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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장편연재2/김현숙/흐린 강 저편2/들판의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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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장편연재2/흐린 강 저편2/들판의 처녀
들판의 처녀
김현숙
희연과 경석. 그들이 둥지를 튼 신혼 아지트는 서울 북한산 자락의 15평짜리 서민 아파트였다. 낡고 오래된 작은 아파트였으나 다행히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 친정에서도 가까운 편이었고, 무엇보다 희연이 새로 부임한 직장, S중학교에서 시내 버스로 30여분이면 와닿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그러나 주 수업 32시간의 격무와 아침 저녁 만원 버스의 시달림은 그녀를 매우 지치게 했다. 더구나 집안 청소, 세탁, 장보기, 음식 장만 등등. 출퇴근의 짬짬이 부지런히 짬을 내어 그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부족. 결혼 전 자기 손으로 라면 하나 제대로 끓여 본 적 없는 희연으로선 신혼의 모든 것이 역부족일 밖엔 없었다. 완전히 지쳐 귀가하는 퇴근 시엔 그대로 곧장 친정으로 달려가 며칠 푹 쉬었다 오고 싶은 갈망에 목이 메었다. 신혼의 의무나 개념조차 모조리 접어 내동댕이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설상가상, 임신 초기의 극심한 피로 증상까지 겹쳐 희연의 건강이 매우 취약점에 이르렀을 즈음, 때를 맞춘 듯 고향의 시모로부터 인편을 통한 중요한 전갈이 전해왔다. 하루 빨리 막내 시누이 혜옥을 서울로 데려 가 맞벌이에 힘든 큰아들 내외의 살림을 돕도록 하라는 하명이었다.
“혜옥이 가야 땀시 참말로 내가 못살겄단께. 한 필지 긴 밭고랑 김을 다 맬 때까정 있는대로 속아질 부리며 내 속을 긁어싸서 참말로 환장해죽겄다. 당췌 내 명에 못 살겠단께.”
전화통을 통해 들려오는 시모의 애원은 더없이 절박하기만 했다. 시모의 청대로 막내 시누이, 혜옥과의 동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옳은 일일까. 희연은 내심 적이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길이 모두를 위해 더 나은 길인지 마음이 심히 어지러웠다. 희연은 고심 끝에 친정어머니 강여사에게 자문을 구할 밖엔 없었다.
“옛말에 강보에 싸인 시누이도 시누이 값 톡톡히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말 절대 틀린 말이 아니대이. 함부로 그래 쉽게 결정했다간 니이 맘 고생 억수로 할끼다. 잘 생각해서 하그라. 차라리 남이 났지, 내는 반대다.”
강여사는 대뜸 그렇듯 우려의 빛을 표하며 강한 거부의 뜻을 드러내었다. 그간 경석으로인해 호남과 그쪽 사람에 대한 인식과 편견이 많이 완화되긴 했으나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지역감정이 완전히 사그러든 건 아니었음이 전해오는 반응이었다. 더구나 시누이와 올케 사이란 견과 원의 관계로 좀체 그 만남이 화해롭기 힘든 것임을 강변하는 강여사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시모의 간청과 경석의 동조, 새색시로서 거절의 어려움 등이 혼합된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희연은 결국 혜옥의 상경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연이 마악 첫 아이의 입덧을 시작하려 할 이른 봄 즈음 이윽고 막내 시누이, 혜옥이 상경했다. 매사에 한창 예민할 나이의 열아홉 살 시누이와 좁디 좁은 아파트란 공간에서 허니 문 시절을 세 명이 동거해야 함은 진정 새로운 역경의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혜옥은 여중 시절 3년 내내 학급 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명민하고 책임감 있고 학업 성적도 우수하여, 졸업 후 그녀가 고교 진학을 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을 내세운,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혜옥은 결국 진학의 뜻을 접곤 농사와 집안 일을 도와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후로 혜옥은 매일 같이 가족을, 특히 시모를 달달 들볶으며 반항을 일삼기 일쑤였다. 경석이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과 자신의 장학금 등을 모아 혜옥의 고교 입학금을 마련해 보냈으나 그것 또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혜옥의 장롱 깊은 곳에 꽁꽁 보관되었을 뿐이었고 혜옥은 이따끔 그 돈뭉치를 꺼내 어루만지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희연이 본 가장 인상적인 혜옥의 모습은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쓰고 긴 밭이랑을 홀로 매며 구슬프게 노래 부르던 열아홉 살 처녀의 싱그럽고 강건한 모습이었다. 7남매의 형제 중 혜옥은 가장 외모가 뛰어난 편이었다. 거친 농사일과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함에도, 강단있는 몸피에 깨끗한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단정한 외모였다. 대다수 여윈 몸피에 강파른 외형을 지닌 시집 형제들 중 가히 군계일학이라 할 만 했다.
