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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인상/배아라/텃밭의 내력 외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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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인상/배아라/텃밭의 내력 외4편
텃밭의 내력 외4편
배아라
장대비 쏟아진 텃밭에 산사태가 났다.
흙더미 사이로 백골 시신이 튀어 나왔다.
아버지 텃밭 끄트머리에 새 무덤 만들어 주셨다.
해마다 풀 깎고 잔디 돋우던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 일 맡으셨다.
엄동설한 눈발 속 무덤에서 훤칠한 남정네 걸어 나오더니
성큼성큼 고개 넘어 갔다.
어머니는 그 남정네 집으로 제삿밥 먹으러 갔다고 하셨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더 지극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셨다.
(그 남정네 어머니 꿈속에 고맙다고 수십 번 절 하셨다지.)
그 덕에 어머니 구순에도 건강하시고 우리 가족 모두 다복했지.
고슴도치
여름의 끝자락 코끝 찡그리는 냄새를 찾았지.
냉장고 뒤편에 고슴도치 한 마리 웅크리고 있었지.
밖으로 밀어내려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었지.
움푹 패인 옆구리에 구더기가 바글거렸지.
어머니 따가운 가시에도 구더기 털어내셨지.
약을 곱게 갈아 먹이고 상처에도 붙여주셨지.
쳇바퀴 뒤집어쓰고 고슴도치는 잠이 들었지.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어머니 고슴도치 산비탈에 놓아 주셨지.
어머니 바람 한 점 없는 드넓은 곳에 서 계셨다지.
돌아가신 외할머니 고슴도치 따라가라 하셨다지.
고슴도치가 몇 겹 문 열어주고 또 열어 주었다지.
심장병 앓던 어머니 숨이 없자 아버지 펑펑 우셨지.
달도 없는 길 병원도 못가고 손만 붙들고 우셨지.
워워이 워워이 고슴도치 부르며 어머니 숨을 거두셨지.
앞 못 보는 그 노인
수백 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잎이 푸른 팽나무 밑 움막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창호지 문살 뚫고 들어오는 햇살 소리 듣는다. 겨울에는 길 건너 초가집에서 청솔가지 까만 연기 피어오르는 소리 듣는다. 언덕바지에서 소 먹일 풀 베는 총각의 휘파람 소리 듣는다. 다 헤진 옷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소리 듣는다. 깡통 들고 비탈길 더듬거리는 지팡이 소리 듣는다. 도랑물 바위틈에 가재 지느러미 흔드는 소리 듣는다. 한들거리며 손 내미는 들꽃의 웃음소리 듣는다. 꽃 속에서 열심히 꿀을 빠는 벌들의 날갯짓소리 듣는다. 돌아서 지들끼리 놀다가 다투는 아이들 향해 지팡이 한 바퀴 돌려 바람소리를 만든다. 그 노인의 빈 깡통에 몇 숟갈 밥과 김치 담아주는 어머니의 허리 삐걱이는 소리를 듣는다. 처마밑 제비들이 지지배배 지지배배 박수를 친다. 내 고향에서는 까만 세상도 하얀 소리로 따뜻하게 열리곤 했다.
바다가 된 당신
햇살이 내려와 손잡아 주었잖아요.
대숲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도 마다 하셨잖아요.
당신은 옷자락 펄럭이며 바다로 걸어가셨지요.
밭 매던 호미 흙이 채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조화로 그 가슴에 바다를 담으셨는지요.
당신의 흔적들은 더 푸르게 바다와 하나가 되었지요.
소라 껍데기에 붙은 귀가 잘려나가 뭉퉁그래지면
당신의 가슴도 잘려 나갈까 걱정이 됩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먹먹한 생각들이 고요해질까요.
뱃고동 소리가 흐느적입니다. 바다 냄새가 흐느적입니다.
모래알이 떼구르르 굴러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야
거북 등껍질 같이 단단하게 굳어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
바람이 창문 틈새를 움켜잡고 있습니다.
영흥도 대숲에서도 옷자락 소리 쏟아집니다.
밤새 바다를 바라보며 흔들립니다.
메밀국수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해 계시다가 퇴원해 시골집으로 내려가시는 길 사위 고생 많이 했으니 조식은 내가 사 주마.
