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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책크리틱/김정수/함께하지 못 하는 안타까움과 영혼의 희생- 정무현 시집 『사이에 새가 들다』, 박하리 시집 『말이 퍼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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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266회 작성일 19-06-2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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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책크리틱/김정수/함께하지 못 하는 안타까움과 영혼의 희생- 정무현 시집 『사이에 새가 들다』, 박하리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



함께하지 못 하는 안타까움과 영혼의 희생

- 정무현 시집 『사이에 새가 들다』, 박하리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



김정수


정무현의 시집 『사이에 새가 들다』는 자연(고향)을 떠나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존재들의 애환이 짙게 스며있다. 사람은 물론이고 풀잎, 나무, 사금파리, 벌, 나무 심지어 발가락의 때까지 시인의 눈에는 “함께하며 견뎌가는 숙명을 택한”(「받침대」)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들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긍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꽃과 봄을 들이민다. ‘시인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는 것이 “소중하기에 촛불을 밝힐 수 있고/결실을 구하려 눈을 거꾸로 떠보기도 하며/열정과 냉정으로 덤비듯 가라앉듯 존재를 느끼고/마침내 씩 웃으며 유유자적으로” 슬쩍 빠져 있다. 수식이 거의 없는 시편들에서는 사물을 대하는 깊이와 연륜, 애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모서리는 각이다.
서로 각을 맞대어 각을 해소한다.
각이 사라지는 만큼 아픔이 줄어든다.

둥글게 자리한다.
중심도 사라지고 모서리도 사라진다.
각이 싫어 둥글게 하니
자주 보지 못하는 고급이다.

둥글고 둥근 사이로 오목해진 틈이 생겼다.
베어낼 수 없는 어정쩡함
어떡하지
어색하고 불편해

툭하면 부딪혀 아팠는데
사방이 모서리 진 곳에 들어서니
편안한 이 기분
미친 거다.
― 「천한 근성」 전문


시 「천한 근성」은 강 상류의 모난 돌이 물살에 떠내려 오면서 둥글어지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소시민의 삶을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물체나 평면의 모가 진 가장자리인 “모서리는 각”이고, ‘각’은 면과 면이 만나 이루어지는 모서리이면서 覺, 却, 角, 刻, 格 등의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차이는 “서로 각을 맞대어 각을 해소”하지만 이는 갈등을 해소한다거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치지 않기 위해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이다. 갈등이나 차이를 최소화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소극적인 행위이므로 일시적으로 “아픔이 줄어”들 뿐 고통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과 각을 세우며 부딪치는 것이 싫어 한 발 한 발 물러나다보면 어느새 각은 사라지고 태생을 알 수 없는 둥글어진, 타협에 길들여진 존재만이 남게 된다. ‘나’는 사라지고 나와 닮지 않은 ‘또 다른 나’가 내 안에 자리하는 것이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고급”스러운 삶일 수도 있지만 어느새 내 안에는 “오목해진 틈”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틈을 메우려다가 내 안에 들인 틈은 나를 병들게 하고, 왜곡된 삶으로 인도한다. 강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는 동안 뒹굴고 부딪치고 깎여 둥글어진 돌(마음)의 안쪽으로 오목한 상처가 생긴 것이다. 썩은 부분은 도려내야 하지만 살아가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마음을 잡아주던 “중심도 사라”졌다. 이쯤 되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삶이다.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툭하면 부딪혀 아팠”던, 각을 세웠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신의 영역이다. ‘잃어버린 나’, 자아를 다시 찾는 유일한 방법은 “사방이 모서리 진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세파에 둥글어진 내가 사각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자아의 발견인 동시에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그 방에서 편안해진 것을 ‘천한 근성’이라 했지만 그 근성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감성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길어올린 천한 근성은 결국 인간의 본성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산덩이가 자리를 옮긴다.
산속의 팽나무, 아카시아, 참나무
저절로 따라 옮긴다.
소나무도 따라 옮긴다.
산속의 다람쥐, 찌르레기, 꿩
모두 절로 따라 옮긴다.
멀리 보는 매마저 따라 옮긴다.
산덩이의 처음과 끝 나무
따라 움직일까 멈출까.
멈추면 산더미를 벗어나고
움직이면 경계를 바꾸게 된다.
―「미미한 것의 별난」 전문