보라, 들 가운데 홀로
추수하며 노래하는
저 외로운 고원의 처녀를!
걸음을 멈춰라, 아니면 조용히 지나가라
그녀 홀로 곡식 다발을 베고 묶으며
구슬픈 노래 부르니
오, 들으라! 깊은 골짜기
넘쳐흐르는 저 노래소리를.
엉뚱하게도 희연은 들판에서 일하는 혜옥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학창 시절 즐겨 읊던 영시의 한 구절이 떠올라 한참이나 그곳에 멈춰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그의 ‘외로운 추수꾼The solitary reaper’, 그 시적 공간 속 추수하는 처녀의 이미지와 너무도 흡사한 혜옥의 모습은 희연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고, 그러한 느낌은 시누이 혜옥을 실제보다 부쩍 더 가깝고 친밀한 대상으로 밀착시킴에 크게 일조했음이 사실이었다.
기실 혜옥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서울의 아파트 생활에 썩 잘 적응해갔다. 집안 일을 마치 천직으로 타고 난 듯 요리며, 청소, 세탁 등의 일을 완벽히 잘 해내어 놀라울 정도였다. 집안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동안, 이불 홑청을 깨끗이 빨아 밀가루 풀을 쒀 먹인 후 말끔히 다듬이질까지 하여 시쳐놓는 것이, 여간 야무진 솜씨가 아니라 희연은 깜짝깜짝 놀랄 밖엔 없었다. 깔끔하기로 소문난 강 여사 조차,
희연을 통해 양해를 구한 후 낮시간 잠깐 사돈댁엘 들려 다듬이돌 앞에 앉아 또각또각 딱딱, 얌전히 방망이질하여 이불 홑청을 매끈하게 다듬어가는 혜옥의 솜씨엔 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손끝 맵고 매사에 버릴 데가 없는 처녀라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할 정도였으니.
주말이면 혼잣몸이 아님에도 희연은 부른 배를 안고 남산, 고궁, 유원지 등등 서울 구경을 시킨답시고 한동안 혜옥을 데리고 돌아다녔다. 가끔씩은 경석도 함께 동행할 때가 있었고, 그럴때면 혜옥은 서울의 낯선 나들이가 자못 생경하고 수줍은 듯 꼭 큰오라비, 경석의 팔을 꼭 붙잡은 채 길을 걷곤 하여 이웃들의 오해를 살 때가 많았다. 경석을 가운데 둔 두 여자가 시누이, 올케 사이라고 애기하면, 아직 앳된 모습의 새댁인 희연이 경석의 여동생이고, 탄탄하고 의젓해보이는 혜옥을 경석의 아내로 혼동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옥은 경석을 유독 따르고 좋아했다. 언제나 말없고 점잖고 속 깊은 오라비. 고향집에 내려올 때면 늘 한아름의 선물과 용돈, 따뜻한 격려로 힘을 주는 오빠이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교 입학금까지 마련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절대적 후원자였다.
그러기에 우선은 동거와 함께 오라비네의 살림을 도와야만 하는 힘든 상황임에도 기꺼이 상경하기로 작정한 배후엔 그토록이나 경석을 믿고 따르는 혜옥의 속내가 그녀의 결정에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짐은 틀림없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엔 모든 일에 서툴기만 한 희연은 매사 일처리나 경우 바름에서 도시 버릴 데가 없는 시누이, 혜옥의 능력이 진정 경이롭기만 했다. 그에 비함 자신은 비싼 대학등록금을 들여 4년간 캠퍼스를 오가며 철없이 젊음과 세월을 낭비하고 소진했을 뿐임을 자각했다. 무진장 마시고 또 마셔 머릿속에 가득 출렁일 시커먼 커피물 외, 자신을 채우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때론 그러한 극심한 자괴심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열아홉 살 혜옥보다 단지 영어 단어 몇 개를 더 안다는 것.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희연이 굳이 농촌의 빈한한 집안의 장남, 경석을 택한 중요한 이유 또한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 허랑한 지성과 대비되는 진지하고 깊이 있는 그의 학문적 자세, 전공에 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실력. 그런 점에 혹해 무언 중 그에게 끌렸음은 부인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고 점잖고 학구적인 경석과는 달리 혜옥은 끝없는 들판, 세찬 바람이 키운 거친 야생마에 다름 아니었다. 희연 대신 야물딱지게 살림을 잘 맡아 하다가도 이따끔 한 번씩은 파업을 하듯 강력한 반란을 일으키며 집안에 일대 소요를 불러오곤 했다. 일정한 주기를 가진 바람, 들녘의 야성이 한바탕 회오리를 몰아오는 격이었다.
