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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책크리틱/차성환/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을 가로지르기-장종권 시집 『전설은 주문이다』와 백인덕 시집 『짐작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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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책크리틱/차성환/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을 가로지르기-장종권 시집 『전설은 주문이다』와 백인덕 시집 『짐작의 우주』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을 가로지르기
-장종권 시집 『전설은 주문이다』와 백인덕 시집 『짐작의 우주』
차성환
1.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꽃의 미학.
장종권 시인의 시집 『전설은 주문이다』에는 유독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시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어머니’의 죽음은 한 개인의 개별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에게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같은 존재이다. 다음 시는 우리의 뿌리이자 근원인 ‘어머니’가 소멸해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고향 들판 외딴 오두막집에 불이 붙었다./근 백 년을 외롭게 서있던 집이었다./한때는 사철 거칠게 푸르기도 했고/한때는 장독대 옆 꽃밭이 붉기도 했고/한때는 지붕의 박덩어리 달처럼 빛나기도 했다./그 집에 살던 사람들 불길을 지켜보고 있다.//지붕은 지푸라기가 다 썩어 문드러졌다./온갖 새들과 벌레들이 둥지를 틀기도 했다./흙벽은 바람에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고/신문지로 붙이 방안 벽지도 너덜너덜해졌다./쥐구멍을 막아둔 사금파리들이 드러났다./몇 토막 기둥도 벌레들이 점령하여 바스라졌다./더 바스라질 수 없는 뼈들이 거룩하다.//피 다 빨아먹고 살점 다 발라먹은 후에/사람들 모두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홀로 버려져 버티고 버티다가/야무진 향기 구들장 속으로 빨려들어간 지 오래.//더 이상은 그 안에서 살 수가 없어./이젠 태워야 해. 어쩔 수가 없어./푸른 들판은 아직도 거기에 있고,/타고 남은 재도 아직 거기에 있으나,/불길 바라볼 때에는 약간 눈시울을 적시다가/발길 돌리는 마음들이 가볍다 가벼워.
―「어머니의 집·2」 전문
이 시는 ‘어머니의 집’ 연작 시편 중에 하나로, 죽은 ‘어머니’의 화장火葬을 고향에 있는 ‘오두막집’이 불타고 있는 장면에 비유하고 있는 수작이다. “고향 들판 외딴 오두막집”은 곧 ‘어머니’의 허물어져가는 육체이면서 ‘고향’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화장장에서 소멸되는 ‘어머니’의 육신과 고향에서 불타오르는 ‘오두막집’의 이미지가 서로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근원적 고향/기원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시신이 타오르는 화장터의 풍경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묘사를 통해, 보통 가족의 죽음을 다루는 시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개인적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머니’/‘고향’의 품에서 자란 (유)가족으로 지금은 “모두 새집으로 이사를” 간 상태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자신을 키우고 길러냈던 “오두막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본다. 그 불길 속에서 “오두막집”이 생기 있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한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워둔 고향집은 ‘어머니’의 육신이 쇠약해지듯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흙벽은 바람에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 “더 바스라질 수 없는 뼈들”만 “거룩하”게 남아 있다. 자식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을 다 취하고 떠난 후에 “홀로 버려져 버티고 버티”던 ‘어머니/고향집’이 스러지는 묘사는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어머니의 집·2」에 나타난 ‘고향집’에 대한 애틋한 시선은 주로 시집의 1부에 배치되어 있는, 사라져가는 향토적 세계의 해학적이고 순박한 이야기를 다룬 시편들과 괘를 같이 한다. 반면에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화장터의 “불길”을 “바라볼 때에는 약간 눈시울을 적시다가/발길 돌리는 마음들이 가볍다 가벼워”라고 묘사하고 있는 결말 부분은 다소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호토전’ 연작의 부분 시편에서 나타난, ‘호랑이/착취자’에 대해 굴종적인 ‘토끼/민중’에 대한 풍자와 「문맹 씨」에서 시골 사람인 ‘문맹 씨’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문명화된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과 유사한 기조를 보인다. 그리고 장종권 시인은 이러한 시집의 지형도 안에서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꽃의 이미지를 새겨 넣고 있다.
