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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원양희/아주 먼 옛날에 만나요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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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원양희/아주 먼 옛날에 만나요 외1편
아주 먼 옛날에 만나요 외1편
원양희
수취 불명의 적적한
우편물만 쌓여가네요
낡은 복도 지나 층계마다 놓인
화분들 곁에 가만히 몸 기대면
자잘한 식물처럼 시들어갈까요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절명絶命의 순간 있겠지요
시간은 넌출거리는 곡선처럼
무한대로 우리를 데려갈 거에요
이제 막 드리운 햇살까지
동봉하려는 이 편지는 오늘부터
천 년 쯤 전으로 도착할지 몰라요
버들개지 고요히 떨리는
언덕에 앉아 먼 산,
먼 산의 이마를 보듯 당신,
눈부시게 저를 알아보겠지요
무덤 위로 눈발 날리고
무덤 쓰러지고
풀들이 싱그럽게 솟고
무덤자리인지 모르고 지나는 사람
드문 드문 보이는 아주 먼 옛날
그때 만나요
꽃대궁을 빨면 꿈처럼 꿀이 빠져나오고
연탄아궁이 위에서 꾸덕꾸덕 실내화가 말라가고 낮은 시렁 아래로 하얀 소다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채송화 꽃향기 흙마당을 채우고 사루비아 꽃대궁을 빨면 꿈처럼 꿀이 빠져나왔다 빗방울이 오기 전 바람이 먼저 비틀거리며 왔다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제 몸을 불리는 동안 아이는 섬돌 위 코고무신처럼 앉아 있었다 뚝뚝 빗방울이 되던 아이,
빗방울의 맛,
계절의 크레파스 상자엔 언제나 연두와 파랑이 부족했다 하늘 구름 비 언덕 아지랑이 메아리 꿈 새… 좋아하는 단어들을 가방에 담고 집을 나서고 싶었던, 두근거리는 깃털과 하염없는 발가락을 가진 새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부러진 크레파스처럼 구석진 자리 오도마니 쪼그려 있던 아이,
조그만 손바닥을 오므려 빗방울을 받아먹거나, 꽃대궁의 꿀을 빨거나
*원양희 2016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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