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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종민/기다리는 사람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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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종민/기다리는 사람 외1편
기다리는 사람 외1편
이종민
정각에 건물 앞으로 내려갈 게요
건물 앞을 서성이면
정각이 뚜벅뚜벅 어깨를 스쳐간다
층수를 헤아리면 보이지 않는 층이 있다
그곳에도 여러 명이 숨을 쉬고 있을 텐데
이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은 없어요
입구에서 높이가 솟구친다
옥상에서 난간에서 창문에서
침묵이 쏟아져 내린다
수많은 정각 위에 쌓이는 층계들
단단하게 웅장하게
셀 수 없는 층계들
손잡이를 잡으면 시간이 멈춘다
발바닥을 대는 곳마다 현재가 휘발한다
떠나는 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문 앞에서 기다릴 게요
승강기가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다
쓰는 사람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이 화면을 보고 있다 화면을 보고 있을 때 그곳은 세계다
손가락과 팔의 일부분과 화면과 자판만이 세계다
그때 등 뒤에서 칼이 온다
칼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이어폰을 끼고 있다
노래는 back seat lover
화면에는 눈앞에 없는 세상이 써지고 있다
칼이 다가오는 중이다
나를 위한 너를 위한
누군가를 위한 바다와 해변이 화면에 채워질 때마다
등 한복판으로 한 뼘씩 전진하는 칼
문이 닫히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안타깝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노래는 back seat lover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면 화면이 아름다워지니까
등 뒤도 아름다울 거라 생각한다
칼끝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티셔츠 오른쪽 어깨를 적신 얼룩 붉은색 동그란 얼룩이 점점 넓어지며 흐릿해진다
방 안에 시체가 낭자하다 핏빛 발자국이 바닥을 수놓았다
칼끝이 등을 통과해 가슴을 뚫고 나온다
안타깝다 아름다운 세상이 화면에 거의 다 채워지는 중이었다
가슴을 뚫고 나온 칼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며
쓰던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쓰던 사람이 방을 나서다가 쓰러지자
곧 다른 사람이 화면 앞에 있다
화면은 비어있다
그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의 아름다운 세상이 화면에 건설되기 시작하고
멀리서 다시 칼이 다가온다
*이종민 201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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