어머니 꽃 따러 가신다/오는 봄도 더디다 하며 성큼성큼 떠나신다//아흔아홉 강을 건너고/아흔아홉 산을 넘으신다//가시다가 저어하면 고닥 돌아오시라/말씀도 듣는지 마는지/오는 봄 손 내밀며 다급하게 떠나신다//장독대 주변 가득 가꾸신 꽃 다 버리고/새 봄 새 날 꿈꾸듯 춤추며 꽃 따러 가신다
―「봄, 꽃」 전문
이 시의 마지막 연에 “장독대 주변 가득 가꾸신 꽃”이란 시구는 앞서 읽은 시 「어머니의 집·2」에서 “고향 들판 외딴 오두막집”, “장독대 옆 꽃밭이 붉기도 했”던 “한때”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꽃을 무척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오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지상에서 피는 꽃을 “다 버리고” “새 봄 새 날 꿈꾸듯 춤추며 꽃 따러 가”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아흔아홉 강”과 “아흔아홉 산”을 “성큼성큼” “다급하게 떠나신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거움이 있을 것도 같은데 ‘어머니’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꽃’을 따러 가는 것처럼 한순간에 가볍게 죽음을 뛰어넘는다. ‘어머니’가 가신 곳은 이곳의 삶과는 다른, “그 많은 꽃들이 죽어도 죽지 않고 별이 되는”(「꽃의 영혼」) “새 봄 새 날”의 세계이다.
꺾으라 피는 꽃도 꺾으면 짐짓 꺾지 말라 한다. 꺾어야 사는 생명이 다 그렇다. 꺾지 않으면 꽃도 꽃이 아니다. 꺾는 손이 검든 희든 무슨 상관이랴. 꺾어야 비로소 꽃이 되는 꽃의 꽃 됨은 아파야 생명을 얻는다.//꺾으라 피지 않는 꽃은 살아있는 꽃이 아니다. 꺾어서 안 되는 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꽃이 이 땅에 핀다면 바람은 왜 불고, 벌나비는 왜 노닐고, 그대의 창가에 꽃다발은 왜 놓여있을까.//꽃이 꽃다운 것은 꽃이어서이다. 밤이나 낮이나 가리지 앓고 꺾여서이다. 꺾일수록 꽃다워지는 피의 향연이어서이다. 한 방울 피로도 우주를 여는 신비로운 몸의 신호여서이다.
―「꽃다운」 전문
죽음은 모든 것이 종결되는 암흑의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 무한하게 열려있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어머니’ 또한 한 송이의 ‘꽃’으로, 그 꽃이 꺾여 떨어지는 순간에 흘리는 “한 방울 피”는 새로운 “우주를 여는 신비로운 몸의 신호”(「꽃다운」)가 된다. “꺾어야 사는 생명이 다 그렇”듯이 죽음 없이는 어떤 삶도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꺾으라 피지 않는 꽃은 살아있는 꽃이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죽음은 삶을 피어있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꽃 따러” 가는 것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죽음은 지상에 있는 인간의 삶을 완성시키고 또 그와 동시에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우주의 신비인 것이다. 이렇게 가뿐하게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꽃’의 미학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전설은 주문이다』는 진정한 사람다움을 꿈꾼다. 고향/어머니라는 아름다운 ‘전설’을 추문으로 만드는 속악한 현실을 넘어, 기어코 피어나는 ‘꽃’과 닮아 있다. 시인은 ‘전설’ 속에서 “전설로 이어지”는, 좀처럼 잘 “들리지 않는 주문들”(「전설은 주문이다」)에 귀 기울인다. 그는 문명과 세속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전설’ 속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할 인간의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전설’은 우리의 삶과 밀착되어 있던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전설은 주문이다』는 시인의 입을 통해, 숨결을 통해 그 ‘전설’ 속에 보물처럼 감춰진,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가치와 비밀을 우리에게 전수해주고 있다. ‘전설’은 문명과 세속에 취한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우고 삶을 바로 보게 한다. ‘전설’은 오래전에 시효가 마감된 낡은 유물이나 이미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힘이다. 장종권 시인은 ‘주문’을 외우듯이 이 아름다운 ‘전설’을 되살려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한 송이의 꽃-‘전설’의 귀환을 환영한다.
