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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소시집/최명진/말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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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55회 작성일 19-06-2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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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소시집/최명진/말 외4편


말 외4편


최명진



정말 말도 안 돼, 라고 말하자 그 말이 수풀에 우거져 너는 녹음에 들어앉고 말았다 말도 아니지 너는 거기서 별 탈 없이 자식도 낳고 살았으니 불현듯 왜 말이 안 되지, 하니 말은 긴 머리의 여자가 되어 너를 손짓하게 되었다 참 이상해 두 가지 혀의 말은 발밑을 스물스물 지나가고 탐스러운 말들 너는 참 조심성이 없지 말의 과육을 뚝뚝 흘리며 남은 손에 또 한 개의 의문을 쥐어 살피지만 어디서 말이 새어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미 깊이 들어간, 소리쳐도, 어디쯤에 너는 사라져버린 걸까 꼬리가 있다면 소문이 길 더듬거나 안개가 돼버린 말도 있었을 텐데





레슨·1



첫걸음 전문가입니다
제자리걸음 아니구요
첫 발과 막 발을 나란히 어긋내는 거죠
처음엔 다 헛걸음 같습니다
열 걸음 못잖은 첫걸음도 있구 말구요
날고 긴다는 자들 그럼
길이 무슨 소용입니까
바닥이 장난은 아닙니다
모래신발은 털어버리시고
사막으로 이해되니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없다면
첫걸음이 통할 수 있지요
탄탄한 길은 제공되지 않아요
귀하는 첫걸음을 신고 계십니다
보란 듯이 두 발은 의심되지요
나쁘지 않아요 힘주지 말고 넘어지세요
허리는 또 일으켜 세우니까요
첫 걸음에 무슨 낭떠러지가 숨었을까요
발자국이 모였습니다
누가 첫 발을 뗄 지
복습해볼까요





거지와 전갈과 벌목꾼 이야기



서울역 출구5번 삼성 양문형냉장고박스에서 기거 중인 최 씨는 아닌 밤중에 이상한 소릴 듣게 된다고, 밥 잘 챙겨먹고 있쟈잉 우린 염려 없어야잉 미국 간 아들아 추운디 보일러 애끼지 말고잉 그때마다 산촌마을엔 어둑한 밤이 찾아오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테레비 끄고 일찍 잠이 드신다고 최 씨는 지난여름 뒷산계곡에서 동전 백 원을 잃어버린 후로 아직까지 수풀 따위 헤쳐 그것을 찾고 있다고 때 절어 광이 나는 바지에 달달한 것이 고파 마른 수수깡을 빨던 최 씨는 자기가 가여운 아이인 줄 모르고 올챙이를 잡아다 가재에게 주고 가재를 잡아다 몸이 아픈 막내삼촌에게 주고 마을 입구에 앉아 해질녘 경운기를 몰고 돌아올 아빠 엄마를 기다리며 과자를 사먹지 못한 서러움에 펑펑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엄마전갈 등에 업혀 모처럼의 친정나들이를 가던 참깨알만 한 새끼전갈들은 하필 외나무가지에서 손찌검이 심한 주정뱅이거미를 만나게 된 거라고 역시나 괄괄한 엄마전갈은 독 오른 꼬리를 곧추 세워, 아따 왕년에 칡뿌리 좀 씹어 봤어야잉 엥간히 꼬라보지 말고 싸게 덤벼 보랑께잉 퍼렇게 일그러진 주정뱅이거미의 선빵에 새끼전갈들은 그만 뿔뿔이 흩어져 개미밥이 되었거나 웅덩이에 가라앉거나 지나던 고라니발톱에 짓이겨졌거나 소문만 무성해진 거라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막내전갈은 흙의 냉대에 벌벌 떨며 바스락대는 소리에도 가슴 쓸리는 일생이었다고 평생 남의 등 비수를 꽂고 살아온 외로운 삶이었노라 펑펑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벌목꾼은 톱날을 당겨 산천을 울리네 온 산천 울리네 나무는 곧 말귀를 알아듣고 우수수 쓰러지네 와르르 실려 가네 두둥실 떠내려가네 강물은 제 등뼈를 깎아 안으로 몸 웅크리네 사람은 이미 건너간 사람 메아리쳐 부르네 뻐꾹새 울음은 혼자서 가네 벌목꾼은 톱날을 당겨 산천을 울리네 온 산천은 따라 우네 따라서 우네





슬픔은 매번 이렇게



이런이런 어쩜 좋아, 어서 가서 슬픔의 불을 꺼야 하네 슬픔의 냄비가 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네 슬픔의 집엔 지금 아무도 없어 서둘러 가야 하네 슬픔의 시동을 켜고 슬픔의 엘리베이터를 올라 슬픔의 현관문을 열면 슬픔의 탁한 기침이 콜록콜록 슬픔의 코를 막고 슬픔을 환기시켜야 하네 이런이런 나는 왜 이리 슬픈 정신머린지 내 슬픔의 일상은 매번 이렇다네


사실 오늘 아침 나는 슬픔을 절반 밖에 먹질 못했다 슬픔이 상할까 남은 슬픔을 끓는 냄비에 부었다 슬픔의 전화가 울려와 슬픔의 전등이 꺼지고 슬픔의 까페에서 당신 슬픔과 내 슬픔이 만나 슬픔을 이야기할 때 슬픔은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 슬픔의 주인공은 누구죠? 나는 조미료가 필요 없는 내 슬픔의 비결을 이야기했다 눈물을 나눈다면 그 반을 당신께 드릴게요 우리는 슬픔이 각별했다 슬픔은 제게 축제와 같지요 우리는 지적인 슬픔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격하게 슬프기도 했다 너 따위 슬픔은 지옥에나 가버려 니는 니 슬픔 밖에 모르지 슬픔 버러지 같은 놈아 당신의 슬픔은 틀렸습니다 감정 상 올바르지 않아요 슬픔은 멀리 울리는 경적과 같다 슬픔에 슬픔이 끼어들면 다른 슬픔이 막혀 슬픔체증이 일기도 한다





울기 직전



재판관이 묻자
남자는 짧게 답한다


법정에 서서
하얗게 센 머리로 셈을 구한 듯


그는 노역을 살기로 했다
돈 천만 원이 무서웠나보다


죽을 죄 지었다고,
그밖엔 꾹 입술을 다물었다


옥살이보다 더
큰 짓눌림이 그를
계속해 누르고 있었다





<시작메모>


내 시에 대해 아직은 그렇다 내세울 거라곤
뒤쳐지지 않으려는 두 다리 뿐이니 말이다
달리기라니, 달리기는 아닐 텐데
달리다 때가 되면 밥도 먹고 잠도 잔다
그래도 어디쯤 가서는 선뜻 주저앉아
다시금 시를 생각해보겠다
그럴 날이 오리라 믿으며.





*최명진 2006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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