허름한 식당 문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선다. 거동도 불편하신 장인어른. 메밀국수 가락이 고무줄이다.
그게 장인어른과의 마직막 식사. 국수 가락 불어 끊어지듯 고개 툭 떨구셨지. 한 여름 천지봉 아래 조용히 잠드셨다.
<심사평>
개성적인 시각과 시어의 활달한 운용 돋보여
시적 개성을 만드는 요인은 몇 개나 될까? 주지의 사실이지만 먼저 ‘관찰력’이 뛰어나야 한다. 이것은 제재를 선택하는 데 관여하게 되는데, 일상의 하등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인생의 가치나 자연의 법칙, 또는 우주의 원리 등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개성적인 시인들은 ‘관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통찰력insight’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숨겨진 무엇을 찾아내려면 표면을 꿰뚫고 이면을 파헤칠 수 있는 눈, 이른바 ‘직관의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실제 시작詩作에서 다 개성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시라는 장르, 즉 ‘장르적 특성’에 맞는 글쓰기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지혜의 내용을 산문적 진술로 풀어놓고 개성적인 시라고 우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시답게 하는 요인’이 있는데, 시적 감수성부터 출발해서 하나의 개별 작품이 의미의 차원에서 던지게 되는 존재론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그 층위는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어느 한 충위에서 빛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다 해야 할 것이다.
배아라 시인은 ‘관찰→ 통찰→ 존재론적 의미’로 이어지는 선명한 궤적에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각과 시어의 활달한 운용을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앞 못 보는 그 노인」을 들 수 있는데, 그 작품에서는 “내 고향에서는 까만 세상도 하얀 소리로 따뜻하게 열리곤 했다”라는 시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 ‘햇살 소리’, ‘연기 피어오르는 소리’, ‘휘파람 소리’, ‘지팡이 소리’, ‘지느러미 흔드는 소리’, ‘웃음소리’, ‘지팡이 돌려내는 바람소리’, ‘어머니 허리 삐걱이는 소리’ 등 그야말로 온갖 소리의 향연을 열거한다. 이렇게 풍부한 어휘를 채집했다는 것은 배아라 시인이 타고난 언어감각이 뛰어나거나 오랜 준비와 훈련의 과정이 있었다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시적 자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다 바람직하고 고무鼓舞되어야 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차례 우리 시가 지나치게 작품에 언표 된 의미에 집착하는 경향을 비판 지적한 바 있는데, 시적 감수성이나 적절한 시어의 활용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제의 크기’만을 가지고 마치 대작大作이거나 최소한 ‘문제작’으로 행세하려는 행태를 겨냥했다. 배아라 시인의 경우는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 수작秀作들로 이번 신인상을 받게 되어 내심 천만다행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고슴도치」의 경우, “워워이 워워이 고슴도치 부르며 어머니 숨을 거두셨지”와 같은 인식과 표현은 우리 시에서 좀체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출발이니 배아라 시인이 이러한 시적 성취를 더 많이 이뤄내기를 충심으로 기대하며 주문해 볼 뿐이다./백인덕(글) 장종권
<당선소감>
새로운 세상에 나서는 연초록 빛깔
살랑거리는 바람이 초록의 향기를 담아 창가로 다가온다. 싱그런 아침 초록의 햇볕을 가득 받으려고 까치발 들고 아우성인 작은 꽃들이 제법 키가 컸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어우러져 그 빛을 다 받을 모양이다. 점점 더 그 빛을 받아 도드라져 빛깔조차 선명하다. 그 빛을 받는 마음이 얼마나 설렐까. 지금 내 마음도 설렌다. 첫발을 떼어놓는 돌쟁이 발걸음이지만 설레는 마음에 연초록빛 싹이 돋아난다. 당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수줍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덜컹거리기도 했다. 땅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들도 그랬을까. 새로운 세상에 나서는 기분은 연초록 새싹이나 나나 똑같을 거 같다. 내가 세상에 내놓은 나의 싹들은 내가 겪어온 일 혹은 마음에 품고 있던 오래된 생각들을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들이 흙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처럼 빛을 보게 되다니 수줍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서툴지만 엄청난 일을 해낸 거 같아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다. 이끌어주시고 다독여주신 선생님과 동인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낳아주신 우리 어머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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