“하이고, 도야지 새끼처럼 애새끼덜은 뭐더러 고렇콤 줄줄이 낳았디야. 고작 오빠네집 식모 살이 시킬려고 낳은 것이여.”
때론 아파트 베란다에서 탁탁 빨래를 펼쳐 널며 혼잣말을 뱉아내는 혜옥의 자조어린 푸념은 부모를 향한 짙은 원망이 배어나, 그 말을 듣는 희연은 매번 가슴이 섬찟할 정도로 충격을 받곤 했다. 그럴 때면 죄없는 양은 대야가 찌그러질 정도로 패대기치며 자신의 방문을 소리나게 닫아걸고 혜옥은 한동안 끼니도 굶은 채 홀로 칩거에 들어가곤 하여 희연을 당혹케 했다.
그래도 때가 되면 단 한 차례도 희연, 경석, 오라비 내외를 위해 정갈한 밥상을 차려내는 일. 그것만은 결코 거르는 법이 없어 더욱 눈물겨웠다.
봄방학 때 상경한 혜옥과 동거한 지 근 3개월이 다 되어 가던 5월 어느 연휴, 혜옥은 잠깐 찬거릴 산다며 시장엘 가고 희연은 모처럼 대청소를 한답시고 아파트 창들을 활짝 열곤 먼지를 털어내었다. 쓸고 닦고,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혜옥의 방을 치우러 들어가자 열려 놓은 창 밑 작은 책상 위의 하얀 편지지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팔랑거리는 양이 눈에 띄었다. 희연은 얼른 책상 한 켠에 놓인 혜옥의 유리 꽃병을 들어 문진인양 편지지 위에 올려놓았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혜옥의 글씨체가 너무도 단정하여 자신도 모르게 희연은 편지지로 눈길이 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쓰다 만 편지. 혜옥의 바로 손윗 언니인 인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보고 싶은 인옥 언니,
언니, 탈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요.
지금쯤 우리 마을엔
드넓은 지평선 저 끝까지 이어진 푸른 보리밭이 마구 일렁이고 있겠지요.
그렇게도 미워하던 가족 모두가 징허니 그립습니다.
저는 오빠랑 새언니랑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마세요.
다만 배움이 짧고 무지한 저로서는 때론 오빠네의 많은 것이
이해하기 힘들고 서럽고 외톨이로 느껴져 마음 상하곤 함을
언니에게만 이렇게 토로합니다.
또렷한 글자로 한자 한자 눈에 와 박하는 혜옥의 글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내처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 온 후 특유의 영민함으로 단 몇 개의 일상적 어휘만 빼곤,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 혜옥의 편지글은 매우 간결하고도 유려했다. 순간 남의 글을 훔쳐봐선 안된다는 평소의 상식과 예의 따윈 미처 끼어들 틈도 없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마력 같은 것이 휘감겨오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쩜 혜옥 또한 은연 중 자신의 마음이 희연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한가닥 저의, 그런 것도 완전 배제하긴 힘들지 않을까, 하는 묘한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편지를 읽어가는 희연의 손 끝에 파르르 떨림이 일며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언니, 우린 타고난 복도 왜 이리 지지리도 없을까요. 어젠 새언니를 따라 태어나서 첨으로 신촌의 E여대를 구경갔어요. 새언니가 졸업한 대학 말이에요. 학교 앞 양장점에서 옷도 한 벌 맞춰주고 캠퍼스 구경도 시켜준다며 싹싹하고 기분파인 새언니가 나를 데려 간 거였지요. 우리가 들어간 으리삐까번쩍한 양장점은 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많은 양장점들 중 한 곳으로 새언니가 대학시절부터 옷을 맞춰 입던 단골 양장점인 듯 주인이 언닐 보며 화들짝 반색하는 모습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어요. 우리 시누인데 옷 한벌 맞춰주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새언니 표정이 웬지 좀 쫄아보였던 건 순전히 나만의 자격지심이었을까요. 그만큼 내 몰골이 완전 촌닭 같이 느껴졌음은 과민이었을까요. 순간 난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한 생각이 들어 어떻게 옷을 맞췄는지 전혀 기억조차 나질 않을 만큼 허둥거리며 간신히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어요.
