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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병철/블루홀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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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신작시/이병철/블루홀 외1편
블루홀 외1편
이병철
푸른 태양의 눈을 헤엄친다 발끝에서 한 올씩 풀려나가는 음악, 우리는 허우적거리며 겨우 숨 쉬는 입술을 가졌지
은빛 정어리 떼와 함께 몰려왔다가 유리처럼 부서지는 너라는 파립, 흩어지는 네 몸 모든 조각들이 눈부셔서 나는 피 흘리고 피 냄새가 저 깊고 검은 물을 깨우기 전 두 다리를 퇴화시켜 지느러미를 얻었다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데 우리는 헤엄친다 물에 잠겨 부레가 되어가는 심장에 산소를 채우느라 빵과 키스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삶을 부르는 호흡법, 다른 세상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버려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그해 여름도 물속에서 보냈지 수압을 견디느라 귀 막고 눈 감은 채, 산소통을 메고 내려오는 전도자들을 피해 바다 속을 영원한 낮잠으로 바꾸려고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물과 너는 나의 전부다
물은 세상 밖으로 흘러가는 걸까? 바다의 끝이 어딘지 너는 알고 있고 나는 그저 너를 쫓아가는 게 좋아…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물속에서 종아리에 내 목숨을 매달고 헤엄치던 너는 정말 예뻤는데
너를 따라 물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너는 거기 없고, 너를 찾던 나는 끝없이 푸른 꿈의 코르크마개를 그만 열고 말았지 유령처럼 낯선 울음이 들려오던 그 구멍이 실은 세상을 빨아 삼키는 단 하나의 입이었을 줄이야
휘파람 소리로 소용돌이치며 소멸하는 세계, 우리가 드나들던 녹색 철문과 시집이 꽂혀 있던 우편함과 빨랫줄에 매달린 수건과 오후 여섯시의 라디오 소리가 비명 같은 음악으로 빨려 들어가고
물살에 감겨 물살이 되어 얼음의 시간을 향해 떠내려가는 우리
아니, 소용돌이 속에는 나 혼자 있고
이 세상과 내가 함께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네 푸른 눈이 저기에
옥탑, 여름
화단에 뿌린 물이 마르고
장미덩굴이 옷걸이를 타고 오르고
라디오에서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고
새들은 옥상을 맴돌다 내 꿈과 함께 날아가고
아까시 숲이 지붕 위로 흘러내리고
에어컨보다 창문을 여는 오후가 많고
눅눅해진 책들이 휘어지고
사랑은 팔 저린 방바닥에 눌어붙고
이대로 같이 살거나 같이 죽거나
저승 같은 낮잠에서 깨어나도
네가 내 곁에 있는 세상이었다
*이병철 2014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2014년 《작가세계》 평론 등단. 시집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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