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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김재근/숨은 그림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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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김재근/숨은 그림 외1편
숨은 그림 외 1편
김재근
자른다
오리고 자르고 붙인다
반짝이는 햇빛
햇빛은
아이만 자를 수 있지
아이만 붙일 수 있지
햇빛을 자를수록
가위질은 커지는데
그늘은 늘어나는데
작아지는 건 아이일까
아이가 물고 있는 고요일까
잘린 햇빛이
허공에 그늘을 모은다
부피도 없이
무게도 없이
창문에 머무는 흰 고요
아이는 점점 멀어진다
햇빛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커튼은 왜 푸른색인지
잘린 아이는 어디로 숨는 건지
햇빛이 멍들 때까지
햇빛을 자르는 아이
혼자라서
주머니에서 혼자 우는 벌레 같아서
오리고 자를수록
울음은 늘어나는데
비명은 늘어나는데
누구도 도울 수 없다
햇빛을 자르는 아이
햇빛을 손목에 올려놓는다
자를 게 더 없다는 듯
붙일 게 더 없다는 듯
미동도 없이
표정도 없이
고요 속으로
잘린 손목들이 걸어간다
누구도 찾을 수 없다
반半
출발은 아무도 모를 거야
출발을 불러줄래 너의 입술로
출발하는 입모양만으로 난 고요해질 수 있는데
너는 고요해 입이 없군 조금만 칼로 그어줄까
유리를 갈아 꽃을 만든다
불이 녹으면 꽃들이 깨어난다
얘야, 그렇다고 다 믿지는 말아라
오는 사람은 오지 않는 거란다
영원히 잠든 사람만이 오고 있는 거란다
천천히 눈을 비우며 눈 속에 든 꿈을 들고 오고 있단다
그러니 오늘은 처음으로 살아야겠네
반을 듣기 위해 반을 흘리는 귀처럼
내일은 두 개의 대답을 들어야겠어
오전과 오후의 같은 목소리로
하나의 얼굴에 두 개의 혀를 감춘 입술로
같은 출발을 위해
화분을 옮기고 물을 뿌린다
건기를 지나 우기를 건너 매일 우는 꿈만 꾸도록
눈동자에 바람이 자라는 건 눈먼 새가 되고 있다는 거야
머지않아 너의 눈동자에 울음이 만져질 거야
도착한 모든 곳이 창가라면 깃털처럼 가벼워도 되는 걸까
이마에 찍힌 발자국을 당신의 친절이라 생각할게
우리가 혈맹이라면 함께 출발이라면
반은 여기에 반은 무덤으로
*김재근 2010년 《창비》로 등단. 시집 『무중력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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