E여대 캠퍼스는 너무도 넓고 아름다웠고 그곳을 거니는 여대생들은 마치 천상의 여자들인 듯 더없이 발랄하고 지성미 있고 예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어요. 마악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겨우 참아내며 미어지는 가슴을 누른 채 새언니의 안내를 따라 학교를 한바퀴 도는 시간이 왜 그리 서럽도록 길게만 느껴졌는지 새언닌 미처 알 길이 없었을 거에요. 순간 악마와도 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머릴 스쳐갔어요. 이 세상에서 대학이란 대학은 다 불타 없어져버렸음 좋겠단 생각이 폭탄처럼 가슴에서 터져나옴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언니, 생각해보면 우린 부모를 만나도 참 잘 못 만났단 생각에 그저 마냥 서러울 뿐입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 가 아이 셋 낳고 지지리도 어렵게 사는 언니 생각에 한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너무도 가엾고 불쌍하단 생각에 때론 한밤 중 홀로 깨어나 한참을 울다간 잠이 들 때도 있어요.
큰오빠는 그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를 나와 선생질 하는 반듯한 집 각시를 만났으니 젤 복이 있는 편이지요. 하지만 물건 귀한 줄 모르고 돈을 헤프게 쓰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팔자란 한편으론 참 부럽기도 하면서 울오빠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고 허벌납니다. 울오빠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번 돈인데 새언닌 사실 너무 철이 없단께요. 임신 중이라 아무리 몸이 무겁다 해도 목욕 가서 자기 몸도 자기 손으로 씻질 못해 때밀이에게 맡길 정도로 양광스러운 데가 있다니께요.
오빠네 치다꺼리만 하다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할 때면 그만 콱 죽어버리고 싶어 아파트 베란다에 멍하니 서서 창문 열고 밖을 내다보다간 서울에서 어렵게 어렵게 공부한 오빠 생각에 혀를 깨물며 죽고 싶은 마음을 참곤 합니다. 어떨 땐 식칼을 앞에 놓고 자결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간 처녀 귀신이 있는 집이라 소문 나면 원한이 서려 오빠네 아파트값 떨어질까 그 짓도 차마 결행하질 못합니다.
언니, 언니에게 이런 마음조차 털어놓질 못한다면 난 아마 미처버릴 지도 몰라요. 이 나이에 살림하는 거 외에도 뭐시 취미가 있어야 살 거 아녀요. 오빠네 부부는 많이 배우고 잘나서 나랑은 도무지 차원이 달라요. 테레비를 봐도 난 전혀 알아먹지 못하는 외국 채널만 보고 음악을 들어도 클래식인가 뭔가 하는 음반만 잔뜩 사와 정작 내가 들을 건 하나도 없다니께요. 아, 딱 하나 있긴 해요. 오빠가 새언니 생일에 사 온 하뭐시껭인가 하는 가수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오직 그거 하나 뿐여요.
오빤 결혼하고 나더니 옛날의 그 다정하던 오빠가 아니라 꼭 남 같기만 해요. 아침마다 임산부인 새언니를 위해 긴 부츠를 신겨주고 가방을 들어주는 오빠 모습은 참말로 가관이란께요. 속이 뒤틀려 차마 눈 뜨곤 못 볼 정도여요. 울오빠가 왜 그리 하찮게 변했는지 속이 터진단께요.