2.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시 쓰기
백인덕 시인의 시집 『짐작의 우주』에는 비루한 현실과 초월적인 이상 사이의 간극에서 사유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모습이 중심에 담겨있다. 그의 시 쓰기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망과 그것의 좌절에 기인하며 이를 중심으로 그만의 독특한 사변적인 사유의 고투를 보여준다. 시 쓰기 자체에 대한 강한 자의식은 바로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의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푸에리토리코에서 낮술을 마시고/헌 빨래가 걸려있는/해변이 보이는 이층 창가에 앉아/쓴 담배를 피워 물고/난, 혼자 중얼거리네./“나는 지옥을 안다. 내가 거기 있으므로”/참, 이건 랭보의 말이었던가?/맥주에 섞어 마신 럼이 목젖에 치밀어 오른다./그는 썩어가는 무릎을 송곳으로 찌르며/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썼다./난, 랭보의 이름을 되 뇌이며/이미 썩어버린 심장을 카리브 해풍海風에 말리며/가장 쓴 담배를 피우는 사이, 혼자 중얼거린다./약간의 비음鼻音을 섞어/“두터운 화장을 한 지친 영혼”,/축제가 끝난 골목마다 사내 몇이 버려져 있고/깡마른 고양이들이 사내의 목덜미를 핥는 사이,/참, 이건 파베세의 이미지였던가?/낮술의 해안을 지나 헌 빨래가 가리키는 숲으로,/그러니까 럼이 맥주에 섞이는 속도로 휘어진다./기억의 회로들을 마구 연결하고, 끊고, 용접하고, 휘어버리고,/서늘한 영혼의 밑바닥에 내던진다./그러면 나는 럼에 맥주를 붇듯, 맥주에 럼을 붇듯/산본 중심상가에서 사랑에 빠지고/“이 옷자락의 피는 나를 증거하리라”/다시, 제 머리통만한 쓴 담배를 물고 안산의 거리를 헤매리라./참, 이건 예세닌의 투정이었던가?/안산의 거리는 저녁이 아름다워, 아름다운 저녁의 안개는/재빠르고, 시인이 되지 못한 택시기사는 제 목숨을/총알 같은 속도에 건다./푸에리토리코에서 낮술을 마시고, 그 어떤 새도/직선으로 추락하지 않는 산본에서 사랑을 하고,/쓴 담배 한 개비 물고 안산의 안개 속에 휩싸인다./안개는 순간 살 틈을 헤집고, 몸 안의 피를/서쪽 하늘에 뿜어버린다./그러면, 내 체액엔 푸른 멍처럼 떠도는 낮술만 남아,/맥주처럼 차고 헐겁게,/럼처럼 뜨겁고 간단하게,/사랑할 수 있다는 것일까,/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일까?
