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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조말선/비둘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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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조말선/비둘기 외 1편
비둘기 외 1편
조말선
무심코 가방을 던졌는데 비둘기가 되어서 돌아온다 무심코 손바닥을 던졌는데 비둘기가 되어서 돌아온다 얼마 못가서 돌아온다 날개가 있는 줄 몰랐다는 듯이 돌아온다 날개가 맞는지 접어보려고 돌아온다 갑자기 날았기 때문에 돌아온다 바닥에 떨어진 비둘기들을 아무도 안 주워가서 돌아온다 방금 조립한 상자처럼 떠다니다가 돌아온다 방금 해체한 상자처럼 날개를 접고 돌아온다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요, 옛날 퀴즈를 내면서 돌아온다 이제 상자 안에는 사과가 들었거나 모자가 들었거나 구두가 들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절대 상자 속에 비둘기를 넣을 생각이 없다 상자 속에 비둘기를 넣고 나면 숨구멍을 뚫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하기가 싫다 벌써 리듬이 맞지 않으니까 비둘기가 꽃봉오리처럼 가지 끝에 앉아 있어도 나는 폭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둘기는 옛날부터 비둘기 나는 비둘기에서 생각이 멈추어 있다 나는 비둘기에 중독되어서 비둘기날리기 놀이를 하고 있다 무심코 책을 던졌는데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날개가 있는 줄 몰랐다는 듯이
단어들
맨발로 걷지 않으려는 결벽증에게 슬리퍼를 준다 티슈 없이 울고 있는 눈물에게 소매를 준다 매혹이라는 처녀에게는 긴 머리카락을 준다 혐오와 등을 맞댈 수 있다고 귀띔해 주면 더욱 매혹적인 표정을 짓는다 증오라는 물감에게는 불타는 눈동자를 주거나 흩뿌릴 수 있는 면상을 갖다대어줄 수 있다 외로운 소나무는 소나무와 소나무와 소나무로 숲을 이루어서 점점 숲으로 들어가 깊숙한 고독이 되었다 소나무숲은 소나무와 소나무와 소나무로 기호를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깊은 숲속에 이르러서야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어떤 짐승의 숨소리라고 믿어버려서 극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숨이 가쁘게 가고 있는 숲길에게 그런 숲을 준다 누군가의 긴 꼬리를 끌고 가는 숲은 덤불의 비밀을 간직한 채 빈터에서 서성이는 산책자의 웅얼거림을 감싸 안는다 아직 돌아가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산책자가 어둑어둑한 숲속에서 귀를 기울일 때 어떤 단어들은 스치는 옷깃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떫은 개복숭아처럼 바짝 붙어있다 개복숭아…… 개털…… 털끝을 스치는 실바람이 간지러운 촉각을 불러일으킬 때는 그리움 때문에 가슴이 저려온다 홀로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 한다의 어깨에 기댄다 홀로 꿈꿀 수 없는 밤이 눈꺼풀을 덧문처럼 닫는다 꿈속인 듯 단어들이 연쇄적으로 어깨를 기댄다 그는 모처럼 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줄담배를 시작하고 있다 혼자서 해독할 수 없는 단어들을 위해 그가 중얼 거린다 이건 처음 보는 벌레군! 단어와 단어들이 수많은 발이 달린 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조말선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둥근 발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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