구멍 뚫린 덩치들이
덕지덕지 자리 잡고 올라간다.
푸른 옛날은 사라지고
흐르는 파랑도 흔적 없지만
넓이보다 높이가 최선의 약속이다.
때 묻은 바람들이 수없이 오고 가고
그 바람 속에서 느린 생명들이 터덜대고 있다.
그림이 된 달구지, 똥지게, 빨래터
그들을 덕지덕지 벽돌상자가 먹어치운다.
그리움은 풀냄새에 있어야지
저녁노을보다 붉은 긴 모가지 끝에서 하얗게 쏟아진다.
어디에서 떠다니다 만나야 하는지
생각은 높이높이 엉켜가고 있지만
네가 가장 높을 때 내가 가장 높으면
우린 한 눈에 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자꾸 올라야만 한다. 
지금은 약속인 양 더욱 올라야 한다.
- 「지금마다 답이다」 전문


사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다. “산덩이가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중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 「천한 근성」에서 “사방이 모서리 진 곳”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다 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심이 통째 옮겨가면서 산속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그 땅의 주인인 ‘팽나무, 아카시아, 참나무, 소나무’ 등 식물들과 ‘다람쥐. 찌르레기, 꿩, 매’ 등 동물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따라 옮”겨진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던 동식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동식물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의사결정권이 없는 것들은 끝까지 타자의 의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이는 동식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저절로 따라 옮”기는 것들은 그곳에 살던 소시민들도 마찬가지다. 도시계획에 따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집단이주를 당하기 때문이다. 오래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타의에 의해 “경계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은 원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찰자에 머물고 만다.
시 「지금마다 답이다」는 시 「미미한 것의 별난」의 후속작 같다. 산동네(꼭 산동네가 아니어도) 살던 사람들이 이주를 하고, 산이 통째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상황을 쓴 것 같다. 이 시도 개발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화자는 관찰자로 그친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안타까움은 존재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미미하다. 아니 자연에 동화된 인간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고향과 같다. 이는 예전 산동네 “덕지덕지 자리 잡고 올라”가는 “구멍 뚫린 덩치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표출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옛날 건물들에 비해 “높이가 최선”인 건물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한다. 그런 곳에는 “흐르는 파랑도 흔적 없”고, “달구지, 똥지게, 빨래터”는 그림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귀한 것일 뿐이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꾸 위로만 올라가는 경쟁은 건물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경쟁에 치우쳐 인간미가 사라진 냉엄한 시대에 그리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풀냄새”, 즉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건물이, 생각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 짙어지고 엉켜간다. 그리고 이에 비례해 안타까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 놈은 멀쩡한 사지에도 벌이가 없으니
부모가 보살핀다.
한 놈은 불편한 몸으로 막서리로 보태도
부모는 보살피지 않는다.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식들 가난 벗어나기 어렵다.
- 「가족복지제도」 전문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뜨거워도
차가워도
무거워도
아무리 찔려도
견딘다.
주인과 함께이면 된다.

촛불은 자신을 태워 이름을 얻었지만
사라지는 고통보다는
함께하며 견뎌가는 숙명을 택한다.
―「받침대」전문


시적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은 때로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무의식적 훈계를 동반하기도 한다. 「알고 싶습니다」, 「한글학자는 바쁘다」, 「대마도」, 「도시인」, 「24시간 비서되다」 등 여러 시편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시 「가족복지제도」는 취직을 못해 부모품을 벗어나지 못한 자식과 불편한 몸으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서 어렵게 벌어 살림에 보태도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를 통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시인이 오래 공직으로 복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름을 갖지 못한 채/주인의 이름으로 살아”는 ‘받침대’는 단순하게 받침대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직자를 의미한다. 받침대 위에 어떤 물건이 놓이든 상관없이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견딘다. 받침대의 쓸모는 위에 물건이 놓여야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촛불 또한 자기희생으로 주위를 밝힌다는 점에서 받침대와 다르지 않다. 나를 태워 남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이 있어야 공무원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자연이 있어야 인간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이 자연과 동화된 함께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이다.          


