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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집중조명/작품론/강원갑/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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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집중조명/작품론/강원갑/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 생生의 심연深淵 을 건너는 방법
강원갑
내가 보는 것, 경험하는 것이 ‘나’를 구성하고 존재하게 한다. ‘본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고, ‘주목한 것’은 거기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했음을 뜻한다. 이를 통해 주체는 대상이나 사건을 하나의 현상으로 지각하는 한편 기억의 방식으로 이를 지속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경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일부 파편으로 남은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망각된다. 망각된 것들은 의식의 기저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을 계기로 회상의 방식이로든 상상의 방식이로든 의식의 세계로 소환된다.
“골목을 막 빠져나온 바람이 오른쪽 뺨을 스친다.”(「골목을 빠져나오는 바람」)는 것만 해도 그렇다. 여기에서 ‘골목’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억의 근원을 표상한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바람’은 그것의 일부를 현재로 소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오른쪽 뺨을 스친다.’는 것은 그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화자가 이를 유의미한 현상으로 지각하고 있음을 뜻한다. “펼쳐진 책장같이 살아와서 골목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욱 궁금하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바람’이 누군가의 현재의 삶을 환기하는 “길 위의 발자국들을 지우”며 “일 년 내내 겨울 표정으로 서 있는 절벽, 아버지의 모습”을 불러낸다는 점이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소리도 없이 너무 자주 웃는” ‘나’의 모습과 대비된다. ‘펼쳐진 책장과 같은’ 화자의 삶에 비추어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는’ 아버지의 삶은 ‘골목 안’과 같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골목 안’과 ‘아버지의 삶’이 등치 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아버지가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마지막 두 문장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종아리 검게 탄 아이들 소리”가 “제 몸에 눌려 하얗게 갈라진 뒤꿈치처럼 딱딱하다.”에서 보이듯 그것은 당신으로 인해 자식들에게까지 삶의 무게가 지워지는 것에 대한 자책감 내지는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아버지’-‘나’>의 관계가 현재의 <‘나’-아이(들)>의 관계로 전환되며, 이는 ‘아버지’의 삶의 문제가 ‘나’의 삶의 문제로 전이됨을 함의한다.
그런데 현상을 지각하는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로 향하여’ 있으므로 지향성이 다르면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이라 하더라고 경험의 달라지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이러한 활동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몸은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이자 인간 존재의 실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몸’으로서의 인간에게 육체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성적 활동이 불가능하며, ‘몸’은 육체적 활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성적 활동까지 통합한다고 보았다. ‘지각’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한다면 ‘지각’은 이성적 사유보다 앞서는 몸의 활동이다. 대상과 주체가 서로 만나 관계함으로써 지각이 일어나는 장에서 인간은 몸에 축적되어 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함께 지각하고, 다양한 감각이 소통되고 통일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몸의 활동은 지각하는 주체가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고 세계로 나아가는 핵심이다.
「어떤 신호」에서는 “함께 떠나보내지 못한 어머니 옷가지를 보”며 “문득, 내 삶과 죽음이 시시해진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머니의 부재’를 ‘지각’하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죽음에 이르러 제 몸 속엣것 일으켜 세우”는 “고구마 하나”와 “빈터에 던져 놓은 호박 한 덩이”는 화자와 등치된다. 우선 화자는 “싹 하나 겨우 눈을 뜬” 것을 보고 “그리움이란 저렇게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어 “날된장으로만 비벼 먹던 밥”에서 “가난한 밥에 슬며시 스쳐 지나가던 손 그림자”, 즉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린다. 하지만 곧이어 “몸의 한 부분으로부터 날이 저문다”에서보이듯 ‘어머니의 부재’를 체감한 후 이를 “12층 창밖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으로 치환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전제가 그립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상실한 것에 대한 재확인이며, 이에 대한 그리움이 “물컹하게 썩은 호박”에서 “싹들 한 무더기 돋아난” 것으로 제시된다.
