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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미니서사/김혜정/신사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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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미니서사/김혜정/신사와 거짓말
신사와 거짓말
김혜정
그의 인생에서 부인은 엄청난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절에 갖고 있던 물건들은 그에게 가장 소중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뒤 옷들은 좀이 슬고 그녀가 애지중지했던 보석들도 빛을 잃어갔다. 그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또한 그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난 시절의 물건들 속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이 그의 집 앞마당에 와 있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느라고 거울을 몇 번이고 보았다. 부인이 죽기 전만 해도 그 마을의 신사로 통했는데 부인이 죽은 뒤 그는 추레해졌다.
그가 화단에 나갔을 때 아이들이 잔디를 모조리 밟아버린 뒤였다. 그럼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신사임을 생각했다.
“할아버진 몇 살이에요?”
그는 나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득 떠오르는 대로 사십 세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나도 너희들처럼 어린아이였던 때가 있었지.”
아이들이 그를 외면하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는 아이들을 붙잡았다.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거짓말쟁이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방금 거짓말을 하셨잖아요.”
그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도 우리처럼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란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신사야.”
그의 목소리는 크고 떨렸다.
아이들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신사라고요?”
한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와서 놀지 않겠냐? 집안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많단다.”
“모두 낡은 고물이겠죠.”
아이들의 눈빛에는 그에 대한 경멸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은 늙은이는 아무리 친절해도 늙은이일 뿐이지, 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의 집을 나섰다.
그날 밤 꿈에 그의 부인이 나타났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지금 당신은 늙었어. 과거에 집착하면 친구가 없을 거야.
아침이 되자 그는 고물상을 불러 몇 가지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집안의 물건들을 모두 실어가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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