연약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다해 장막 속에서 기어오르기로 했다.
이마저 못한다면 종족을 끊은 죄가 된다.
큰 나무를 타고 오르니 어지럽고 무섭다.
겪어보지 못한 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댄다.

어떡해서든 살아야 한다.
나무 우듬지로 머리를 드밀고 받아든 한 줌의 햇살
너무 높아 아래로 내려보낼 수가 없다.
식구의 아우성이 온몸을 흔든다.

애초에 블랙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아둔한 머리로 할 수 있는 길은
제 손에 구멍을 내는 치명상이다.
볼품없이 벌레에 갉혀 없어지느니
빛을 빨아먹는 구멍충을 길러
길게 빠르게 빛을 가두어 두련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라피도포라」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당연히 ‘라피도포라’라는 식물이다. 각주에 의하면 “스스로 잎에 구멍을 내어 아래쪽 잎에도 햇빛을 닿게 하여 살아가는 덩굴식물”이다. 한 곳에 자리를 잡은 식물은 스스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자세히 관찰해야만 치열한 생존을 알아챌 수 있지만 식물도 동물만큼이나 치열한 생존경쟁을 거쳐 성장하고 살아남는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동물들은 살기 위하여 풀을 뜯어먹고, 약한 동물을 사냥한다. 반면 식물들은 물과 햇빛을 쫓아 움직인다. 식물들의 향일성向日性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위로 자란다. 덩굴식물처럼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한다. 광합성을 하는 잎에 상처가 나든가 구멍이 뚫리면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자칫 그대로 도태될 수 있는데도 라피도포라는 스스로 잎에 구멍을 내는 덩굴식물이다. 울창한 숲에서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다보면 위쪽 잎이 아래쪽 잎의 햇빛을 가리게 된다. 구멍이 난 잎에는 손해지만 전체 잎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빛의 양이 늘어나므로 생존 확률은 더 늘어나게 된다. 작은 희생으로 전체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라피도포라를 통해 한 가정의 가장, 더 나아가 국가 공무원의 애환을 말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개인은 “연약하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겠지만 책임을 다하기 위한 자기희생은 숭고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장막 속에서 기어오르”지 못하면 “종족을 끊은 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사실 삶은 다 그렇다)인지라 “어지럽고 무섭”고,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숱한 고난을 넘겨야 한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가족과 국가를 지킬 수 있다. 타의든 자의든 이미 너무 높이 올라왔으므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 조정권 시인이 「독락당」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내려가는 길은 부셔버렸다. 이는 단순히 “볼품없이 벌레에 갉혀 없어지”는 길이 아닌 “길게 빠르게 빛을 가두어 두”는 영혼의 희생인 것이다. 시인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빛깔마저 화려한 나를 지”(「단풍」)울 수 있던 것은 이런 올곧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려는 삶의 자세와 희생정신은 정무현 시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이 기둥 위에는 시에 대한 열정과 냉정 그리고 삶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의 지붕이 있다. 집안에 어떤 가구를 들이고, 어떤 색으로 벽을 칠할지는 좀 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고요한 대화
2012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한 박하리 시인은 강화 서검도에서 태어났다. 서검도는 석모도에서 서쪽으로 2㎞, 강화에서 서쪽으로 10.2㎞ 지점에 있다. 북방한계선이 지나고 황해남도 연안군과 마주한다. 옛날 중국에서 사신이나 상인들이 황해로부터 한강 입구로 진입할 때 선박을 검문하던 검문소가 있는 섬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특히 강화도의 서쪽에 있어 서검도라 했고, 이는 강화도 남동쪽에 위치한 동검도와 대비를 이루는 지명이다. 먼저 첫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에 수록된 시 「서검도―북방한계선」을 살펴보도록 하자.


선을 그어 바다를 갈라놓았다
쓸리고 밀리어 떠내려 온 조개들,
오고가는 숭어 떼들 국적이 따로 없다.

