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0호/미니서사/박금산/왜 안오느냐고 자꾸 전화를 거는 애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00회 작성일 19-06-25 17:35

본문

70호/미니서사/박금산/왜 안 오느냐고 자꾸 전화를 거는 애인


왜 안 오느냐고 자꾸 전화를 거는 애인


박금산



애인을 만나러 간 날이었다. 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맨 뒷자리는 계단식으로 높아서 전망을 관찰하기에 좋았다. 나는 앞사람들의 뒷모습과 그들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대개 하는 일은 비슷했다. 어떤 승객은 메신저로 연락을 취했다. 어떤 승객은 글자가 많은 글을 읽었다. 어떤 승객은 사진첩을 넘겼다. 어떤 승객은 동영상을 시청했다. 음향을 듣는 이들은 이어폰을 끼었기에 버스는 조용했다. 나는 메신저를 열었다. 애인에게 도착 예정 시각을 알렸다. 애인은 알았다는 말과 함께 꽃다발 사진을 첨부해서 답장했다. 애인은 내 생일을 기념해서 꽃을 준비했다. 나는 옆 승객이 내 화면 속의 꽃을 쳐다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나는 화면을 끄고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어느덧 어두웠다. 차창에 버스 내부가 비쳤다. 나는 어두워진 바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낮 데이트를 한 계절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애인은 주말 낮에 근무했다. 나는 주말에만 낮에 시간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만 만났다. 나는 밝고 맑은 햇살 아래에서 입맞춤을 하는 게 꿈이었다. 애인은 그런 꿈을 가진 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또 저녁이었다. 나는 차창을 거울삼아 표정을 점검했다. 차창에는 나보다 먼저 버스에 타고 있었던 것 같은 내가 들어 있었다. 바깥의 불빛에 섞인 탓인지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지금은 잊은, 과거의 어느 날에 내가 지었던 표정을 띤 몇 살 어린 나를 연상시켰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와 유리창 사이에 낯선 남자가 끼어 있어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차창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에는 옆좌석의 남자와 그 남자를 비추는 차창 속의 남자가 끼어 있었다. 남자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남자의 스마트폰 영상을 바라보았다. 불그죽죽한 색감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선혈이 낭자한 액션 영화인가 싶었다. 남자는 몸을 틀었다. 내게서 어깨를 45도 정도 돌린 채 팔을 내려서 화면을 품에 넣었다. 영상을 훔쳐보지 말라는 암묵적 경고가 느껴졌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남자는 감추려고 애를 썼으나 차창은 남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백 퍼센트 노출시켰다. 하나의 시선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는데 백 개의 시선이 정면으로 날아드는 형국이었다. 영상은 포르노였다. 거대한 성기가 피스톤 운동을 했다. 남자는 이어폰으로 음향을 들었다. 남자는 차창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다.


주변에는 여자 승객이 두 명 있었다. 그들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린다면 언제든 남자의 포르노를 보게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자 승객들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릴까 봐 걱정이 돼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버스는 노선대로 움직였다. 남자는 계속 포르노를 보았다. 클로즈업 된 영상이 내 시선을 끌고 갔다. 보지 않으려 하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이끌렸다. 나는 남자가 화면을 끄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끄지 않았다.
어느 정류장에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남자가 내리기를 기도했다. 꺼져 줘 제발! 나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내릴 정류장이 아님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다. 손에 포르노 영상을 든 채 여자승객들을 둘러보았다. 내게서는 시선을 빼앗아가는 강도짓을 하더니 여자승객들을 향해서는 시선으로 강간을 자행했다. 나는 그가 귀신처럼 무서웠다.


남자는 다시 영상을 감상했다. 나는 왜소했고 포르노를 보며 이어폰을 낀 남자는 몸집이 좋았다. 나는 웹소설 플랫폼에서 읽은 무협소설을 떠올렸다. ‘여협女俠은 남자의 목을 일합에 베었다. 남자의 머리통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협은 머리통이 땅에 닿아 먼지투성이가 되기 전에, 팔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았다. 여협은 목에서 피가 떨어지는 남자의 머리통을 들고 표표히 걸었다.’ 나는 여협이 장검을 들고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무협지의 주인공이 강호의 갈대숲에서 불쑥 날아오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만무했다.


앞좌석에서 뮤직 비디오를 보던 여자 승객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자 승객이 방해받지 않은 채 계속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옆좌석에서 남자가 일어났다. 나는 남자가 통로로 나갈 수 있도록 다리를 접어서 길을 텄다. 남자는 앞서 일어난 여자 승객처럼 이어폰을 낀 채 내리는 문을 향해 걸었다.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영상을 켠 채로 일어났다. 그는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고서 포르노를 귀로 들으면서 승객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나는 그가 음악에 의지해 고단한 삶을 위로받는 것처럼, 포르노의 음향을 지팡이 삼아 디딤돌을 디디며 삶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성행위의 신음을 들으며 한 발 한 발 지겨운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애인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런데 남자가 내 애인을 눈으로 보면서 이어폰을 끼고 걷는 것 같았다. 남자의 눈앞에는 내가 보는 세상이 있지만 남자의 귓속에는 포르노의 음향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무협지의 여협처럼 장검을 꺼내어 일합에 남자의 목을 잘라버리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면서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남자의 뒤를 밟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 나타났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보면서 걸었다. 한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남자는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걷다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남자와 나를 차례로 지나쳐갔다. 나는 내가 여자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이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에서 쌍절곤을 꺼냈다. 남자는 천천히 걸었다. 나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쌍절곤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쓰러지면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화면에서 저질 포르노가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쌍절곤으로 포르노 영상을 후두려 깠다. 그리고 남자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어 발로 밟아 뭉갰다.


나는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손과 얼굴을 씻었다. 귀를 씻었다. 쌍절곤을 씻었다. 물을 세게 틀어 신발 바닥을 씻었다. 애인에게 알렸던 도착 예정 시각에서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애인은 왜 안 오느냐고 내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박금산 소설가. 여수 출생. 《문예중앙》으로 등단.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집 『생일선물』, 『바디페인팅』,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