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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소시집/이인성/골목길, 민들레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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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소시집/이인성/골목길, 민들레 외4편
골목길, 민들레 외4편
이인성
빼곡하게 삶의 모서리들을 품은 하늘도 보고
바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린 땅도 보며
그리움만큼 비스듬히 기울어진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철물점, 미장원, 국밥집, 옷가게의 빛바랜 간판들이 어지러웠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만지작이며 밋밋한 바람이 불어 갔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하루, 이틀,
일년, 이년,
먼지 자욱한 파란 철대문 옆 문간방
빛바랜 사각의 창문틀 안에 담겨있는 풍경처럼
마음 한켠 감겨 있었던 네가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오늘은 습관이 되어버린 은밀한 기억 무겁게 어깨에 걸치고
그 흔적 더듬고 있다
보고픈 만큼 길고 길게 늘어진 체념을 담은
먼 길 떠돌던 곤한 바람에 떠밀리어 내 그림자 끝이 닿은 곳
갈라진 시멘트 바닥 틈새로 씨앗을 가득히 머금은
민들레 한 송이 이제 지려하고 있다
작은 흔들림에도 흩어져 버릴 듯한 뽀송한 홀씨들
나의 마음인 듯 너의 마음인 듯
가는 바람 한 줄기에라도 딴 세상으로 가서 뿌리를 내릴
너의 알 수 없는 그런 모습인지도,
바람이 남긴 말
갈대로 엮은 울타리 안쪽 바람이 머물다 가는 집
건조해진 부리를 부르르 떨던 새가
곤한 잠을 도란도란 내려놓는 곳
가을을 더듬던 마른 우듬지, 나무 아래로
잎새 노란 색 하나를 성급히 내려놓는다
나이테 휘감고 오른 생명줄 불끈 허공을 더듬을 때
뭉실뭉실 흐르는 구름자락 아래
내가 꿈꾸던 사랑을 비스듬히 걸어두고
기웃거리는 달무리 품은 달 아래 벌레들 포근한 잠자리로 돌려보내고
기다림을 배우기라도 하는 듯, 시베리아 한기에
깃털 속 머리를 파묻는다
바람의 끝자락 남기고 간 흔적 어루만진 기억으로 혼란스러웠던 어제는
긴 석양의 그림자 번져서 경계가 지워졌기에
이제 서글프지 않을 것이다
비밀스러운 몇 개의 사연을 가지고서는
이제 더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름 소낙비가 남기고 간 상처로 얼룩져버렸고
설원의 고요가 내심 걱정스러운 나무는
조밀한 가지 틈 지나온 바람 앞에 주황의 기지개를 켠다
마음 언저리 다독이던 사랑이었다 한들
그대, 눈길로만 느낄 수 있었던 고백이라면
발등에 떨어지는
내일의 추억 같은 꿈이라고 말하겠다
그만하고 싶은,
이 나이 되니
이제 누구를 만나고 떠나보낼 때
헤어지기 아프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동여매는 습성이 생겼다
이 나이 되어서도
누군가 떠나보낸다는 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
숱한 이별 간직한 나의 노래 그래서 슬프다
이젠 벅찬 숨결의 노래는 그만 부르고 싶다
아무리 동여매어도 풀어지고 또 풀어지는 건
미성숙의 인격 탓인가
기형의 습성 탓인가
오늘도 나의 밤은 불안한 호흡으로 채워지고
나 아프지 않기 위해
헤진 마음 더욱 동여매는 시간
서걱이는 대숲 심란한 바람
내 마음 숭숭 뚫린 틈 사이 빠져 나간다
어차피
앞서거니 뒤서거니
너도 가고
나도 갈 터인데
여분의 시간 앞,
물기 잔득 머금은 화선지 묵화 한 폭
경계 불분명한 지평선 한 줄 굵게 그어본다
가창골
세월을 담고 또 담은 어둠살 지는 가창골
다녀간 저마다의 절망 짙은 그림자 여울진다
가슴에 묻은 억울한 죽음
총, 칼, 죽창으로 죽이고,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인 자는 누구일까?
서러운 의문이 무성히 자라면
가창골, 바람이 발바닥 냉기로 타고 올라
감각이 무디어진 죄책감으로 머리카락 곤두선다
지금 외로운 자, 더 그리워할 수 없으리
배고픔과 고달픔을 애원했던 사람들
恨을 남긴 채 덧없이 떠나고
진실은 바람으로 흩어져 숨는다
삶은 헛된 꿈이라는 둥 그런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자
두 갈래 물줄기 따라 흐르는 상념
마을 개짓는 소리에 묵직한 일상의 밤이 된다
그런 회귀를 한다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때를 놓친 잠은 멀기만 하다
시계바늘 돌아간 만큼 세월이 흐른 거다
솔숲 에이는 바람소리 내며 지나가는 무심한 그대들 잔상 뒤
나는 결국에 혼자 남겨진 거다
몸부림쳐도 홀로일 수밖에 없는 나의 밤
기억 너머
가창골 심란한 운무가 흩어지는 안타까운 밤
주문진항에서
냉기 서린 늦가을의 그림자가 머물다간
사라진 경계 더듬으며 따끔거리는 시선이 다다른 곳
가도가도 만나지지 않는 신기루
앙금 진 점 하나였다
내 숨결이 지나쳐온 회상 속 많은 파문들은
그렇게 이어진 흔적
어디였는지 모를 순간의 기억들이 헝클어진 채
그 점들 하나하나 밟히는 길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뒤섞인 혼돈의 걸음
은밀한 파문 가슴에 묻고 곤한 잠은
민박집 차디찬 방바닥에 무기력하게 내려놓았다
아우성으로 창문 틈 비집고 드는
심란한 바람소리에 깨어버린 시간
나는 詩語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만들고
두런두런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찰랑찰랑 별빛 가득 담은 주문진 바다의 거친 바람과
긴 저음의 파도소리가 동행해 주는
사연 많은 포구의 밤
골똘한 시간 속의 점들,
길 위에서
머뭇거리는 낙엽 몇 담은 가로수 길
겨울나무,
담백한
빈 가지의 나무가 좋았다
주름 잡힌 시간 속의 도시 모퉁이
사람들,
외로움이 깃든 이가 소탈해서 좋았다
외로움을
곪아 터지게 하고
새 살 같은 새로운 경지에 오르기 위한
문득,
떠나는 여행의 이유가 좋았다
손 흔들며 돌아선 너의 뒷모습
제비꽃 향 물씬 묻어나는
기억,
그림자 같은 속삭임으로
네 마음 내게로 흘러올 때가 좋았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자리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엇인가 되어주는 삶
드리워질 죽음의 그림자,
메마른 영혼 적셔주는
흐르는 강물 같아 좋았다
무수한 생각의 갈래들
거슬러가다 보면
결국, 한 줄기로 머물겠다
작정 없이 떠돌던 길 위에서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시작메모>
세상도 나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상한 삶과 관계 속에서
이제, 더는 흔들리지 말고 평온하고 싶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독이고
詩를 읽으며, 쓰며 고요를 찾고 싶다.
“詩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라는 기억을 되살려 본다.
*이인성 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빛이 아프다』. 단편소설 『산길』외. 한국작가회의. 한국소설가협회. 대구 가톨릭문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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