문제는 화자가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벽도 넘으면 꽃이 되고 꽃도 넘지 못하면 벽이 되는 시절을 지나왔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는 “하늘에 든 수많은 주름들(죽음)”을 ‘봄’으로써 지상의 “내 길이 충혈된 까닭(삶)”을 확인하는 데로 이어지고, 그것이 “결핍”으로 인한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과 자신의 내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지금도 내 눈빛은 나를 겨우 견디며 어딘가를 건너가는 중이다”에서 ‘눈빛’은 대상을 ‘지각’하는 통로이다. 그리고 ‘나를 겨우 견디며’는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지각 주체인 자신을 가리킴과 동시에 이들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함축한다. ‘어딘가를 건너는 중’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그 결과 “깊이를 보여주지 않는 거울 속”에서 자신이 “거느린 어둠”을 ‘보게’ 된다. ‘거울’은 대상을 비춰준다는 점에서 존재를 반영하지만 그 ‘속’은 감각이나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어둠’은 거칠게 말하면 ‘몸’이 축적해 놓은 세계이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말할 수 있는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점은 「내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화자는 “내 生에는 행간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生이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행간 속에 내 몫의 눈빛이 머물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빛이 머물 틈이 없었다’는 것은 ‘生’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내 생은 매일 결을 바꾸는 바다의 비문을 닮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을 바꾼다는 것은’ ‘바다’의 속성이지만 이것이 표상하는 ‘내 생’은 ‘비문’이기에 “읽는 순간”, “새겨진 결들이 몸을 뒤척이며 표정을 바꾼다.” 이러한 뒤틀림으로 인해 존재가, 삶의 의미가 하나로 확정되기(말해지기) 어렵다.
한편 “비인칭非人稱인 내 몸”에서 ‘비인칭’은 ‘그저 있는’ 익명의 순수 존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인칭’인 사람들이 “제문장을 새겨 넣”는다는 것은 ‘타율적인 관계 맺음’으로 타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존재가 규정되어진다. 반면 “비인칭인 내 몸에 인칭인 네 문장을 새겨 넣는다.”는 것은 주체의 능동적인 행위로 ‘자율적인 관계 맺음’이자 새로운 자기 정립이며, ‘몸’을 통한 존재의 드러냄의 방식이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자면 전자가 나의 존재 유지를 위해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라면 후자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의미한다. 욕구는 대상을 향해 주체 바깥으로 나갔다가 그 대상을 주체의 향유거리, 소유물로 삼음으로써 다시 주체에게로 귀환하는 반면, 무한을 향한 욕망은 귀환 없이 주체의 바깥으로 초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에서 존재자(주체)로 미끄러지는 자기 정립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를 통해 존재자는 자기 내면을 지닌 독립적인 실체로 거듭난다.
이렇게 볼 때 “뿌리는 씨앗의 숨결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초월하는 행위를 표상한다고 하겠다. “뿌리와 꽃 사이, 꽃과 씨앗 사이에 뜬 달”은 ‘나’라는 동일자로 결코 흡수되지 않는 타자로 무한을 욕망하도록 하는 존재이다. 초월을 위한 선제조건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비대칭적인 관계 정립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 정립은 “행간을 두지 않고 내 길을 무찌르며 한 번도 되돌아서지 못했던 길을 간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달리 “건널목 출발선에 선 사람들”은 “제 경계를 훌쩍 뛰어넘지 못하는”데 이는 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경향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자아는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비극이 연출된다. “눈물 덩어리 같은 밤, 비로소 찾아온다.”는 점이 그렇다. 여기서 ‘밤’은 존재자 없는 존재의 비유이다. “내력을 엿볼 수 없는 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텅 빈’ 익명의 존재(있음)에서 잠을 통한 자기 정립을 거쳐 주체가 탄생하게 되므로 ‘밤’은 유한성에 갇힌 존재자가 무한한 시간으로 초월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초월이 시간의 탄생이며 존재와는 다르게 됨을 의미한다면 자아와 자기의 숙명적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조건이다. 존재 속에 갇힌 자아가 타자와 관계함으로써 자기로부터 탈출하여 무한한 시간을 획득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과를 따라가다 보면 나에게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로의 회귀불가능성’을 의미한다기보다 ‘존재 밖으로의 초월 가능성’을 언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상징적 기호체계인 언어의 세계와 닮아 있다.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쓰이는 상황과 맥락, 규칙에 따라 동일한 형식이라도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다. 가령, 하나의 문장에서 한 낱말의 의미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낱말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유동적이다. 한 순간 본질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던 의미가 새롭게 나타난 문장에 의해 미끄러지며 유보되고, 자신을 규정해 줄 새로운 관계를 찾아 끊임없이 떠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그렇다. 문장이 종결되는 순간 확정될 것처럼 보이는 ‘의미’는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결핍과 불완전성은 언어의 존재방식이자 언어의 사용 주체인 인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완전해 지지 않는, 그래서 타자와 관계 맺음을 통해 끊임없이 완전성을 욕망하고 지향하는.