―「낮술, 푸에리토리코에서 쓰는 비가悲歌」 전문
「낮술, 푸에리토리코에서 쓰는 비가悲歌」는 ‘푸이레토리코’와 ‘산본’/‘안산’이라는 두 축의 언어들을 서로 교직交織시키면서 “기억의 회로들을 마구 연결하고, 끊고, 용접하고, 휘어버리고,/서늘한 영혼의 밑바닥에 내던”지는 듯한 사변적 진술의 현기증을 보여준다. 이 시에는 조금은 낯선 지명인 ‘푸에리토리코Puerto Rico’가 나온다. ‘푸에리토리코’는 중미의 카리브 해상에 위치한 섬으로 ‘부유한 항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등장하는 지명은, 아마도 시인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공간으로 보이는, 우리나라 서울 남쪽의 경기도에 위치한 ‘산본’山本과 ‘안산’安山이다. ‘푸에리토리코’와 ‘산본’/‘안산’ 사이는 그것이 가진 물리적 거리도 거리이겠지만 지명이 가지고 있는 뜻을 두고 봐도 그렇듯이 ‘항구와 산’, ‘바닷가와 산’이라는 지형학 상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 시는 ‘푸이레토리코’와 ‘산본’/‘안산’이라는 두 축 사이, 즉 이상과 현실을 대변하는 상징적 기표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인만의 독특한 사변과 시적 긴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푸에리토리코’가 시인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 세계라면 ‘산본/안산’은 시인이 처한 비루한 현실 세계이다. ‘나’는 “헌 빨래가 걸려있는/해변”과 “카리브 해풍海風”이 있는 이국적인 “푸에리토리코”에서 “낮술”을 마시고 “쓴 담배”를 피운다. “낮술”이 ‘나’를 “푸에리토리코”에 데려간 듯이 보인다. “푸에리토리코”에서 “낮술”을 마신 ‘나’는 곧 “산본 중심상가에서 사랑에 빠지고” “아름다운 저녁의 안개”가 있는 “안산의 안개 속에 휩싸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 초월적인 이상을 꿈꾸지만 그것은 “낮술”을 통해 순간적인 환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현실과 이상, “썩은 감자와 스피노자”, “헤겔과 홍삼캔디” 사이에서 아무것도 “선택”(「후Who-휴休」)하지 못하는 자이다. ‘나’는 “낮술”의 취기 속에서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 중얼거림에는 “썩어가는 무릎을 송곳으로 찌르며/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썼”던 “랭보”의 말과 “파베세의 이미지”, “예세닌의 투정”이 “럼이 맥주에 섞이는 속도로 휘어”져 있다. ‘나’는 “랭보의 이름을 되 뇌이며”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이상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운명을 떠올린다. 그 시인의 운명에 ‘나’를 겹쳐보면서 “이미 썩어버린 심장을 카리브 해풍海風에 말리며/가장 쓴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랭보”와 “파베세”와 “예세닌”은 ‘나’가 도달하고 싶은 ‘시인’의 원형으로 모두들 ‘시인’의 운명과도 같은 인장印章을 가지고 있다. “랭보”에게 “지옥”이, “파베세”에게 “두터운 화장을 한 지친 영혼”이, “예세닌”에게 “피”가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시인의 슬픈 숙명을 감지하듯이 ‘나’는 “내 체액엔 푸른 멍처럼 떠도는 낮술만 남아”있다고 말한다. “푸른 멍”은 세계와의 불화의 흔적이자 시인의 증표이다. ‘나’는 이 시인의 증표를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사랑할” 것인지, “살아 갈” 것인지를 고민한다.
너의 미덕은 나를 절름대게 하는 것./몇 시간의 지친 술자리와 온갖/개수작을 동원한 교설巧說 없이,/그저, 너는 평범한 내 걸음걸이를/계속 절름대게 한다는 것./그로 인해 직립자세를 불편하게 하고/시각을 삐딱하게 하고, 아무리/입을 오므려도 발음이 새게 한다는 것./반나절을 서 있지 못하게 한다는 것./그러므로 티눈이여,/네가 내 머리다./발바닥에 뇌를 달고, 땅을 딛고 산다./지표면에 속한 영혼은 추락을 모른다./고귀한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는/내 속됨은 모두 너의 미덕./배고픈 저녁이면,/왼발의 티눈 두 개 어루만지며,/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으며,/잘했다, 짓밟히는 것들만 목도目睹 했으니/기특하게, 무식하게/벼랑 끝에 좀 더 다가섰구나./흙 묻은 모자를 벗고,/길게 몸을 뻗는다.
―「티눈과 나」 전문
“발바닥”에 난 “왼발의 티눈 두 개” 때문에 ‘나’는 지금 괴로운 상태다. “티눈”은 ‘나’를 “계속 절름대게” 하고 “직립자세를 불편하게 하”며 또, “시각을 삐딱하게 하고” “발음이 새게 한다”. “티눈”으로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겪던 ‘나’는 어느 순간 “티눈”이 곧 “내 머리”라는, 약간은 우습기도 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티눈”에 의해 ‘나’의 몸이 조종되고 의지대로 다룰 수 없기에 ‘나’는 “티눈”이 있는 “발바닥”에 “뇌를 달고, 땅을 딛고 산다”는 것이다. “고귀한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는/내 속됨은 모두” “티눈”의 “미덕”이라며 풍자적인 태도를 보인다. “티눈”의 효과는 ‘나’로 하여금 육체를 가진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한다. 아무리 “고귀한 이상”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은 바닥을 바라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티눈”은 “고귀한 이상”, 곧 초월을 꿈꾸는 ‘나’의 존재가 어디까지나 “지표면에 속한 영혼”의 한계에 처해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나’는 그런 “티눈”이 “짓밟히는 것들만 목도目睹 했으니” “기특하”다며 “어루만지”고 애잔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시인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고민하고 사유하는 ‘나’의 심리적 상태를 “벼랑 끝에 좀 더 다가섰”다고 표현하고 있다.
