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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임미리/붓을 든다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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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임미리/붓을 든다 외1편
붓을 든다 외1편
임미리
지천명이 넘어서야 붓을 든다.
벼루에 먹을 갈아 먹물을 적신다.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
초성과 중성을 되풀이하여 쓴다.
쓰고 또 써도, 수없이 써도
한 획 바르게 긋지 못하고 휘어진다.
마음속에 욕심이 들어앉아
붓끝에 힘을 주어도 자꾸만 비뚤어진다.
묵향에 취해 겉멋만 부리다
비뚤어지는 획은 글이 되지 못하고
누각의 댓잎처럼 춤을 춘다.
먹물을 적신 붓은 꽃봉오리 같다.
한 획 그어 한 송이 꽃 피우면
은은한 꽃향기 진동할 것 같아
소소한 욕심이 꽃처럼 피어난다.
훈민정음 바르게 새겨
한 송이 꽃 피우는 그날이 올까.
그 소리 깊이 새기는 날
마음 자락 붙잡을 수 있을까.
속세에서 흔들리는 한 생
붓끝에서 춤출 수 있을까.
한 생각, 오래도록 묵향에 취한다.
항아리
너릿재를 지나면 옹기 전시장
저 많은 항아리들이 나를 부른다.
들어오렴, 어서 빨리 들어오렴.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내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면
너는 이제 뚜껑을 닫으렴.
전생이 기억나는 걸까.
저 속이 궁금해지고 몸이 오글거린다.
너는 전생에 저 뚜껑을 닫았을 것이고
현생에도 뚜껑을 닫으려 한다.
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곳에 들어앉아 천 년쯤 수행을 하고
너는 천 년쯤 뚜껑을 열 준비를 한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난 그 생生
소요逍遙하며 유유자적 살아낼 수 있을까.
*임미리 2008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물고기자리』, 『엄마의 재봉틀』, 『천배의 바람을 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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