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0호/신작시/이규원/나는 기계와 사랑을 하는 중 외1편
페이지 정보

본문
70호/신작시/이규원/나는 기계와 사랑을 하는 중 외1편
나는 기계와 사랑을 하는 중 외1편
이규원
오른쪽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츰차츰
바깥쪽으로 애무하며 나오다
왼쪽 안 골진 곳까지 어루만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때론 아주 날카로운 쇳소리를 빡빡 내도
극한의 치부를 다 알고 있는 그의 손길을
나는 거부할 수 없고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의자에 눕혀진 건지 안겨진 건지
한 남자와 지금까지 고집한 체위를 잊을까봐
깍지 낀 두 손에 주어진 힘은 벌리고 있는 턱만큼이나
신음소리도 못 내고 심장은 덜덜 떨린다
마음으로 격렬하게 밀착해오는
적극적인 구애에 눈을 감고
내 생각과 모든 과거를 몽땅 내주며
손가락만으로 찍어내 쪽쪽 빨았던
그 감미로웠던 날들까지 발설하고 만다
회색빛 몸짓은 부드럽고 섬세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있던 경직된 과거를 잊고
무거운 체증을 다 밀어 내고 만다
해빙 이후
건너오지 않아야 할 것들이
강을 건넜다
산수유는 발끝부터 간지러웠고
곁가지들은 위험한 만큼 낭만적이었다
미세한 출렁임에도
바람의 맛이 달디 달았다
온몸에 힘을 줬다
속살거림은 어디로 가고
소문 하나가 스르르 강물에 풀려 나갔다
때론 봄이 더 불편할 때가 있다
죽음 위에 싱싱하게 돋아나는 생기
외면하지 않고 미친 듯이 피워내는 저 망각
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을 때에도
누구의 허락 따윈 받지 않았다
그날은 새들도 풀들도 삽자루도 모두 함구했다
잎을 피워내고 입을 다물었다고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절이라는 말과 함께 끝내 묻혀버린 안부
산수유가 한꺼번에 터트린 노오란 숨소리에
현기증 나는 내 기억들이 아찔하게 전부 떨어지고 있다
*이규원 201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옥수수 밭 붉은 바람소리』.
- 이전글70호/신작시/이종민/기다리는 사람 외1편 19.06.25
- 다음글70호/신작시/최세운/어물전서魚物廛書 외 1편 19.06.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