장문의 편지를 읽어가는 희연의 얼굴이 헬쓱하니 빛을 잃어갔다. 저만치 5층 아파트 아래층으로부터 계단을 올라오는 혜옥의 특유의 씩씩한 발짝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얼음덩이를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어지럼증 속에서 희연은 재빨리 창을 닫곤 혜옥의 방을 나와 급히 집안 청소를 마무리했다. 언니, 몸도 무거운데 뭔 청소를 다 허고 그런대여. 한아름 장을 봐 현관을 들어서던 혜옥이 놀란 얼굴로 희연의 걸레질을 만류하며 염려를 표했다. 그러나 희연의 마음엔 이미 한겨울 같이 싸한 냉기가 차오를 뿐 도저히 혜옥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희연으로선 한참이나 어린 시누이에게 깐엔 잘 한다고 한 행위의 결과가 그렇듯 강렬한 반감으로만 귀결되었을 뿐이라니. 강여사의 말대로 강보에 싸인 시누이도 시누이값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순간 희연은 혜옥에게 만정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겨우 열아홉 살 시누이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다는 생각을 한 건 그러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긴 26세의 희연 또한 성숙된 여인이 되려면 아직은 세월을 좀 더 겪어야 할 젊디 젊은 새댁일 뿐임을. 그러기에 두 여자의 갈등 양상은 자칫 악화일로로 치닫기 십상. 그러나 희연은 가까스로 경석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내렸다.
상경 후 서울 구경을 시킨답시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게 외려 화근이라니 참으로 어이 없고 괘씸하기만 했다. 시모는 혜옥을 서울로 보내며 말했다. 아가, 너는 애들을 갈치는 선상님이고 많이 배운 사람인께 저 철딱서니 읎는 거 델꼬 가 쪼깐 사람 좀 맹글어주먼 안 쓰겄냐잉. 자알 부탁헌다아. 시모는 희연의 손을 꼬옥 부여잡곤 몇 번이나 그렇게 당부했던 것이다. 애들을 갈치는 선상님. 배운 사람. 치솟는 분노와 함께 시모의
말이 줄곧 마음에 걸려 희연은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바지런하고 솜씨 좋은 혜옥이 장을 봐 와 연휴라며 희연이 좋아하는 닭찜, 잡채 등 맛깔스런 음식을 잔뜩 마련해 상을 봐 왔으나 더 이상은 혜옥을 마주하고 허심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체증을 핑계로 방에 혼자 드러 누워 혜옥과의 사이에 점점 얽혀만 가는 감정의 매듭들을 어찌 풀어가야만 할 지 희연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역지사지. 희연은 우선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혜옥의 처지와 대비시켜 생각해보았다. 한창 꿈 많은 열아홉 처녀가 오라비댁에서 살림을 전담하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언어도단. 친구도 없고 흥미로운 소일거리도 없고 삶의 터전도 아닌 낯선 도시 좁은 아파트에서 오직 일상적 가사 노동에만 전념해야 하는 나날이라니! 누군들 극심한 자괴심, 초월적 인내 없인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누리는 자와 희생하는 자. 세상을 그렇듯 이분법으로 나눈다면 희연은 비교적 늘 전자 쪽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 온 수혜자에 속하지 않을까.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거나 멈추거나 나아가거나 나아가지 못함을 구분하는 건 순전히 본인의 자질과 능력에서 기인되는 것임이 분명하고, 어쨌든 희연의 경우, 타고난 복, 예컨대 부모를 잘 만난 탓으로 많은 것을 향유하며 살아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기에 그건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환경의 덕이므로 능력이라 할 수는 없는 것.
반면 재능과 소질, 건강, 그 외 많은 타고난 강점을 소유했음에도 환경이 받쳐주지 못헤 아예 그 싹이 잘려버린 혜옥 같은 경우는 너무도 불운한 케이스다. 미치거나 헤까닥 돌아버리거나 꼬이거나 잘못되거나, 아님 굳건히 살아 남아 버티거나 혹은 온전히 도약하는 것. 그런 경우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렇듯 한정적이다.
강여사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석을 결혼 상대로 선택한 이상, 그의 가족을 배제한 오직 그만을 아끼고 사랑하여 행복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 이미 그걸 전제로 한 피치 못할 만남인 것을. 혜옥을 도와야만 한다, 힘껏! 온전히 도약할 수 있도록!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 두 개체간의 상생, 화합만이 상호 균형과 평정으로 살아남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관용을 베풀어야만 한다, 수혜자의 관용을!