하늘은 구름이 갈라놓았다
새들에게는 갈라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오고가는 하늘이다 새들도 국적이 없다

땅에도 선을 그어 갈라놓았다 
살금살금 옮겨다니는 쥐들, 스르르 선을 넘나드는 뱀들
개미들은 선을 넘나들고 집도 짓는다
온통 내 땅이다

풀씨 하나 바람에 몸을 싣고 선을 넘는다.
국적이 바뀐다.
―「서검도―북방한계선」 전문


검도는 섬 속의 섬이다. 사방은 바다로 막아섰고, 서검도를 가려면 강화도와 석모도를 거쳐서 가야 한다. 섬과 섬을 거쳐야 비로소 서검도에 갈 수 있다. 그나마 위는 선으로 막혀 있다. 선은 남과 북의 갈라놓은 휴전선 아래 북방한계선을 의미한다.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자유로이 지나다니던 선, 아니 그 선조차 없었다. 이를 인위적으로 멀어지게 떼어놓은 것은 인간이다. 인간만이 선을 넘지 못할 뿐 ‘조개들, 숭어 떼, 새들’은 바다 위에 그어진 선을 자유롭게 오간다. 바다는 그대로 있는데 보이지 않는 선은 그 바다마저도 갈라놓았다. 땅도 마찬가지다. 미물인 ‘쥐들, 뱀들, 개미들’뿐 아니라 ‘풀씨’도 “바람에 몸을 싣고” 마음껏 선을 넘는다. 심지어 한겨울 얼음도 선을 넘는다. 이들에게는 국적조차 없다.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시작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사납게 울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서검도」 전문


서검도의 겨울은 삭막하다. “육지로 향하는 발”인 여객선은 선착장 얼음 위에 묶여 있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는 얼음은 “섬 둘레를 가득 메”우고 있다.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 얼음장은 더 추운 북쪽 바다에서 온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혹독한 환경이므로 살아 움직이는 얼음과 바람, “논둑길을 걷고 있는” 사람뿐이다. 한겨울 서검도는 죽은 듯 고요하다. 일렁이는 파도도, 생물이 살아 움직여야 할 갯벌도, 들녘도 깊게 잠들어 있다. 혹독한 추위에 새들도 날아다니지 않는다. 화자의 시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여객선처럼 정박해 있다. 섬의 섬에 유폐된 화자를 반겨주는 건 “천 년의 눈꽃”이다. “풀씨 하나”에서 촉발된 “천 년의 눈꽃”은 바다와 땅에 그어진 선의 상처를 감싸주는 치유의 상징인 동시에 신성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섬 출신이라 그런지 이번 시집에는 갯내음이 진동한다. 「갯벌」, 「소래시장」, 「월미도」, 「바다로 가는 섬」, 「바다 그리고 바람」, 「붉은 입술」, 「섬, 그리고 바다」 등 제1부는 바다와 관련된 시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에서 나와 항구도시 인천에 살고 있는 시인에게 바다는 “어머니 치맛자락”(이하 「바다 그리고 바람」)이고, 섬은 “바람의 어머니”이고, 갯벌은 “주고도 모자라는 어미의 가슴”(「갯벌」)이다.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은 바다는 모성성母性性을 상징한다.


일단 정지, 이리 와 보세요, 언니 오빠, 마른 침이 넘어가고, 숨이 넘어가고 허리도 넘어간다. 아직 개시도 못했어, 이리 와 봐요. 퍼덕이는 광어를 바가지로 툭툭 친다. 물번개가 번쩍 한다. 이거 한 마리에 우럭 두 마리, 그리고 개불은 서비스. 성질 센 우럭 한 마리가 튀어 나와 시장 바닥에 나뒹군다. 하얀 배를 드러낸 넙치와 물메기까지 바가지 속에 담긴다. 아가미를 들썩이던 숭어가 숨을 고른다. 이거 다 하고 우럭 한 마리 더. 연달아 터지는 물번개 피하며 돌아서는 등에 그녀마저 등 돌린다. 돌아보고 웬만하면 다시 오슈. 어느새 마른 입술에 립스틱 덧바른다. 비릿한 어시장 골목에 붉은 꽃이 핀다.  
 - 「붉은 입술」 전문 


