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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승희/양을 따라가기로 했어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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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승희/양을 따라가기로 했어 외1편
양을 따라가기로 했어 외 1편
이승희
멀어질수록 분명해졌으므로
희미해질수록 세계는 빛났으므로
그 사이에서
나는 오래 걸어왔으므로
어느 쪽으로 걸어도 어느 쪽으로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어지는
그런 사이에서
비로소 보였으므로
심야버스를 타고
심야버스라고 생각한 것을 타고
어떤 밤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머무르는 것들이 없는 세계는 정말 아름다웠다
버스에 불이 꺼지고
공평하게 어두워진 낯선 얼굴들 위로
그만큼 낯선 길들이 불빛처럼 지나갔으므로
그렇게 안과 밖도 없이 어둠에 실려가는 일처럼
국경은 멀었고
먼 것은 다 국경일 거라고 말하던
오늘이 있음으로
이제 여기는 아름답지 않겠지
내가 도착했으므로
그러니까 내가 가는 곳은 오직 한 곳이라고
한 마리 두 마리 양을 세며
오직 그 한 곳을 향하여 두 말 않고
이 사이로 가는 거라고
그로부터
딱 세 걸음을 더 가면
이젠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되는 곳으로
밤의 열기구
밤의 구름들은 몸을 숨기고 늪처럼 깊어져서 서성거렸다 뭐가 그리워서 그랬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그런 구름들의 얼굴에 얼굴을 대보았다 유리가 따뜻해졌다 그리고 원래 우린 서로에게 속해있던 것처럼 여름을 그리워한다 벌레처럼 붙어서 이만큼 쓸모없어졌으니 조금만 더 쓸모없어지면 나는 아름다워질까 싶어서 잠을 자자고 말한다 나는 잠들고 나는 창문에 붙어서 벌레처럼 어른거리고 밤의 열기구는 끝없이 우리를 데려가고 어딘가에 도착하면 나는 냉대 받을 것이고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기대해온 이야기
그래도 나는 정해진 모든 것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한낮에도 나는 잠에 취해서 창문 속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입술이 없는 사람들과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물 위에 누워서 반쯤 잠을 잘 것이다 물 아래의 불안을 덮고 맨살에 찰랑거리는 없는 것들을 보며 심장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내가 잠들면 세계도 잠들 거라는 걱정을 하면서 한낮의 이 사소한 사물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을 것이다 들리지 않을 것이다
도착할 때는 밤이었으면 좋겠어 낮이 되면 낮이 내게 와서 밤이 되면 밤이 내게 와서 오로지 내가 내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해줄 때 끝내자 그만두자 이런 말 말고 여긴 비가 와, 빗방울이 둥글어지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그런 것도 말고 밤의 상자를 끝내 열지 않고 잠드는 법에 대하여 그리하여 모든 밤이 밤에 갇혀 잠드는 방법에 대하여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사라지기 위하여
*이승희 1997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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