 시의 몸으로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세미나를 마칠 때쯤이면 처음의 시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시로 둔갑해 있기도 했다.
블랑쇼의 말처럼, 말하는 자를 작가로, 듣는 자를 독자로 놓고 본다면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 서로간의 이의제기를 통해 격정적으로 펼쳐진 공간” 속에 우리는 비로소 머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듣는 능력으로서의 우리의 대화가, 말하는 능력의 산물로서 우리 앞에 던져진 하나의 시와 벌인 경합 끝에 주어진 것이, 바로 그 새로운 몸으로 둔갑한 시일 테니까. ‘나무 표면의 거칠거나 매끈한,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그 질감을 체험하고 그 위에 내 날것의 호흡과 땀을 보태면서 열매를 응시하고 열매 쪽으로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성실한 독자에게 주어진 선물이 바로 그것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시 읽기는 독자의 책무를 이행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 그 책무를 환기하는 작업이다. 그것이 지금-여기의 문학을 더욱 생기 넘치게 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지만, 한편으론 이 작고 미약한 군소집단의 활동이 더 넓은 곳으로, 더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야 함을 안다. 시와 문학과 책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많은 이들이 독자의 본래 자리를 되찾아오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작품은 독자 없이는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일 수 없으며, 작품 안의 그 부실한 틈들을 독자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때에야 작품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자의 자리 또한 그때에야 비로소 독자에게로 온전히 귀환하는 것일 테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우리 세미나에서 오간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기록을 펼쳐 보이는 일이었다. 2017년 봄부터 그 작업이 진행되었다. 매주 복기해 쓰던 후기 차원의 기록을 정리하여 한 문예계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 전문가나 권위자가 아니라, 아마추어라고 불려왔던 자들의 시 읽기가 어떤 것인지, 그 읽기 또한 얼마나 멀고 깊은 데까지 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하나의 시를 열고 닫는 데 얼마나 집요하고 험난한 전투가 펼쳐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걸음이 도달한 끝이 얼마나 환한지 도처의 독자들이 알기를 희망한다. 문학의 공간이 당신을 위해 언제나 이미 비워두고 있었던 그 자리가 너무 늦지 않게 당신에게 발견되기를.
글을 마치기 전에, 앞서 인용한 글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블랑쇼의 문장을 옮긴다. 이는 문학의 공간 구성과 관련된 독자의 책무와 능력의 강조이자, 그에 대한 강력한 하나의 주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쓰는 자는 또한 끝나지 않는 것 그리고 끊이지 않는 것을 ‘들은’ 자, 그것을 말로서 듣고서 그 말과의 공모에 들어선, 그 요구를 따르는, 거기서 자신을 잃어버린, 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견디어 내어 멈추게 하고, 그 틈에 그것을 붙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이 한계에까지 확고하게 밀고 나가 발음하고, 그것을 가늠하면서 다스린 자이다.”
독자는 작가를 뒤따르는 자가 아니다. 문학의 공간은 둥근 공간이며 정해진 시작과 끝이 없는, 시작과 끝이 맞물릴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가 독자를 뒤따르는 한에서만, 독자 또한 작가를 뒤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자라면 독자는 이어 말하는 자이며, 독자가 듣는 자라면 작가 또한 독자의 말을 듣는 자인 것이다. 문학의 공간을 열어내는 한 축으로서 독자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여 지치지 않고 듣고 말할 때, 문학의 세계는 더 깊은 지평을 확보하게 될 것이고, 그 세계를 듣고 말하는 작가의 언어 또한 이전과는 다른 무게를 가지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1)『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 앞의 책
*문희정 2016년 《시와반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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