시 「붉은 입술」은 어시장에 가면 흔히 겪을 수 있는 호객행위를 시로 형상화했다. “목젖까지 드러나는 좌판 여자의 붉은 입술”(「소래시장」)로 볼 때, 시적 배경은 소래시장으로 짐작된다. 좌판 여자의 호객행위는 필사적이다. 광어 한 마리에 “우럭 두 마리, 그리고 개불은 서비스”를 외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얀 배를 드러낸 넙치와 물메기까지 바가지 속에 담”지만 화자는 냉정하게 돌아선다. “돌아보고 웬만하면 다시 오”라는 말은 그냥 툭 던져보는 말이지만 절박함이 묻어난다. 손님과의 흥정으로 입술이 마른 좌판 여자는 “립스틱”을 덧바른다. 「서검도」에서 ‘눈꽃’이 핀 것처럼 “붉은 꽃”이 핀다거나 “바다에게 섬은 꽃”(「섬, 그리고 바다」), “봄꽃 피면 노잣돈 마련할 거요”(「메마른 덩굴손」), “벽을 타고 오르는 꽃향기”(「벽 속의 길」), “봄의 정령들이 꽃다발”(「봄, 꽃다발」), “그녀가 오르내리던 장독대에 꽃이 피었다”(「장독대」), “세상은 와글와글해도 꽃향기가 천리를 간다”(「허니문」) 등에서 알 수 있듯, 꽃은 희망을 상징한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딘 것들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사람도 온갖 풍파를 견뎌야 행복이라는 꽃을 피울 수 있다.


아버님, 해장국 드실래요. 일도 안 되는데, 외식은 머 하러 하냐. 한 술 더 뜬 열꽃이 핍니다. 해장국 안 먹는다고 일이 생기나요. 모시러 갈게요.
―「해장국」 부분


아버지가 안방을 굳게 지켜온 장롱문을 엽니다. 칠십 년 넘게 입었던 옷들을 뒤적거려 꺼냅니다. 묵혀둔 손끝 탈탈한 양복들도 꺼냅니다.
―「아버지의 장롱」 부분


삼형제가 골프장에서 만나 단판승부를 시작한다. 홀인원을 기대하고 이글을 기대하고 파이길 기도한다. 게임의 패자는 어머니를 얻을 것이고, 승자는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이다.
―「형제들의 삼국지」 부분


어머니는 우리도 가족사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은 귀 속으로 들어가 귀 밖으로 흘러나갔다.
어머니가 누워계실 때에야 가족사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가족사진」 부분


어제는 꿈에 엄마가 왔다.
평상시랑 똑 같아.
근데 늘 해주던  말이 들리지 않아.
―「영원한 내 편」 부분


박하리의 시에서 꽃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가족은 다양한 이미지로 표출된다. 가족은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이기도 하고,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가족의 부재는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고, 그 상처로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전날 과음으로 쓰린 속을 달래려고 아버님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해장국을 먹는 장면에서는 잔잔한 웃음이, 돌아가시기 전에 장롱의 옷을 정리하는 아버지에게서는 쓸쓸한 애환이, 병든 어머니를 서로 모시지 않으려고 골프 게임을 하는 삼형제에게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어머니가 몸져눕고 난 뒤에야 함께 찍은 가족사진 한 장 없다는 것에는 안타까움이, 돌아가신 엄마에게 늘어놓는 딸의 넋두리에게서는 슬픔이 묻어난다. 특히 “일요일 아침”에 꽃을 사들고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찾아가는 시 「그날」은 마치 살아계신 분을 찾아뵙는 것처럼 정겹기까지 하다. 심각한데 심각하지 않은 표현방식이 박하리 시작詩作의 미덕이다.