그간 오직 자신의 고통만을 인식하고 살아왔기에 희연은 짐짓 그 점을 망각한 채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조만간 혜옥에게 새로운 일, 보다 즐겁고 보람 있는 임무를 맡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매일 죽고 싶어 혼자 슬퍼하고 절망했을 혜옥의 심경이 그제야 비로소 헤아려졌다. 희연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 그곳에 숨겨진 이성과 자각의 칼날이 두터운 이기의 얼음을 뚫고 심장에 예리한 균열을 일으켜 산산히 갈라져 나감을 감지했다. 희연은 혜옥의 장래를 위해 어떤 배려와 장치를 마련해야할 지에 관해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국의 광산 지역으로 출장이 잦은 경석이 예의 집을 비운 어느 초가을 저녁, 만삭의 배를 안고 학교에서 퇴근한 희연이 숨차게 아파트 단지의 높다란 언덕을 올라 집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몸으로 보충수업까지 하루 여섯 시간의 수업을 끝낸 터라 다리는 퉁퉁 붓고 목은 쉬어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진이 빠진 상태였다. 어딘가 돈 내고 모텔에라도 들어가 몇 시간이고 늘어지게 푹 자고 싶은 게 당시 희연의 최대 소망이었을 만큼 그녀는 매우 지쳐있었다. 신혼의 허니 문, 달콤함 따윈 애시당초 느껴 보질 못한 듯 신산하고 참혹한 기분이었다. 매사가 귀찮고 힘들어 결혼 생활 자체가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퇴근길, 매일 저녁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주는, 때론 환히 웃는, 때론 시무룩, 때론 냉랭, 시시각각 변하는 혜옥의 낯빛과 기분을 살펴야만 하는 일도 끔찍한 고역이었다.
설상가상, 그날따라 잔뜩 부은 얼굴의 혜옥이 희연의 방 앞에 쾅, 소리나게 밥상을 놓은 후 차가운 등을 보이며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순간 희연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기분에 밥상은 그대로 밀쳐둔 채 곧바로 혜옥의 방으로 다가가 와락 그녀의 방문을 열어 젖혔다.
“아가씨, 나랑 얘기 좀 해요. 나 도저히 이 밥상 못 받겠어요. 이리 나와 봐요. 저녁 하기 싫음 밥 하지 말아요. 뭘 사먹던가, 시켜먹던가 하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밥상을 내팽개치다니… 내가 밥 얻어 먹으러 온 거지에요?”
희연의 쉰 음성이 마구 톤을 높이며 고음으로 치달았고 놀란 혜옥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어내렸다.
“언니, 그런 게 아녀요. 절대 그게 아녀요….” 혜옥이 목 멘 음성으로 말을 잇다간 그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희연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인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본 이후 많이 반성하며 되도록이면 좋은 귀결로 맺어지길 여러 각도로 강구하고 고심하던 중이라 더욱 화가 폭발하고 만 것인지도 몰랐다. 터진 봇물. 이제 보다 더 진솔히 서로의 마음을 열고 허심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희연은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며 혜옥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아가씨, 그간 많이 외롭고 힘들었던 거 알아요. 다 이해해요. 하지만 시시각각 기분 변하고 감정의 기복 심한 아가씨 대하기 나도 정말 지치고 힘들어요. 이대론 살 수가 없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얘기해봐요. 더 이상 집안 일은 아가씨에게 맡기지 않겠어요.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나도 일말 책임이 있고 문제를 간과한 점 반성이 있어야겠죠.” 희연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말을 꺼내게 된 희연의 심경 또한 더없이 괴롭긴 했으나 뭔가 결단이 있지 않음 도저히 더는 끌어갈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대로 가다간 배 안의 아이를 위한 태교는커녕 자신의 성정마저 점차 더 황폐해져 가기 십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혜옥은 엉엉 울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힘들게 직장생활하는 언니, 오빠에게 불만 있어서 그런 건 아녀요. 걍 제 신세가 비관스럽고 제 환경이 넘 원망스럽고… 문득문득 살기가 싫어져서 그런 거여요. 때론 그만 꽉 죽고만 싶단께요.”
“그럼 아가씨 앞으로 뭘하며 살고 싶은 지 말해봐요. 오빠랑 내가 힘 닿는 한 도와줄게요. 솔직히 애기해봐요.”