「날것들, 속내가 불편치 않다」에서 주체는 기억과 기억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 자아와 타자 사이, 존재와 존재 사이, 부재와 부재 사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삶의 의미를 탐색한다. “0과 1 사이에 나는 환유적으로 산다.”는 것은 화자가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닌 주체로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 속에 존재함을 뜻한다. 이러한 차이와 다름을 지향하는 것이 ‘환유적’ 삶의 방식이다. 각각의 주체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타자이며 이러한 타자는 전체성을 기반으로 동일자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환유는 ‘우연성’과 ‘파편성’, ‘통시적 연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상적 삶과 더 잘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목도하는 것이 ‘죽음’인데, “오늘 아침 그 여자가 출근하던 길을 벗어난 곳에서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동생이 죽었다.”, “그 남자의 집이 온통 비로 점령되는 것을 나는 새벽녘까지 계속 지켜본다.”, “그 아버지가 자살했다.”, “가끔 화장터 높은 굴뚝에서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은 삶의 우연성과 무의미성을 드러냄으로써 삶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이밖에 “옆집 남자”나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바”꾼 “여자”, “국적이 다른 신”, “사십 년 만에 만난 친구” 이야기 등은 파편성과 단속성을 지닌 환유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0’과 ‘1’은 언어의 물질성에 바탕을 둔 기표들로 개별자들의 존재 양식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표들은 “강 이쪽과 강 저쪽”, “내 아닌 것과 내 아닌 것”, “나무와 나무로 이어지는 점과 점”, “나비의 날갯짓”, “오른손과 왼손”, “몸과 몸”, “징검돌과 징검돌”로 전치되며 연쇄사슬을 이룬다. ‘나’는 각각 이들 ‘사이’에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사이’에 “강이 있”고, “이지러진 달이 또 뜨고 또 지“며 “연두빛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강’과 ‘시간’이 일회적이라면 ‘달’은 반복과 순환성을 지닌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삶을 표상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위치한다는 것은 사유하는 주체와 욕망하는 주체, 주체와 타자를 연결함으로써 상징 너머 남아 있는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욕망의 연속이라면 연쇄적 치환을 통해 잠정적으로나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며 완결성을 지향해 가는 것이다. “거울 속 내 그림자를 읽는다.”는 것이 이에 대한 실천적 행위인데, ‘그림자’는 주체의 흔적으로 죽음 충동을 삶의 충동으로 바꾸어준다. “헛디뎌야 보이는 것들”과 “중심을 잃어야 찾아오는 것들”의 “무늬” 역시 그렇다.
「눈물의 근원」은 “차가움으로 뒤척이는” ‘몸’ 속 깊이 감춰져 있던 존재들을 드러낸다. “‘다시’하고 발음해 보았습니다.”는 행위를 반복한다. 오직 말하는 존재에게서만 무의식이 존재하며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이는 삶의 충동하는 타자로 기능하는 무의식을 끌어내는 행위이다. “눈물”, “백목련 한 송이”, “붉은 아기 동백” 모두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것일 뿐만 아니라 “영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절망 같은” ‘눈물’은 “‘다시’라는 말의 등에 끝 모를 영원永遠이 등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고, ‘백목련 한 송이’와 ‘붉은 아기 동백’은’ “떨어진 꽃들을 다시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듯 “영원히 못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원’성은 상징계 너머 ‘있음’의 존재 양식이므로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다. 즉, “건널 수 없는 심연”으로서 ‘다시’에 속한 것들은 현실화되지 않은 대상이므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몸’을 통한 ‘지각’은 대상에는 늘 가시화되지 않는 ‘잠재적인 부분들’까지 종합하여 체험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체험이 가능한 까닭은 “돌연히 타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제든 내 지각의 중심에 올 수 있기는 하지만 내 주의력의 변두리에 위치하는 대상들의 세계에 희미한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즉 “변두리에 있는 그런 대상이 현존한다는 앎과 느낌은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게다가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와 같고, 환유가 은유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차이 놀이를 통해 실재계로 틈입하여 자기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언어 놀이로서 문학의 경우 현실을 모방하거나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세계의 관계를 뒤틀고 지연시킴으로써 비결정적 실재계를 구현하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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