안아파병원입니당. 티켓팅은 아침에만 합니당. 티켓팅만 하면 아픔이 사라집니당.
―「아나파병원」 부분


슈퍼맨마트에 가서 슈퍼맨 망토를 산다. 좋은일있Shoe에서 신발을 사고 총각갯벌집에 가 뻘낙지를 먹는다. 금방땃슈에 가 사과를 사고 운수대통 복권방에 가 로또와 연금복권을 산다.           
―「슈퍼맨」 부분


하지만 지나친 조어사용은 시를 재미나게 하기도 하지만 자칫 시를 가볍게 하기도 한다. 발상이 아무리 좋아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한 법이다. 「슈퍼맨」에서 “저8계콧9멍”이나 “집나간며느리컴백” 등의 조어유희는 재미보다 시집 전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쉽다. 2부에 집중된 조어시는 1부 서검도를 비롯한 바다와 섬, 고향의 이미지, 3부의 가족사를 드러낸 시편들을 완성도와 흐름을 깬다는 것을 굳이 지적하고 넘어간다.


사무실에 불을 켜니 놀란 파리 날아간다. 밤새 돌아간 기계의 기어들이 속도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개의 회전축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굉음을 내고 있다. 노화된 센서의 오작동으로 정상적인 속도를 감지하는 것을 잊었다. 한 쪽 구석의 또 다른 기계는 이를 가는 소리를 낸다. 뿌드득 뿌드득, 롤러와 롤러를 돌리는 벨트가 힘겨운 목소리를 낸다. 웅웅, 가쁜 숨을 내쉬며 돌아가는 펌프가 숨을 고르니 적정온도를 지나 한없이 올라간다. 천정의 형광등은 부르르, 떨고 컴퓨터는 드르륵 드르륵, 버스 지나가는 소리를 낸다. 기계들은 아우성이다.

전원 스위치를 내린다.
밤새 풀썩였던 먼지가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멈추지 못하고 돌아가던 롤러도 휴식한다.
사무실 전원도 꺼주세요.
―「돌지 않는 기어」 전문


등단 5년 만에 낸 이번 첫 시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실 소리(소음)와 말(대화)이다. 작고 조용한 섬 서검도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시인은 소리, 특히 소음에 민감하다. 10년 넘게 탄 자동차에서 나는 “끄르릉끄르릉”(이하 「황색등」), “드드득드드득”, “투투투투투”, “더그덕 더그덕”이라든가 시 「돌지 않는 기어」에서 “롤러와 롤러를 돌리는 벨트”가 뿌드득 뿌드득”, “컴퓨터는 드르륵 드르륵” 소리에 시인은 특히 예민하다. 시 「돌지 않는 기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공장의 소음에 노출됐기 때문에 시에서도 소리(소음)에 민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위에 언급한 의성어를 집요하리만치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후드득, 비 내리는 여름날”(「산과 눕다」), “갈갈갈, 웃음소리가 쉰다”(「가면」)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흔들린다.
―「길 위에 널린 말들」 부분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집어넣기에는 늦었다.
―「혀가 꼬인 날」 부분


고요한 대화가 필요하다.
―「고요한 대화」 부분


말을 가둔다.
문을 잠그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새어 나간다. 연기를 피우고 새어 나간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한다.
태풍은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려보낸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남은 말들이 섞이며 부풀어 오른 말들은
넘쳐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온갖 말들이 뒤엉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올라온다. 온갖 것들을 퍼올린다.
바닥이 훤히 들어나도록 부지런히 그물질을 하며 퍼올린다.
퍼올린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전문


말(대화) 또한 소음과 관련이 많을 것이다. 시끄러운 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시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다. 설화舌禍에 휩싸이면 관계는 심하게 틀어지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다. “혀끝을 뱅뱅 돌아 나오는 말들”(「길 위에 널린 말들」) 때문에 눈물을 쏙 뺄 수도 있다. 하여 시인은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로 “말을 가”두려 하지만 말은 결코 가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평생 입을 닫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남은 말들이 섞이고 부풀어 오”르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말이 말을 퍼올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시인은 말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의 것들”을 퍼올린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방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토담 속의 아름다운 꿈”(「길 위에 널린 말들」)인 말을 안으로 새기며, 자신과의 “고요한 대화”(「고요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다. 쉼 없이 달려온 삶의 여정에서 간이역 의자에 앉아 잠시 다리쉼을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소리도 없는, 말도 없는 그곳에서 조용히 나에게 휴식을 부여하는 시간, 꽃을 피울 시간이 아쉬운 것이다.  


김정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제28회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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