혜옥의 우는 모습이 애처롭고 마음 아려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접고 보다 포근한 어조로 바뀌어가는 자신을 깨달았다. 혜옥은 피를 토하 듯 오열하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자식을 돼지새끼처럼 줄줄이 낳아 교육도 제대로 안 시키는 부모가 미워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도망치듯 서울 오빠네로 탈출을 감행하였으나 서울 또한 그녀에게 결코 피안의 세계는 아니었다. 많이 배운 언니, 오빠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거리감과 소외감이 드는 건 그렇다 쳐도 서울이란 곳은 너무도 화려한, 그녀가 이루지 못한 꿈이 가득 펼쳐진 동경의 도시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고향에 살 때보다 외려 상대적 박탈감은 훨씬 더 커져만 갔다. 그토록 자상했던 오빠도 서울에 와서 보니 남같이 멀게만 느껴졌고 새언니는 아무리 상냥한 모습을 보여도 늘 깎듯하고 예의 바른 서울 여자일 뿐 좀체 자신의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차라리 못배우고 가난해도 뭉클한 정이 느껴지는 고향의 언니들만 더 생각나게 할 뿐이라 모두가 잠든 밤이면 홀로 깨어 숨죽이며 울곤 함이 예사였다.
“언닐 따라 E대 구경한 날이 젤로 허벌나고 죽고 싶었어요. 인간은 똑같이 태어나 한 세상 사는데 왜 어떤 이는 저렇콤 화사한 여대생이고 난 이 모양 이 꼴로 한심허게 사는가 폭폭해서 환장하겄대요.”
혜옥의 고백은 너무도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또한 충분한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어 희연의 마음을 휘저어왔다. 문제의 해결은 앞으로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교사로서 희연은 불우한 환경에 처한 제자들에게 대저 무어라 가르쳤던가.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와 난관을 극복하고 타개해 나가는 것이 배움의 목적이라 강변하질 않았던가. 그것은 단지 교사로서 말하기 좋은 교육적 훈계에 불과했던 것일까. 정작 교사인 본인 자신은 단 한번도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 처해본 적이 없었다면 그건 명백한 위선일 것이다. 희연은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그러한 난제 앞에서 짙은 회의와 곤혹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무작정 단행된 혜옥의 상경은, 시모의 뜻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시누이, 올케 사이의 정서적, 심리적 측면을 고려하여 좀 더 면밀히 검토하고 계획하여 진행됐어야만 했다. 우선은 혜옥의 고통, 짐을 덜어주기 위해 가사 노동과, 이제 곧 가을이면 태어 날 아기의 돌보미, 즉 살림과 육아의 굴레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이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이제부터 학교를 다시 들어가던지, 아님 취업하여 야학으로 공부를 지속하던지 뭐든 본인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야만 해요. 친정에 부탁하여 우선 가사도우미부터 구할게요. 앞으론 집안 일에서 벗어나 맘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계획해보세요.”
희연의 단호한 결정에 눈물을 훔치는 혜옥은 다소 어안이 벙벙하고 착잡해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5월 연휴, 그날의 사건은 일단 그것으로 일단락 되었고 경석과 의논, 희연은 친정 어머니 강여사를 통해 급히 가사도우미를 구하는 청을 넣었다. 며칠 후 강여사가 혜옥 또래의 한 처녀를 데리고 희연의 집을 방문했다. 매우 덜렁거리고 좀 산만해보이는 성격이었으나 잘 웃고 서글서글한 면이 적어도 악의는 없어보이는 유형이었다. 처녀의 이름은 애자였다. 혜옥에게 가사의 모든 걸 잘 가르쳐 인수인계를 하도록 부탁했다. 혜옥에겐 가을 학기까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각종 취업 정보며 몇몇 검정고시 학원의 입학원서, 시험 요강, 문제집 등을 사다주며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곤 며칠이 지났을까. 혜옥과 애자 두 처녀는 좁은 아파트에서 사이좋게 깔깔거리며 집안 일을 함께 하고 어깨를 나란히 시장도 가고, 청소며 빨래도 유쾌하게 함께 하는 양이 보기 좋았다. 매사 어른스럽고 조신한 혜옥에 비해 왁자한 성격의 애자는 빨래를 널은 후 때론 양은 대야 위에 올라가 신나게 춤을 춰 혜옥이 혀를 찰 때도 있긴 했으나 비교적 두 처녀는 조화롭게 잘 어울려 희연은 안도했다. 그러나 이따끔 혜옥의 방을 들여다보면 라디오의 음악 소리만 들려올 뿐, 도무지 학원 교재라도 뒤적이며 공부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어 의아했다.
중간 고사 기간이라 희연이 학교에서 조기 퇴근을 하고 일찍 집에 온 날이었다. 마침 애자는 시장엘 가고 혜옥 혼자 남아 빨래를 개고 있었다. 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혜옥이 희연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진로 문제로 진지하게 한 번 얘길 나누려던 참이라 희연은 환하게 반기며 혜옥과 마주앉았다.