늦은 점심을 먹는다./반주 없이,/성긴 은행나무 길 건너/처마가 있는 국밥집 방에 올라 앉아/담배 대신 젓가락 물고 국물을 기다리는/잠시,//작은 창 안에선/보드랍고 뭉클한 흰 반죽 덩이가/손 뼘만 한 틀을 지나 치렁치렁한 머리칼처럼 쏟아지고/언제 기름을 쳤는지 번지르르한 윤기, 미끄러지는/이유를 알 수 없는 아우성, 조금 더/변방으로 몰려가는 오후./큰 창 밖에 줄지어 지나가는 노란 병아리들/뽀얀 낮과 아장아장 걸음까지 환히 보이는데, 뭐라/웃는지, 다투는지, 사랑하는지 바짝 귀를 열어도/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반주도 없는 늦은 점심./뜨거운 국물 한 수저 뜨는데/입천장이 놀라 번쩍 눈이 뜨인 것 같은데/지난 계절의 은행잎이 만만萬萬하게 떨어지는데//별의 내부로 항해하려는 자는/결코, 자기 질량을 가져서는 안 된다,/최소한 제 슬픔의 원소를 의식해서도 안 된다./별이 되려는 항해자를 위한 안내서 제 1장.//바닥에 남은 머리고기 한 점,/끝내 집어 들지 못하고/기어이 주인아주머니를 부르고 만다./점점 해가 길어지는 오늘,/또 늘어지는 늦은 점심.
―「해연垓埏」 전문
이 시의 제목인 “해연垓埏”은 “땅의 끝 가장자리” 곧 ‘벼랑’을 뜻한다. 시의 본문에는 ‘벼랑’이 등장하지 않지만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술을 시킬지, 안 시킬지 갈등하는 ‘나’의 육체적 갈증과 천상에 위치한 “별의 내부로 항해하려는 자”를 꿈꾸는 ‘나’의 정신적 열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이러한 긴장상태가 곧 ‘벼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란 병아리들”의 “뽀얀 낮과 아장아장 걸음까지 환히 보이는” 지상의 현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결국 술과 함께 “또 늘어지는 늦은 점심”을 먹는다. ‘나’는 초월적인 이상을 쫒아 “별이 되려는 항해자”이지만, 비루하고 누추한 현실의 “보드랍고 뭉클한 흰 반죽 덩이”의 따듯한 실체감을 그리워하는 자이다. “그러나/혁명은 멀고” 현실에 대한 “사랑은 이토록 아득하”(「오월 서정抒情」)다.
백인덕 시인은 스스로를 “아나키컬니힐리스트”(「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라고 지칭한다. 결국 ‘시인’이란 현실과 이상 사이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무정부-무국적-허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짐작의 우주』에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정처 없이 방황하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시를 쓰는 한 시인의 초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인에게 있어 그것은 이 세계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 시집이 담고 있는 요설에 가까운 사변적인 시세계는 초월을 꿈꾸지만 그 불가능한 꿈에 도달할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방황에 기인한다. 백인덕 시인은 누구보다도 칼끝에 선 것과 같은 긴장감으로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놓여있다. 『짐작의 우주』는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그 가운데에 시인이 엷게 띄운 해사한 미소가 감춰져 있다. 초월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지독히 미워하지만 그 삶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자의 표정이다. “각혈의 낭만”(「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의 영광은 오로지 그의 것이다.
차성환 2015년 《시작》 으로 등단.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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