“언니, 승질 못된 저를 이해하고 여러모로 배려해주신 점 정말 고마워요. 근디 그동안 곰곰히 생각혀보니 아무래도 다시 공부하는 건 영 자신이 없고 힘들 거 같허요. 취직도 생각해봤는디 지꼴에 뭣 하나 재주도 없고 시골에서 겨우 중학교를 나온 처지에 워디 취직을 하겄어요. 모든 게 다 무리란 걸 알았어요. 다만 편물이나 피아노, 요리를 배우러 학원이나 댕기고 싶어요. 앞으론 언니 속 상하게 땡깡 안부리고 살림이나 착실히 하고 곧 태어날 조카나 잘 키울까 싶어요. 그간 매칼읎이 언니 속 썩여 죄송혀요. 애자는 속없고 착한 애긴 헌디 넘 낭비가 심혀요. 언니, 오빠 힘들게 번 돈 갸아헌티 다 들어가게 생겼단께요. 낼이락두 당장 내보내야 쓰겄어요. ”
오랜 숙고 끝에 내렸을 혜옥의 결심을 들으며 희연은 다시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자가 들어 온 보름 남짓한 시간은 희연에겐 더없이 평화롭고 안온한 나날이었다. 퇴근 길 천근 무게로 귀가해도 속없이 호호 웃으며 반기는 애자의 환한 얼굴은 모든 피로를 일시에 가셔주었고, 시누이 혜옥이 해주는 맛깔스런 반찬 대신 거친 솜씨의 찌개 하나만으로도 너무도 맘이 편하고 흔연하여 고된 저녁이 행복했던 것이다. 이제 혜옥 자신을 위해서도 서로 맘 편히 각자의 길을 가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적당한 격을 두고 서로의 삶에 이로움을 주는 존재. 늦게라도 그런 시누이, 올케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한데 다시 곁으로 돌아오려 하다니….
가슴을 꽉 눌러오는 중압감에 희연은 숨이 가빠왔다. 아가씨, 아가씨.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우리 삶에 기회란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에요. 오늘 이 시간이 아가씨 생에 평생 후회하는 순간이 되어선 안됩니다. 절규하듯 뇌이는 희연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언니, 언제라도 절실한 때가 오면 제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을게요. 우선은 오빠네집 수많은 책부터 읽기 시작해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공부보다 먼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요. 학창 시절 합창대회 때 늘 지휘를 맡았었거든요. 음악 선생님이 제 꿈이었어요. 더불어 취미인 편물, 요리도 배우며 뭔가 좀 재미나게 살고 싶어요. 저는 밖으로 나도는 사회활동보단 조용한 개인생활에서 더 행복을 느끼는 유형인가봐요. 부디 이해해주시길요. 혜옥의 고백은 더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진지하여 희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강여사의 주선으로 다음 날 애자는 못내 섭섭한 얼굴로 작은 보통이를 들고 어디론가 다른 집을 향해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 혜옥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점차 더 불러만 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희연은 근원을 알 길 없는 아득한 불안과 절망감에 한숨지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잠재우듯 혜옥은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홀로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무도 말해줄 이 없는가
무엇을 그녀가 노래하는지
어쩌면 그 구슬픈 노랜
먼 옛날의 불행했던 일,
오래 전 전쟁을 읊은 것이리;
아니면 어떤 보다 비근한 노래,
요즈음 흔히 있는 일들일까
과거에도 있었고 또 다시 있을지도 모를
어떤 피치못할 슬픔, 상실 혹은 고통일까.
고원에서 외로이 홀로 추수하던 한 처녀의 슬픔과 고독이 담긴 애절한 노랫소리가 희연의 가슴을 절절히 파고 들었다. 어디선가 익히 들은 듯한 익숙한 가락, 그러나 또한 생전 들어보지 못한 듯 한없이 애조 띤 음률. 그녀의 노래는 이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들판의 외로운 처녀. 혜옥과 함께 할 앞으로 나날들, 이윽고 펼쳐질 온갖 미묘한 갈등과 대립, 화해의 나날이 막이 오르듯 서서히 다가옴을 느끼며 희연은 공포에 가까운 전율에 몸을 떨었다.<제2회 끝>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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